중학교 3년 동안 공부를 '나름대로' 열심히 했으나 그 '나름대로'공부법이 문제였는지 진학하고 싶었던 인문계 고등학교와 멀어지고 말았다. 집안 형편으로 학원을 다니지 못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핑계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지만, 결국 나의 목표조차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실업계(지금의 특성화고) 공업고등학교 진학이 가시화되고 기계과, 자동차과, 전기과, 화공과, 토목과(건설정보과), 건축과(디자인 응용 건축과) 6개 과의 선택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적성에 맞는 과는 1개도 없었다. 사촌 형이 기계과 쪽으로 진학해 대기업으로 취업됐다는 일화를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듣게 되었다. 대기업이나 중소기업 등에 크게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기계와도 친하지 않은 나였지만 솔직한 마음으로 '될 대로 돼라'라는 식으로 1 지망에 기계과를 기입했다.
결과를 받고 보니 허무하게도 하위 지망이었던 토목과가 앞으로 3년을 있어야 될 학과가 돼버리고 말았다.
순간 눈 앞이 깜깜했다. 그런 과에서 무얼 하나 싶었다. 그러고는 다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때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될 대로 돼라'식의 선택은 그저 다녀야 할 다음 단계의 학교라는 마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정리되었다. 목표가 없던 중학생의 말로는 선택이 없는 길에서 무작정 걷게 되는 상황을 선택한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거의 포기상태를 선택했는데 그 와중에도 지금까지도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 있었고, 그 선택이 기반이 되어 지금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 세 가지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이다. -장 폴 사르트르
1. 원하지 않았지만 이 학교를 다니겠다고 선택한 것
선택지가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선택한 곳에서 너무나도 다양한 경험을 했다.
관악부 동아리에 입부하면서 색소폰이라는 악기를 배우고, 각종 연주 행사를 경험하게 되면서 모두 함께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 볼 수 있었던 돈 주고도 못 사는 값진 경험을 난 무일푼으로 얻었다. 그리고 3년 동안 매일같이 만나며 같이 울고 웃으며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긴 인생의 친구들을 만났다.
가장 큰 변화는 밝은 모습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된 점이다. 따돌림의 상처에 얽매여 소극적으로 생활하던 모습에서 이전보다 친구들을 많이 만나고 적극적으로(?) 놀았다.
음악 덕분인지, 친구 덕분인지 몰라도 내 인생에 가장 플러스 요소가 가장 많았던 시기로 기억한다.
2. 토목과에서 계속 공부하기로 선택한 것
결론부터 말하자면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나서부터 수학은 유난히 어려운 과목이었다. 학습지 선생님과 함께 1대 1 수업으로 눈높이를 맞춰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지만 6학년이 되면서 수학 점수는 벼랑 끝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중학교 때는...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다. 수포자. 그렇다. 난 수포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산이 기본이 되어야 하는 토목분야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수학은 그렇다 쳐도 난생처음 보는 공식들과 씨름을 해야 하는 질긴 숙명을 마주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날 버리지 않으셨나 보다. 공학용 계산기는 필수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공식은 닥치는 대로 외우고 순차적으로 계산기만 두들겼다. 많은 공식들과 적용방법을 암기하고 그대로 계산기에게 답을 맡겼다. 오답도 많았지만 부담을 덜었다.
물론 수학을 제외한 전 과목을 특출 나게 잘했던 건 아니었지만 토목과의 특성 덕분에 무난하게 중간 정도 성적을 유지하면서도, 어떤 과목에선 교과우수상도 받을 수 있었다.
