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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인이십팔호 Jul 17. 2021

법은 측정(測定)하는 도구일 뿐

역사와 인간에 대한 조망을 통해 일정한 법칙성을 도출함으로써 법이 이 두 가지 요건의 법칙성에 토대를 둔 기원을 살펴볼 때, 법가의 법 인식은 법의 개념 정의보다 그 실질적인 기능에 초점을 맞춘 것임이 분명하다. 앞서 [관자]에서 소개하는 법 개념이 이미 [상군서]의 법 개념과 동일하다고 지적했듯이, [관자]는 [상군서]에서 비로소 제시되는 률(律)을 법과 동시에 소개하고 있다. 즉 법이란 공로를 일으키고 포악한 자를 두렵게 하는 방법이고, 률이란 각자의 분수를 정하여 다툼을 그치게 하는 방법이며, (정)령이란 백성을 이끌어 정사를 관리하는 방법이라고 구별한다. 그리고 ‘법률과 정령은 모두 백성을 통제하는 규구와 승묵’으로 비유하는 [관자]의 법·률·령 정의는 ‘가치’를 내재한 것이 아니라 ‘측정’을 위한 객관적인 기준으로 기능한다는 의미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세상에 쓰는 기물은 규·구·승·준으로 양을 저울질하고 수를 헤아려 물건의 품별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람은 한 가지 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각각의 일에는 마땅함이 있어 그 상세함을 다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법은 구별을 위한 객관적 측정기준으로 직면한 상황에 따른 마땅한 선택을 가능케 하는 도구로 기능하는 셈이다. 


도대체 규구(規矩)와 승묵(繩墨)의 기능이 무엇이기에 이러한 비유를 했던 것일까? 규구는 글자 그대로 둥근 자와 네모난 자를 뜻한다. 즉 곱자 및 그림쇠라고 알려진 컴퍼스, 수평기 같은 건설현장의 도구들을 의미하고, 승묵 역시 길이의 단위와 줄긋는 먹줄이라는 뜻으로 목수들이 사용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길이를 측정하고 반듯한 표시를 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무게를 재는 저울 및 저울추와 말 또는 됫박과 됫박밀대를 법이라고 하는 법가의 표현방식과 일맥상통한다. 왜냐하면 승은 줄을 튕겨서 바르게 하는 기구이고 준은 높낮이가 고르지 않은 곳을 평평하게 하는 기구이며 구는 들쭉날쭉 굽은 것을 집어넣어 바르게 하는 기구이기 때문에 성군과 현명한 재상이 법도를 운용하는 것을 비유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림쇠(規)와 곡척(矩)은 사각형과 원형의 올바른 기준이기에 정교한 눈과 날렵한 손이라도 변변찮은 그림쇠와 곡척을 사각형과 원형의 올바름으로 삼는 것만 못하고, 정교한 사람이 그림쇠와 곡척을 만들었어도 그림쇠와 곡척을 폐기하고서 사각형과 원형을 그릴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규구와 같은 잣대는 길이를 측정하는 도구이기에 자로 길이를 재면 만번을 재도 틀림없으므로 척촌으로 길이를 재는 것은 부유하고 존귀한 사람이 재더라도 더 길어지지 않고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이 재더라도 더 짧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규·구·승·묵으로 비유되는 법이 지닌 제일성(齊一性)과 법치의 공정무사함을 예단케 한다. 


이러한 [관자]의 단정은 “능숙한 목수는 눈짐작만으로도 틀림없이 먹줄을 맞추지만 반드시 먼저 규구를 가지고 재며 우수한 지혜를 가진 자는 재빠르게 행동해도 일을 그르치지 않지만 반드시 선왕이 마련한 법에 비추어서 생각한다”는 [한비자]나 “저울을 내버리고서 무게를 판단하고 자를 폐기하고서 길이를 헤아리는 것이 비록 정확하다 해도 상인들이 이런 방법을 쓰지 않는 것은 반드시 믿을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상군서]의 정언과 똑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현재의 행위 표준으로서 ‘법’이 저울의 재량이 있으면 무게를 속일 수 없고 자의 눈금이 있으면 길이를 재는데 착오가 날 수 없듯이, 규·구·승·준이 가리키는 정해진 값에 따르는 것 일뿐 측정자의 자의적인 해석과 개입을 허용할 수 없으며, 헌률과 제도는 반드시 도를 법 받고 명령은 반드시 명백하고 상벌은 반드시 확실하고 주밀해야 한다는 점에서 마땅한 ‘도’로부터 일탈할 가능성을 예방할 수 있다는 비교우위까지 갖는다. 즉 “저울이란 물체의 무게를 재는 목적으로 쓰지만 사람이 그것을 쓰지 않는 이유는 마음이 재물의 이익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관자]의 분석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은 인간의 이기성 통제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결국 [관자]는 법이란 천하의 저울이며, 군주의 표준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법이 기능에 의해 정의되고 이해되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법은 ‘표준’(繩墨)이라는 의미를 함축하며 특정한 주체와 그 목적에 의해 자의적으로 변형되거나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변화하는 상황에 시의적절하게 응변(應變)한 것임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법이란 다른 것을 같게 하는 방법으로 어쩔 수 없이 행하는 것이기에 죽이고 금하고 베는 것으로 통일한다. 그러므로 모든 일은 법으로 감독하고 법은 권형(저울추)에서 나오며 권형은 도에서 나온다”는 [관자]의 정언은 법의 실질적 기능이 객관적 측정에 있고, 측정자로서 군주의 공정무사한 태도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더욱이 법의 적용과정에서 실현되는 제일성과 공정무사성의 이면에는 단순히 법치와 법에 의한 지배의 문법적 의미가 아니라 존법(尊法)과 존군(尊君)의 일원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교의로의 선행 작업도 내포한다.


이 점에서 마땅함과 올바름 또는 정의(正義)의 가치를 탐색하는 명실(名實)의 구별이 역사의 법칙성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명실문제는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 [논어] 「안연」)고 답한 정명(正名)에서 비롯했다. 전국시대 이르러 정명의 문제는 언어가 표시하는 언명과 그것이 담고 있는 구체적 내용과의 상이한 정도가 어디까지 허용가능하며 문제시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로 확대되었다. 만약 춘추전국의 제자 간 사상투쟁이 정치권위의 정통성을 결정하는 자격문제를 둘러싼 경쟁이었다면,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하지 못하고, 말이 순하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맞지 못하고, 형벌이 맞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진다”는 [논어]의 정언은 논변이 언어적 형식논리에 머물지 않고 객관적 진리를 논증함으로써 현실정치의 당위성까지 규정하는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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