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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인이십팔호 Sep 22. 2021

금지해서 스스로를 이겨라

정말 법치는 인간을 규범화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현실에서 자행되는 법으로부터의 일탈과 불법, 탈법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법치실행의 선행조건인 군주의 존법이다. 앞서 법치론이 법치성공의 관건으로 존법여부를, 그 다음으로 군주가 존법하느냐의 여부를 결정적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법 제정자로서 군주가 당연히 솔선수범해야 하는 것이지만, 현실에서 가장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가 또한 군주이기 때문에 법과 군주를 놓고 누가 우위에 있는지 가늠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더욱 군주가 스스로 존법이라는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이고, 법 제정자도 법이 실행되는 즉시 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법의 제일성과 공정무사성이 안전장치로 설정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금지해서 (군주) 스스로를 이겨야 한다’(禁勝于身)는 것이다. 그것이 승(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의도이기도 하다.


[관자]에서는 “이른바 승이란 법이 확립되고 명령이 행해지는 것”으로 정의한다. 법이 확립되고 명령이 행해지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법을 받들고 직책을 지키고 백관이 법을 받들고 직책을 지키는 것이며, 법이 사악함을 조장하지 않으면 모든 백성이 돈독하고 성실하여 농사에 힘쓰고 검소하게 열심히 산다는 것이다. 군주 스스로 존법하고 탈법, 불법에의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이겨내면 신민 역시 감히 이런 군주가 제정한 법과 내려진 명령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 결과 모두가 ‘좋은 백성’이 된다. 


정말 그런 것일까? 법치가 성공하게 되는 내막은 사실상 다음과 같다: “법으로 해도 시행되지 않는 것은 명령을 기초하는 사람이 세심히 살피지 않기 때문이고 세심히 살펴도 시행되지 않는 것은 상벌을 가볍게 해서이다. 상벌을 무겁게 해도 시행되지 않는 것은 상벌을 믿지 않아서이고 상벌을 믿어도 시행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솔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치 성공의 관건이 신뢰(信賴)에 기초하며, 신뢰의 당사자인 군주와 신민 관계에서 누가 신뢰의 동기를 먼저 제시해야 하는 것인지는 자명하다. 법을 만들어 명령을 내리는 자가 솔선수범해야 한다. 법치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법을 존중하고 준수해야 하는 최우선적인 행위자는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승의 의미는 군주의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의 상관성을 반영한다. 승(勝)은 법치를 실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군주의 덕목인 셈이다. 따라서 군주의 도는 법이 확립되고 명령이 행해지는 승보다 귀한 것이 없고 승하기 때문에 군주의 도가 설 수 있다고 단정할 수 있다. 


만약 군주의 존법이 신뢰형성의 출발이고 그 결과 치국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면, 법에 의한 규범화란 어떤 것일까? 최초의 질문에 [관자]의 해답은 이렇다. “무엇을 나라의 법이 되는 풍속이라 하는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군주의 뜻에 어긋나지 않고 귀하고 천하게 여기는 것이 명령에 어긋나지 않고 군주에 위배되는 일이 없으며 백성에게 영합하는 말이 없고 사치한 삶을 누리지 않고 법도에 벗어난 옷을 입지 않고 향리에서 행동을 조심하여 조정의 일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 나라의 법이 되는 풍속”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위의 해답은 법치의 성공이 규범화로 결과한다는 논리적 설명과 함께 규범화의 구체적인 양상이 군주의 신뢰형성 동기로부터 확장된 신민의 법에 대한 신뢰, 즉 존군=존법임을 가리킨다. 신민이 자발적으로 존군하면 군주가 법령을 제정하되 사사로운 논의를 허용하지 않으면 백성이 서로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지 않고, 법을 어겨 죄를 지은 사람에게 형벌과 사형을 집행함에 있어 용서 없이 엄정하면 백성이 선을 행하지 않을 수 없으며, 벼슬과 녹봉을 부여하는 큰 권한을 주지 않으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어지럽히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엄격하게 적용하면 법이 자동으로 실행되고 나라의 모든 곳에서 이처럼 시행되면 풍속으로 자리 잡아 그 나머지는 강제하지 않아도 다스려진다는 논리적 귀결에 이른다. 이와 같이 풍속으로 자리 잡아 사람들 모두가 존법이 몸에 배어 명령이 중시되면 군주가 존엄해지고 군주가 존엄해지면 나라가 안정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따라서 군주를 존엄하게 하는 것은 명령을 시행하는데 있으며 명령을 시행하는 것은 형벌을 엄숙하게 하는데 있다는 법치의 엄형주의로 전개될 수 있는 논리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법에 대한 규범화는 공적 영역에 대한 사적 영역의 침해를 방지하고 이를 엄형에 기초해 적용함으로써 신민으로 하여금 사적 이익 추구가 공공선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도록 유도하는 기제로 작동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무릇 법을 만드는 사람은 군주고 법을 지키는 사람은 신하고 법을 본받아 행하는 사람은 백성이다. 군신, 상하, 귀천이 모두 법에 따르는 것을 큰 다스림이라고 한다”는 [관자]의 정언이야말로 치국론으로서 법치론의 본질에 대한 명백한 선언을 의미한다. 즉 군주는 법의 제정자인 동시에 법치의 주체가 되며 신민이 법치의 대상이지만, 법치의 성공여부는 법과 명령에 대한 신민의 신뢰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 군주 역시 법의 제일성(齊一性)에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민뿐 아니라 군주 역시 존법의 태도가 책무(責務)로 전환되었음을 시사한다. 


[관자] 법치론의 본지는 여기에 있다. 즉 존법은 군주와 신민의 관계를 법과 제도의 강제로 형성하고 이에 기초해서 존군(尊君)이라는 규범화로 전환하는 출발점이자, 양자의 관계성을 규범화하는 선행조건으로서 군주의 존법이야말로 군주 자신이 자발적인 존군을 이끌어내는 합리적 선택이다. 결국 합리성에 기초한 군주와 신민 간 관계는 존법에 대한 태도여부에 달려 있고, 그 성립선행조건은 존법을 자신의 책무로 이행하려는 군주의 의지, 곧 승(勝)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치란은 그 마음에 달려 있고 한 나라의 존망은 그 군주에 달려 있으며 천하의 득실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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