만약 다른 과에서 공부했다면 어땠을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3. 사람을 위해 보건계열 수시 접수를 선택한 것
토목과의 비전은 내 기준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격증에 대해서도 큰 관심이 없었는지 3년 내내 1개만 땄다. 그렇게 3학년 때는 취업 반보다 진학반 클래스로 들어갔고, 보이지 않는 성적 경쟁에 고군분투했다. 확연히 1~2학년 때와 다르게 노력한 것과 노력하지 않은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왜 공부하는지, 무엇을 하기 위해 공부하는지 여전히 불명확했다.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아무것도 잡힌 것이 없었다. 당연히 대학 선택도 혼란이 올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수시 원서 접수기간이 다기 오면서 각 학과의 교수님들이 홍보를 나오는 시기가 있었다. 가까운 대학부터 시외지역의 먼 대학까지 각양각색의 과를 접할 수 있었다.
이번엔 과 선택의 선택지가 많아져서 혼란이 왔다. 토목 과부터 시작해서 마술과, 애견 미용 관리과, 디자인과, 사회복지과 등 다양한 과들이 즐비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토목과를 지원했다. 배운 게 토목이라 너 나할 것 없이 당연히 토목 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난 현장에서 일해야 하는 토목직종은 1도 관심이 없었다. 마술과, 애견 관리과 같은 흥미롭고 재밌을 것 같은 과에 관심이 생겼고 19살이 꺾이는 그때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응급구조과도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중화요리 장사를 하시면서 어머니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조금만 무리하셔도 몸이 안 좋아지셨다. 병원에 가실 정도는 아니었지만 신경성으로 늘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의사의 꿈을 가진 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조금이나마 몸이 편해지실 수 있게 할 수 없을까 하는 마음이 가슴속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는 것을 생각한 것도 의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의사는 될 수 없었지만 향후 전망 있는 직종으로 떠오르고 응급구조과를 졸업하고 응급구조사가 되면 공무원 시험을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했다. 사람도 살리는 의미 있는 일도 하고, 소위 '철밥통'이라는 공무원이 되면 어머니의 병증을 치유하실 수 있는 의사 분들을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당시로서는 번뜩이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결심이 되었고 끝까지 괴롭히던 마술과, 애견 관리과라는 흥미를 뒤로하고 반에서 유일하게 응급구조과 수시 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합격으로 돌아왔다.
10대 시절의 나는 앞으로의 꿈, 미래에 대해서 어설픈 계획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금의 현실과 견주어봐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10대들은 미래보다는 현실의 즐거움을 찾기 바쁘다. 나는 어떤 즐거움을 쫓고 있었나 생각해보니 친구들과 온라인 PC게임을 밤새워했던 게 전부인 것 같다. 그게 그때는 너무 재밌고 즐거웠다. 최고 레벨을 목표로 누가 더 빠르게 레벨을 올리나 경쟁구도 속에서 치열한 접전 끝에 목표를 달성하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서 더욱 빠져들었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꿈보다 보이는 재미의 완성이 10대의 나에게, 지금의 10대들에게 더 와닿았던 건 아닐까.
그렇게도 좋아했던 게임을 지금은 잘하지 않는다. 20대 중후반이 되면서 오래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게임 속 캐릭터는 성장하는데 나는 성장하지 않는 느낌이 우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키워냈다는 성취감보다 난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가에 포커스를 맞춰가기 시작했다.
많은 비유 중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것에 비유하게 된다. 어떤 것을 그릴 지, 어떤 것으로 그릴 지, 어떤 색으로 색칠할지 선택에 의해 그림의 완성이 달라지는 것처럼 인생도 선택에 따라 그려 갔던 것이다.
그 사소한 선택만으로도 이후에 삶은 바뀌었던 것 같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던 기로에서 학교를 그대로 다니게 되고, 과도 그대로 다녔고, 전혀 다른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선택에 후회는 없다. 의사는 될 수 없었지만 의사분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부모님께도 소소하지만 의학적인 도움도 드릴 수 있었다.
그리고 생사의 위기에서 생명을 구해낸 경험들을 새길 수 있었고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을 케어하고 있다. 되돌아보니 선택지가 없는 곳에 서 있었지만, 그곳에서 기회를 찾고 선택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난 무슨 꿈을 꾸고 있고,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미래는 내 발 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