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디자이너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 물질을 생산하는 것이 싫어진 나는, 어느 날 글 쓰는 일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느낀 감정과 생각들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데다 컴퓨터로 글을 쓰면 종이와 펜조차도 사용할 필요가 없어서. 나는 살면서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글이 쓰고 싶어졌다. 그저 자원을 파괴하는 창작이 아니라서.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물질세계의 창작자로서 환경파괴와 자원낭비라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글쓰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그동안 즐겨 읽은 책들은 전문서적이나 논문이었다. 때문에 글을 쓴다면 그런 책을 써야 할 것 같았고 준비가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새로 무언가를 배울 힘도 없고 창작할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아서 글쓰기는 막연한 생각으로만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중 한 교양 프로그램에서 진행한 글쓰기 강의에서 '에세이'라는 글의 장르를 알게 되었다. 강연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계속 눈물이 흘러 주체할 수 없었다. 글쓰기 강의에서 위로와 용기를 받을 줄이야. 에세이를 쓰면 나도 조금은 가볍게 숨 쉴 수 있겠다는 희망이 반짝였다.
그리고 실패의 두려움도 같이 찾아왔다. 과거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은 생각보다도 더 쉽지 않다. 너무 많이 꼬여버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겠는 체인 목걸이 줄 같이 한쪽을 풀어 잡아당기면 오히려 더 꼬여버려 괴로웠다. 그러면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내려놓는다. 그리고 며칠 뒤 용기가 생기면 다시 도전하는 일이 이어졌다. 그러다 분노와 혐오를 느끼는 날에는 포기하고 버려버리고 싶기도 했는데, 나한테 남은 소중한 게 이거 하나밖에 없다. 쓰레기통에 힘껏 던졌다가도 스스로 다시 되돌아왔다.
내가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는 꿈에 대한 이야기다. 경기도의 한 시골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반짝이던 때부터 패션과 환경의 전쟁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군분투하던 이야기. 그리고 결국 꿈을 제대로 펼쳐보기도 전에 스스로 짓밟아야했던 지금의 모습까지 진솔히 담고 싶다. 나를 혐오하는 내 안에 쌓인 부정적인 감정을 씻어내고 흘려보낼 수 있기를. 희미해진 나 자신의 의미를 글로 써 내려가며 존재의 의미를 복구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