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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인이십팔호 Jun 20. 2021

전쟁의 도덕적 합리화

춘추의 전쟁은 패자와 열국 모두에게 국가존망(存亡)을 합리화하는 수단이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전쟁은 파괴와 강탈을 동반하기에 도덕적 가치를 수반할 수 없는 원천적인 한계를 지닌다. 예를 들어 [춘추]의 “초나라 사람이 현나라를 멸망시키자 현나라 자작이 황나라로 도망갔다”(楚人滅弦, 弦子奔黄. 「僖公5年」)라는 기사와 “초나라 사람이 황나라를 멸망시켰다”(楚人滅黃. 「僖公5年」)는 기사에 대해 [좌전]은 “강나라와 황나라와 도나라와 백나라는 제나라와 사이가 좋았으며 모두 현나라와 인척이었다. 현나라 자작은 그것을 믿어 초나라를 섬기지 않았고 초나라에 대한 준비도 하지 않았으므로 멸망했다”고 설명하면서 더불어 “황나라 사람은 제후들이 제나라와 화목한 것을 믿어 초나라에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서 초나라 도읍인 영에서 우리나라까지 구백리나 되는데 어떻게 우리나라를 해치겠는가라고 했는데 그 해 여름에 초나라는 황나라를 멸망시켰다”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국가존망의 여부가 패권국가에 의해 결정되었던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지만, 동시에 더 이상 종법의 규범과 동맹의 규범이 현실정치의 인식과 논리를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좌전]은 현나라·황나라의 멸망이 여전히 종법질서에 기초한 규범이 현실정치의 규범에 의해 대체되었던 상황을 판단하지 못한 위정자들의 무지에 따른 논리적 결과로 평가한 것이다. 따라서 [좌전]을 보면 ‘좋은 질서’라는 것이 패자의 폭력(전쟁)과 규범(동맹)이 상황과 상대에 따라 자의적이지만 선별적으로 작동했던 현실정치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패자는 전쟁과 동맹의 명분을 어떻게 합리화할 수 있었을까? 최초의 패자인 제환공의 사례에서 보자면, 제나라의 전쟁과 동맹은 자발적 동기에 기초한 제환공 자신의 공적 책무 인지와 이행에서 비롯함을 보여준다. 이를 증명해주는 것은 공교롭게도 [맹자]에서이다. 제환공을 그렇게 싫어했던 맹자가 제환공을 패자로 추대한 규구(葵丘)회맹에서 선언했던 규범들을 가장 상세하게 소개하는 것은 또 무슨 역설인가? 맹자 자신이 겉으로는 왕도를 외치며 패도를 부정했지만, 이면에는 패도의 효능과 업적이 실재하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어쨌든 맹자는 규구회맹의 규범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서 소개한다.     


첫째 불효한 자는 죽이고 세자를 바꾸지 않으며 첩을 정실로 삼지 말라는 것, 둘째 현능한 이를 존중하고 인재를 길러 덕이 있는 사람을 표창하라는 것, 셋째 노인공경과 어린이를 사랑하며 손님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말 것, 넷째 관직은 세습, 겸직하지 않게 하며 현능한 자를 얻도록 하고 대부를 마음대로 처형하지 않을 것, 다섯째 제방을 아무데나 쌓지 말고 이웃 나라 양곡을 수입하는 것을 거절하지 말며 대부를 봉읍할 때는 반드시 보고할 것      


사실 규구회맹의 규범은 그 실제 이행여부와 상관없이, 맹서(誓)의 형태로 상호준수를 강제함으로써 예제의 규범성과 현실정치의 구속성을 아우르는 성격을 지닌다. 이로부터 패자야말로 규범과 실력의 명실상부(名實相符)라는 정체성을 시사하며, 패자의 규범성이라는 ‘올바른’ 동기에 기초한 질서로 춘추시대를 규정하려는 역사가들의 의도가 엿보인다. 


