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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인이십팔호 Jul 17. 2021

법치는 백성을 사랑하는 방법

그렇다면 명실상부(名實相符)와 법치(法治)는 어떤 관계일까? 우선 [관자]에서 법은 백성의 부모(法者, 民之父母也.)로 확정한다. 도대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정의한 것일까? 관중이 허투루 법을 얘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관중의 정치관을 제대로 이해하고 계승한 후계자라면, 관중이 말하는 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 [관자]에 표현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랬을 때, “법이란 군주가 백성을 통일하여 부리는 방법 … 법이라는 것은 천하의 지극한 도이며 성군이 절실하게 써야 하는 것”라는 [관자]의 단정에 주목해보자! 왜 법이 성군(聖君)이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통치수단일까? 오히려 도덕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법이 곧 도의 현실적 재현이기 때문이다. 즉 도(道)가 말하는 바는 하나이다. 근본원리는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쓰임새는 다양하다. 그래서 도를 듣고서 집안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한 집안의 가장이라 할 수 있고, 도를 듣고서 고을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한 고을의 장이라 할 수 있으며, 도를 듣고서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한 나라의 군주라 할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고 최종적으로 도를 듣고서 천하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 바로 천자라 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도의 현실적 재현으로서 현실정치의 운영원리로 법으로 치환할 수 있고, 법으로 통치하면 ‘사람답게 마땅한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법은 부모-자녀 간 친친(親親)의 규범과 마찬가지로 상도로서 불변성과 현실의 가변성에 조응할 수 있는 유연한 기능성 모두를 함축하는 원칙인 셈이다. 


더욱이 ‘표준’으로서 법은 률과 령의 기능과 동일하며 적용대상에 대한 일률성과 공정무사성을 확보했다. 만약 법이 현실의 질서와 안정을 위해서 불변하는 상도를 현실의 객관적 표준으로 치환한 것이라면, 당연히 법에 의해 지배해야 하고 지배받는 것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선택해야 마땅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즉 법(法)이란 군주가 천하의 모든 것을 잘 조절하여 간사함을 금지시키는 것으로 세상을 관할하여 다스리고 종묘를 받들기 위한 방법인데, 만약 군주가 법을 버리고 사사로운 뜻으로 일을 처리하면 혼란함이 생기고 간사함이 늘어나 공정한 원칙에 해를 끼쳐 군주가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지혜를 가리고 그를 깨우칠 수 있는 언로를 막아 나라가 위태롭게 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의 실행여부가 일치일란의 역사법칙성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는 셈이다.


상기한 [관자]의 단정은 법치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별하는 정의(正義)실현의 기준이며, 두 영역을 보존하는 최선의 기제임을 반영한다. 그런 점에서 백성은 이익을 탐하고 행실이 조급한데 형벌이 가볍고 죄과를 밝히지 않으면 혼란을 조장하는 것이고 사벽한 무리들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지만 오히려 백성을 해치는 것이라는 현실인간의 이기성을 방임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 정치’인지를 역설적으로 강조할 수 있다. 이러한 [관자]의 법과 정치에 대한 관념은 “형벌을 가함은 백성을 미워하기 위함이 아니고 사랑의 근본”이라는 [한비자]와 “형벌을 엄중하게 하고 상을 적게 하는 것이 군주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상군서]의 정언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이기적 인간을 전제로 법치(法治)가 군주의 애민(愛民) 실현을 위한 방법론으로 제시되었음을 방증한다.


정말 법치가 곧 애민을 위한 최선의 방법인지를 어떻게 확증할 수 있을까? 모두가 법치가 가혹한 엄형주의와 법만능주의로 인간의 고통을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런 우려와 거부감은 사실 법의 본질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 불과했던 것일까? 우선적으로 생각해 볼 사항은 궁극적으로 ‘누가 법치의 대상인가?’이다. 즉 “군신, 상하, 귀천 모두가 준수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이라는 인식은 법치의 출발점이 존법(尊法)임을 명시한다. 당연하다. 법치실행의 첫 관문은 모두가 법 앞에 공정무사한 대상이 되고 이에 따라 법을 존중하고 준수해야 한다. 그런데 근본적인 질문이 또 제기될 수 있다. 그렇게 존중받아 ‘마땅한’ 법을 도대체 누가 만드는 것인가? 그리고 현실에서 최고로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인 군주는 어떻게 되는가? 이 두 의문을 한번에 해결하는 것이 바로 군주가 ‘법의 제정자’이자 ‘군주를 존중’하는 것이 ‘법을 존중’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존법이 곧 존군(尊君)인 것이다.


만약 [관자] 법치론에 내재한 존법의 의미가 존군을 결과한다는 가정을 성립할 수 있다면, 이제 법치의 필연성과 정당성은 법의 제정자인 군주까지 법에 적용되어야 하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 점에서 “법이 통행되지 못하는 것은 위에서부터 이것을 위반하기 때문”이라는 상앙의 문제의식을 다시 상기해 볼만 하다. 군주도 존법해야 한다는 점만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다면, 이런 군주의 태도가 항상적인 형태로 치환된 것이 법(法)이 되는 셈이다. [관자]는 바로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법으로 해도 시행되지 않는 것은 명령을 기초하는 사람이 세심히 살피지 않기 때문이고, 상벌을 믿어도 시행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솔선하지 않았기 때문이기에 금령이 군주 자신을 이길 수 있으면 명령이 백성에게 시행된다고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이 군주의 존법으로부터 출발하는 법치가 애민의 방법론이라는 법가의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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