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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인이십팔호 Sep 22. 2021

리더십과 팔로워십의 4가지 유형

사실 존법과 탈법의 경계는 군주와 신민의 관계성을 규정하는 지표로 작용한다. [관자]에서는 제환공과 관중의 대화를 통해 군신관계의 네 가지 유형을 소개한다. 제환공이 아마도 군주와 신하의 유형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좋은 군주와 나쁜 군주, 즉 유도(有道)한 군주와 무도(無道)한 군주, 그리고 좋은 신하와 나쁜 신하, 곧 유도한 신하와 무도한 신하를 설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먼저 관중은 유도한 군주와 유도한 신하의 관계성을 ‘치(治)’로, 무도한 군주와 무도한 신하의 관계성을 ‘란’(亂)으로 규정한다. 이 역시 역사와 인간에 대한 조망을 토대로 치란으로 대조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관중은 서백(徐伯)의 말을 빌어 옛날 유도한 군주는 성인이 그의 앞에(재상으로) 있고 바르고 염치 있는 인사가 측근에서 받들고 서로 다투어 의를 행하여 위아래가 모두 다스려졌다고 지적하는 반면, 옛날 무도했던 임금은 나라를 다스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어 음모를 꾀하고 정령이 선하지 않았으며 정령을 베풂이 공정하지 못하고 형벌은 가혹했기 때문에 안으로 백성의 재산을 빼앗아 공벌하는데 일삼았다고 대조한다. 


그럼 신하는? 신하 역시 옛날 도가 있던 신하는 군주를 섬기길 의로 하고 아랫사람을 부리기를 예로 하고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서로 친하여 형제 같으며 군주의 곁에서 군주를 보좌하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보좌하며 의로 더불어 교제하고 염치로 일을 처리했던 반면, 옛날 무도했던 신하는 조정에 나아가서는 군주를 보좌하고 물러나서는 불가하다고 비난하여 군주의 명예를 허물며 그러고서도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다니며 어질지 못한 무리와 더불어 거처하며 현자를 공격하고 권세 있는 사람 보기를 값진 재물을 좇듯이 하고 국가의 법을 뜯어고치고 멋대로 법령을 지어내어 군주를 미혹하는 신하로 분류된다. 


여기에서 유도·무도라는 도(道)의 개념은 사변적·추상적 의미로 적용한 것이 아니고 현실에서 존법의 태도여부로 치환시킨 것이다. 즉 상도(常道)를 기준으로 유도(有道)함과 무도(無道)함으로 분류하고 각각에 해당하는 군주와 신하를 변수로 하는 네 가지 관계성을 도출한 것이다. 보다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유도한 군주란 어떤 군주를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나라에 표준이 되는 도를 마련하여 백성에게 제시함으로써 관직을 정돈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밝은 군주로, 법을 분명하게 설정하여 사사로이 가로막지 않는 군주이다. 


그렇다면 유도한 군주는 타고나는 것일까?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일까? [관자] 법치론은 존법하려는 승의 덕목을 갖춘 밝은 군주를 강조했다. 따라서 그 답은 만들어지는 것이고, 유도한 군주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군주가 지켜야 할 9가지 통치원칙(九守)이 필요하다. 그것은 첫째, 마음을 비우고 뜻을 평탄히 하여 순조롭게 기회를 기다려야 하고 둘째, 정사를 처리하는데 중정과 허정으로 지극히 해야 하며 셋째, 잘하는 사람에게는 군주가 상을 주고 잘못하는 사람에게는 군주가 벌을 내리고 넷째, 상을 주는 데는 신실함이 중요하고 벌을 주는 데는 확고함이 중요하며 다섯째, 명칭에 의거하여 실제를 살피고 실제에 비추어 명칭을 확정할 것 등이다. 이와 같이 ‘공평하고 허정한 마음’으로 통치를 고민하는 군주만이 형세에 순응하고 필연의 법칙을 지키어 항상 지켜야 할 법도로 삼고 가깝고 먼 곳의 사정을 두루 들으며 끊임없이 밝게 살피며 회계의 계산이 밝아 법령이 안정되고 상벌을 반드시 행하여 신민이 법도에 복종하는 신실한 군주, 즉 ‘신주’(申主)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주는 스스로 금지해야 할 원칙을 가슴 속에 감추어 두어야 재앙을 만리 밖에서 피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전략을 선택한 행위자인 동시에 먼저 자기 자신을 엄격히 한 뒤 벼슬하는 신하들을 감화시키고 관리들 또한 자기 마음을 수양한 뒤 백성들을 감화시키며 백성들 또한 농업에 힘쓴 뒤 상업을 버리게 하는 추은(推恩)하는 모범적 존재이다.