그렇다면 열국은 패자에 의한 전쟁의 도덕적 합리화에 어떻게 대응했던 것일까? 그 대표적인 사례는 진(晉)나라와 패권경쟁 중인 초(楚)나라의 침략에 노출되었던 정(鄭)나라의 선택에서 찾을 수 있다. 노선공(魯宣公) 9년 “초나라 자작이 정나라를 정벌했다. 진나라 극결이 군사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구원했다”(楚子伐鄭. 晉郤缺帥師救鄭)는 경문과 노선공 10년 “초나라 자작이 정나라를 정벌했다”(楚子伐鄭)는 경문에 나타난 초나라의 연이은 침공에 대해 [좌전]의 설명은 정나라의 멸망이 스스로 자초한 불합리한 선택의 결과임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좌전]에서 그 이유에 대해 진나라 극결(郤缺)이 정나라를 구원하고 정나라 백작이 초나라 군사를 유분에서 쳐부수니 나라사람들이 다 기뻐했으나 자양만은 근심하여 말하길 이것은 나라의 재난이다.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불안감을 피력한 정나라 재상 자양의 독백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동맹인 진나라와 연합했던 정나라가 이 당시 취해야 할 합리적 선택은 더 가까이 위치해 있던 초나라와 타협하는 것이었다. 결국 노선공 11년 초장왕(楚莊王)의 압도적인 힘 앞에 노출되어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구원하러 온 진나라 군대마저 초나라에 대패한 결과 진릉(辰陵)맹서에 따라 동맹을 체결한 정나라의 선택은 사실상 자포자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정나라는 멸망을 피하는 합리적 선택으로 진나라와 초나라가 덕에 힘쓰지 않고 무력으로 다투고 있는 상황이니 쳐들어오는 자가 누구건 그를 편들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할 뿐이었다. 


그렇게 보면 춘추 열국의 통치자들에게 직면한 과제는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전쟁을 도덕적으로 자기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전쟁이 군주 개인의 사적 욕망과 동기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형상 예제의 일탈에 대한 도덕적 응징으로서 ‘벌’, ‘토’, ‘침’ 등으로 표기한 전쟁의 내면은 자발적 동기가 아니라 강제적 동기, 특히 폭력과 규범 어느 것을 선택하든 패자의 선택에 의해 강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벌(征)이란 바로잡는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들을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는데 어째서 전쟁이 필요하겠는가?”라는 후대의 언명을 고려할 때, 춘추시대의 전쟁은 규범적 절차를 충족시키는 올바른 폭력, 즉 의전(義戰)으로 합리화되었을 뿐이다.


춘추의 위장된 모습, 즉 도덕과 규범에 따라 예제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패자의 사적 욕망과 동기에 의해 언제든지 자의적인 폭력행사와 질서의 유린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가증스러움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면, 예제의 외형을 유지하고 질서를 주재하는 일이야말로 그 교활한 이중성이 더 이상 충동적으로 분출될 수 없도록 압도적인 힘과 권위로 구속해야 한다. 관중은 이 사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사적 욕망과 동기로 움직이고 생각 없이 사치스럽고 향락을 추구하는 개성을 지닌 제환공을 가장 규범적이고 합리적인 행위자로 환골탈태 시키기 위해 채택한 전략이 규범과 실력을 모두 정당화할 수 있는 존재, 곧 ‘패왕’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내외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통치기제로 ‘패’의 새로운 정의를 정립해내야 하는 것이 관중에게 부과된 책무였다. 그래서 관중은 춘추시대의 이중성을 통제하는 기제로서 예법겸전의 정치를 기획했고, 이를 끌고나갈 리더를 ‘패왕’으로 정의했던 것이다. 이제 ‘패왕’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갈 ‘실력과 규범을 겸비한 제왕의 길’이 무엇인지 관중의 기획을 따라가야 할 차례이다. 그것은 훗날 전국시대 말기에 정리된 것으로 보이는 [관자]의 내용에서 찾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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