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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스리랑카 Oct 11. 2019

몽골에서 띄우는 편지

  달콤한 인생.. 타이 왕국에서 보낸 어느 가을날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미친 듯 바람이 불었다. 가을 논에는 여물기 시작하는 벼들이 어쩔 줄 모르고 이리저리 내동댕이 치는 모습이 안쓰럽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흩뿌리기로 자라난 벼들은 잡초 하나 들어설 공간 없이 빽빽한 포기 덕분으로 비가 그치고 바람이 머물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자리로 일어선다. 쓰러질 틈이 없었던 이유일까 볼수록 대견하다. 아마도 벼들은 어깨를 마주하며 힘든 시간을 버티어 냈을 것이다. 이처럼 이곳의 벼들은 생각처럼 허약하지도 무르지도 않다. 변변한 약도 영양제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인정사정없이 쏟아붓는 물 폭탄을 견디며 자라는 벼들을 보며 깊어가는 가을을 생각한다.




''어느 깊은 가을날 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제자는 말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스승이 묻는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달콤한 인생'의 마지막 자막에서



단출한 저녁상을 차려 놓고  묵은 영화를 돌려본다. 일부러 연출한 것은 아니지만  십수 일간 비울 냉장고에 쓸데없이 썩어 문드러질 식 재료를 남겨두지 않을 요량으로 찬밥에 인스턴트 카레를 붓고, 남은 소주를 반찬 삼아 해치우는 저녁상에 안주로 "달콤한 인생"을 올려놓고 보니 어울리지 않게 비장감마저 든다. 아마도 열 번 이상은 본 듯한데 이 영화의 매력은 무궁하다. 오늘은 영화의 시선을 감독으로 생각하고 줄거리를 따라가 본다. 새롭게 안 사실이지만 극본을 감독이 썼다는 오프닝 타이틀을 보면서 내심 대단한 감독이구나 또 한 번 감탄한다. 그것은 비범한 말이 아닌, 살면서 혼자 말처럼 지껄이는 사소한 일상의 비밀스러운 말들을 그리 세심하게 수집하고 보관해 왔는지 놀랍다. 감독은 영상을 생각하기 전 말의 쓰임과 울림의 반향을 알아차린 언어의 마술사이기도 하다. 또한 시간의 고요함까지도 알아차린 관찰자이기도 하다.


유끼 구라모도의 로망스가 잔잔히 식탁을 적시는 순간, 영화 속 주인공은 차갑게 고요히 죽어간다. 슬픈 듯 슬프지 않고 무거운 듯 무겁지 않은 선율의 배반은 아름답다. 마치 이루지 못한 꿈이라도 인생은 달콤한 것이라고 속삭인다.                             



                                            (2016.10.10 마이 라이프 타이랜드 일기에서 꺼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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