이제 유도한 신하는 어떤 존재일까? 짐작컨대 위로는 군주의 말을 다하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힘을 다하며 정의를 닦고 명령을 따르는 충신일 것이다. [관자]에서는 신주(申主)의 존재로 인해 법에 따라 처단하고 죄명에 근거해 판결하며 비방과 찬양을 하지 않는 법을 지키는 신하(法臣)를 만들어낸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관직을 받아 군주를 속이지 않고 법령을 엄숙히 지켜 도당을 맺지 않고 재능과 힘을 다하되 사리를 추구하지 않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환난을 당해도 죽음을 사양하지 않고 녹봉을 받아도 그 공로보다 넘치지 않고 작위에 있으면서도 자기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공적 없이 헛되이 상을 받지 않는 사람으로서 조정의 법이 되는 신하, 곧 경신(經臣)을 가리킨다. 따라서 존법에 기초한 유도한 군주-신하 관계는 군주의 책무가 선행되고 이것이 추은의 과정을 통해 확장됨으로써 이에 따른 신민의 대응 역시 책무이행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상호적이며 쌍무적이다.


정말 유도한 군주와 신하는 쌍무적인 관계로 묶여있는 것일까? 그러려면 양자 모두가 자기 책무에 대한 분명한 인지와 이행의 의지로서 승(勝)의 덕목을 입증해야 하는데, 이러한 평가는 어떤 근거에서 제기될 수 있을까? 그 해답이야말로 군주와 신민 간 관계의 법제적 합리성을 설명하는 단서일 것이다. 즉 법치의 실행은 존법의 책무를 이행하는 유도한 군주와 책무를 방기하는 무도한 군주의 존재로부터 유도한 신하와 무도한 신하의 존재를 당위적으로 연계하는 것임을 반증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그 단서를 [관자]에서 찾자면, “무릇 치국의 도는 반드시 먼저 백성을 부유하게 해야 한다. 백성이 부유하면 다스리기 쉽지만, 백성이 가난하면 다스리기 어렵다 … 그러므로 나라를 잘 경영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백성을 부유하게 한 뒤에야 다스린다”는 대목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 부민(富民)이 책무이행의 규범과 관련된 것일까? 그것은 유도한 군주와 신하로 규정될 수 있는 그들의 존법 때문이다. 즉 성인(聖人)이란 치란의 도에 밝고 사람의 일에 시작과 끝을 익힌 사람이며, 성인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백성이 이롭기를 기약할 따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좋은 정치’란 일차적으로 백성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고, ‘성공적인 통치’란 현실인간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 관건이다. 더욱이 “선왕은 한 해가 끝났을 때 이익이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도록 했다. 그래서 백성의 노력은 똑같으면서 이익은 균등하게 나뉘었다. 백성의 노력이 똑같으면 농토가 개간되어 간교한 일이 생기지 않고 농토가 개간되면 곡식이 많아지고 곡식이 많아지면 나라가 부유해진다. 간교한 일이 생기지 않으면 백성이 다스려진다”는 [관자]의 제언은 이익의 균등분배에 기초해서 아직 유도하지 않기 때문에 이기적인 신민이 유일하게 관심 갖는 욕구의 충족(富民) 여부가 곧 국가의 이익 극대화(富國)로 연계된다는 현실을 밝히고 있다. 바로 부민을 부국으로 연결하는 결정적인 고리가 존법하는 군주와 신하인 것이다. 


한편 무도한 군주와 신하는 법으로부터 일탈한 존재이다. 따라서 양자의 관계 또한 논리적으로 무도한 군주라는 실패의 원인이 당연히 무도한 신하라는 실패의 결과에 이른다. 물론 탈법, 불법한 행위자를 무도하다고 하겠지만, 군주가 무도하다는 평가를 받을 경우 어떤 짓을 한 것일까? [관자]는 토지(영토)를 가지고 나라의 임금이 되고도 경작하고 김매는 일에 힘쓰지 않는 군주를 ‘기생하는 군주’로 규정하는데, 부민과 부국을 성취하지 못한 실패한 군주라는 의미를 지닌다. ‘기생’(寄生)의 사전적 정의가 ‘혼자서 살지 못하고 남에게 얹혀사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면 단순히 스스로의 책무이행에 실패한 군주를 기생한다고 평가절하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군주의 기생은 관계성으로부터 유추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즉 군신관계의 왜곡으로부터 군주의 기생이 발생하는 것으로 파악해야 하며, 그럴 경우 군주의 의무 불이행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다. [관자]에는 “치란이 법으로 결정되지 못하고 중신에 의해 결정되고 생살권의 칼자루를 군주가 제어하지 못하고 여러 신하에게 있는 것”을 군주가 신하에게 기생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법치실행을 위한 군주의 유도함, 즉 통치술에 대한 권고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다스려지는 나라는 군주의 도를 존중하지만 어지러운 나라는 신하의 사사로운 술책이 우세하다는 비교처럼, 유도한 군주와 무도한 군주의 차이는 바로 통치술의 행사에 따라 법치를 실현했는지 여부에 대한 평가이다. 


