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춘추시대 국가 간 관계는 명목상 ‘주 왕실과 열국의 관계’와 실질적인 ‘패자와 열국의 관계’라는 중층구조의 특징을 내포함으로써 각 국가 역시 자신의 종법적 위상과 현실적 위상이라는 두 가지 기준에 따라 생존을 보장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 동맹을 통한 국가 간 연대는 형식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하는 규범적 안전장치로 작용한 동시에 전쟁의 도덕적 명분으로 채택되어 전쟁의 합리화와 가속화를 위한 수단으로도 작용했다.
그렇다면 종법 관계인 국가 간에는 예제가 작동하고 이성(異姓)의 국가 간에는 노골적인 폭력행사가 이루어졌던 것일까? [좌전]은 춘추 초기 패자의 역할을 수행한 정(鄭)나라의 행태를 통해 새로운 규준이 작동하는 역사단계에 도달했음을 시사한다. [좌전]에서 “정나라 무공과 장공이 평왕을 위해 경사(卿士)가 되었다. 왕이 괵(虢)나라에 맡기려 하자 정나라 백작이 왕을 원망했다. 이에 왕이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주(周)나라와 정나라는 인질을 교환하여 왕자 호(狐)가 정나라에 인질로 갔고 정나라 공자 홀(忽)이 주나라에 인질로 갔다 … 군자는 말했다. … 군자로서 두 나라 사이의 신의를 맺고 예의로써 그것을 행함에 있어 또 어찌 인질을 이용한다는 것인가?”라고 평가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주나라와 정나라 간 인질교환은 천자-제후 간 예제로부터 일탈된 모습이다. 더욱이 주 왕실 보전과 평왕 옹립에 괵나라와 더불어 정나라의 역할이 상당부분 인정된다 할지라도, 주 왕실에 대한 정나라의 태도는 전통적인 규범에서 벗어난 듯 보인다. 그 원인제공은 역설적으로 주 왕실에 있었다. 정나라 재상인 자산(子産)이 옛날 정환공 시기에 상인들과 함께 주나라의 기내에서 이 땅으로 나와 서로 협력하여 개척했고 같이 정착하여 대대로 지킬 맹서를 하여 서로가 믿어 왔다고 회고했듯이, 주 천자의 재상격인 경사로서 정나라의 위상은 주 왕실 동쪽 번병으로의 책무이행에 따른 정당한 보상이자 예제에 순응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평왕은 서쪽 번병으로의 괵나라를 통해 동쪽 번병인 정나라를 견제하려고 했기에 정나라의 반발이야말로 주 왕실의 예제 일탈에 대한 올바른 대응인 동시에 자기보존의 표현이었던 셈이다.
양자의 갈등은 주 평왕 사후 환왕(桓王)에 이르러 폭발한다. [좌전] 「환공5년」의 기사에는 “천자가 정나라 백작의 정권을 빼앗자 정나라 백작이 조회하지 않았다”(王奪鄭伯政, 鄭伯不朝.)고 소개되어 있다. 이후 전개양상은 주 천자와 정장공(鄭莊公)의 수갈(繻葛)전투(B.C. 707)로 귀결된다. 당시 수갈전투 현장을 묘사한 내용을 보면 그해 가을 주 천자가 제후들을 이끌고 정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정나라 백작이 이에 대응했다는 것이다. 전투에서 채·위·진나라 군대가 모두 달아나자 천자의 군사들도 혼란에 빠졌고 정나라 군사가 힘을 합해 공격하자 천자의 군사가 대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정나라 축담이 천자에게 활을 쏘아 어깨를 맞혔지만 부상을 입은 천자 역시 잘 싸웠다고 한다. 그날 밤 정나라 백작은 제족을 보내 천자를 위로하고 좌우 사람에게 문안드리게 했다는 것이다.
큰집 큰형하고 작은집 동생이 목숨 걸고 자존심 싸움을 해놓고 밤에 작은집 동생이 부상당한 큰형에게 약을 주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위로했다는 촌극은 춘추시대의 특징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것은 우선 주 왕실이 종법관계의 제후국을 공격했다는 자기부정과 함께 패전으로 인한 권위의 추락이라는 자가당착을 드러낸 동시에 주 왕실조차도 자기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열국과의 관계를 폭력으로 정립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표출한 것이었다. 또한 제후로서 정나라의 대응 또한 도덕적, 정치적으로 정당할 뿐만 아니라 여전히 예제의 틀 내에서 구속받고 있다는 한계성도 드러낸다.
하지만 정나라의 사례가 주 왕실에 정당하게 대응해서 국가생존을 위한 합리적 선택으로 전쟁을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경우인 반면, 그 반대 사례는 춘추시대 열국의 동기와 상관없이 패(覇)에 의한 노골적인 폭력이 생존여부를 결정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좌전]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기존 예제의 외연을 유지하려는 행위자와 외연을 무너뜨리려는 도전자로서 패(覇)와 이들의 선택에 의해 전쟁과 멸망의 과정으로 강제되는 여타 열국의 존망(存亡) 양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