무도한 군주는 앞서 5가지 일(五事)에 전력하는 유도한 군주와 달리 국가의 패망을 가져오는 불합리한 선택의 행위자이다. [관자]에서는 무도한 군주 유형과 이를 조장하는 무도한 신하 유형을 분류한다. 우선 무도한 군주는 은혜로운 군주(惠主), 법을 어기는 군주(侵主), 황망한 군주(芒主), 수고로운 군주(勞主), 두려운 군주(振主), 모자란 군주(茫主)로 구별되며, 치란의 여부가 군주에 의해 결정된다고 강조한다. 왜 이들 무도한 군주들은 패망하는 것일까? 은혜로운 군주는 “상을 풍성히 하고 후하게 하사하여 나라의 재부를 아낌없이 쓰니 … 은혜가 너무 심하면 도리어 패망”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법을 어기는 군주는 “사악한 일을 행하기 좋아하고 법도를 위배하여 스스로를 손상시키며 어려운 일을 함부로 결단하여 총명을 가리기” 때문에 군주가 권세를 잃게 되며, 황망한 군주는 “사방의 건의를 고려하지 않고 간관의 의견을 듣지 않아 신하들이 방자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군주의 권력이 크게 기울게 되고, 수고로운 군주는 “직분을 나누는 것이 밝지 못하여 상하가 서로 간섭하고 군주와 신하가 법을 어지럽히며 형벌을 지나치게 내려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각박해지게” 하기 때문에 위태로워지며, 두려운 군주는 “감정표현이 법도가 없고 형벌만 엄하고 사면하지 않아 … 사람을 거짓으로 몰아가는” 결과로 법령을 쇠퇴시키고 혼매한 군주는 “의심을 품고 신하는 믿는 법이 없어 스스로 모든 정사를 처리하니 정사가 더욱 많아지고 너무 많아 다스리기 어려워 더욱 혼매해지는” 결과를 초래해 여력을 잃고 엄벌을 남용하는 군주이기 때문이다.


반면 무도한 신하는 꾸미는 신하(飾臣), 법을 어기는 신하(侵臣), 아첨하는 신하(諂臣), 우둔한 신하(愚臣), 간사한 신하(姦臣), 혼란을 조장하는 신하(亂臣)로 구별되며 군주의 권위를 침해하는 원인으로 규정한다. 왜 그런 것일까? 꾸미는 신하는 “허명을 좋아하고 고상함을 추구하여 실제 은혜입은 바가 없어 통제하지 못하는” 자이고, 법을 어기는 신하는 “법령을 훼손하고 사사로이 패거리 짓기를 좋아하고 사사로이 청탁을 행하는” 자이며, 아첨하는 신하는 “군주를 미혹시켜 아첨하는 신하는 귀한 대우를 받고 법을 지키는 신하를 천하게 여기게 하는” 자이고, 우매한 신하는 “죄명을 무겁게 하고 벌을 두텁게 하는 것으로 준칙을 삼고 부세를 무겁게 하여 많이 거두어들이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자이고, 간사한 신하는 “백성의 실정을 몹시 고통스럽게 말하여 군주를 놀라게 하고 반대 무리에게 죄를 주는 옥사를 일으켜서 같은 패거리에게 길을 내주는” 자이며, 혼란을 조장하는 신하는 “집에서는 조정의 우두머리를 비난하고 조정에 나가서는 실력자들을 칭송하며 아니라고 해놓고 이름을 팔며 옳다고 해놓고 군주를 손상시키는” 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군주와 신하로 인해 법치가 실행되지 못함으로써 네 가지 상황(四亡), 즉 “정령이 처음 제정되었으나 반포되지 않는 것, 반포한 뒤 완전히 시행되지 않고 중도에서 그치는 것, 백성의 실정이 처음 개시되었으나 위로 전달되지 못하는 것, 백성의 실정이 전달되다가 중도에서 막히는 것” 등 엄몰(淹沒), 옹폐(壅蔽), 폐색(閉塞), 침능(侵凌)이라는 패망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하의 무도함도 관계성에 의해 규정되는 상대적인 평가이다. 즉 그들이 원래 ‘나쁜 사람’이기에 무도한 신하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군주의 무도함에 따라 등장하게 된 종속변수일 뿐이다. 그렇게 보면 무도한 신하의 등장조차 그 구속요건인 군주의 일탈에 따른 당연한 결과, 즉 합리적인 대응으로 파악해야 한다. 결국 다스려지는 나라는 군주의 도를 존중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반증이고, 어지러워지면 군신의 도가 혼잡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군주와 신하의 한계가 분명히 구별되고 한계가 분명히 구별되면 다스리기 쉬워지는 셈이니 군주가 몸소 일하지 않더라도 법을 지켜 일할 수 있는 규범화의 수준에 이를 수 있다. 이렇듯 존법과 존군은 동일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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