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 의한 지배를 통해 존법을 의무로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군주는 권력과 위세의 통치술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권력통제가 오직 군주에 의해서만 결정되면 군주는 위엄이 있고 나라의 형벌을 신뢰하면 간사한 일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가? [관자]에서는 유도한 군주-신민 간 규범성을 확보한 안정된 나라에는 삼기(三紀)가 있다고 지적한다. 삼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법령, 형벌의 도끼, 녹과 상이다. 즉 호령이 없으면 신하를 지휘할 수 없고 형벌의 도끼가 없으면 백성을 복종시킬 수 없고 녹과 상이 없으면 백성을 권면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삼기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즉 명령이 보물보다 소중하고 사직이 친척보다 우선하며 법이 백성보다 소중하고 위세와 권력이 작록보다 귀하다고 대조한다. 결국 군주가 신하를 제압할 수 있는 것은 위세 때문이므로 밝은 군주가 천하를 다스리는 경우란 그 위세가 오직 군주에게만 있고 이것을 신하에게 주고 함께 누리지 않으며 법률과 정령을 오직 군주만 통제하여 신하에게서 나올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군주가 군주 되는 까닭은 위세에 있는 셈이다.
만약 법이 내포한 합리성 때문에 군신 간 쌍무적 관계의 형성을 자동적으로 가져다준다면, 굳이 군주가 통치술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이기적 인간을 합리적 인간으로 전환할 때, 특히 사적 영역으로부터 공적 영역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가치전도의 위험성이 발생할 수 있다. 즉 위세가 아래에 있으면 군주가 신하에게 제압당하고 권세가 위에 있으면 신하가 군주에게 제압당하기 때문에 군신 간 자리바꿈은 위세가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래서 (위세가) 신하에게 넘어간 지 일 년이면 비록 신하가 충성하지 않아도 군주가 (위세를) 뺏을 수 없고 아들에게 넘어간 지 일 년이면 비록 아들이 효도하지 않아도 아버지가 바로잡을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제 법치의 성공을 위해 군주가 위세를 독점하려면 통치술이 요구된다. 물론 공적 영역의 합리적 규준으로 법에 의한 지배를 통해 사적 영역의 이기성으로 경도될 위험을 방지해야 하는 것이 군주의 책무이다. 만약 공적 영역의 합리적 규준이 침해되는 것을 막지 못할 경우, 사적 영역을 통제하는 규범 역시 붕괴될 수 있기에 그 제어의 수단이야말로 군주 스스로를 제어하는 것(勝)이며, 곧 통치술인 셈이다. 정말 법치실행과 군주의 통치술이 관련 있다면, 통치술이란 무엇일까? 우선 ‘밝은 군주’의 ‘좋은 통치술’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사로이 상을 주지 않고, 싫어하는 사람에게 사사로이 벌을 주지 않으며 예의를 두고 법을 설치하여 법도를 헤아려 판단하는 술수(術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자]에서는 “계산에 어두운 사람이 국가 대사를 맡으면 이는 배가 삿대도 없이 물살이 급한 물돌목을 건너려는 것과 같다”고 비유함으로써 인간의 이기성에 대한 이해로부터 법치의 성공여부가 결정된다는 점을 적시하고 있다. 즉 불이익으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이익을 좋아하기 때문이기에 신민의 통제여부 역시 그들의 이기적 정향을 이용할 수 있는 군주의 통찰력에 놓여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군주의 위세와 통치술은 어떻게 행사되는 것일까? 노골적인 폭력과 권위의 행사일까 아니면 은밀히 누구도 의식하지 못한 채 군주의 의지대로 구속되도록 하는 것일까? 그것의 구체적인 양상은 바로 군주가 권력의 전권(柄)을 손아귀에 쥐고 행사하는 것이다. [관자]에서는 이 점을 명확히 강조한다. 밝은 군주는 백성을 살리고 죽이고 부유하게 하고 가난하게 하고 귀하게 하고 천하게 하는 여섯 가지를 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권력의 자루(柄)이고 군주가 반드시 쥐고 있어야 한다. 즉 법을 장악하고 강제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수단인 ‘힘’을 구비한 군주의 모습을 시사한다. 그것은 “군주가 명예와 이익이라는 권력을 손에 쥐고 있기에 공적과 명예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술수에 의거한다. 성인은 권력의 상황을 살펴서 권력을 손에 쥐고 술수를 살펴서 백성을 부린다”는 [상군서]의 확신과 “담당할 힘에 맞추어서 관직을 주고 명분에 따라서 실적을 추궁하며 살생하는 권병을 손에 들고 여러 신하들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군주가 장악하는 것”이라는 [한비자]의 조언과 마찬가지로 현실군주의 자의적인 통치를 법치로 합리화하는 동시에 궁극적으로 존군을 위한 방법론의 의미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 군주는 권력의 자루를 홀로 쥐어 잡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법치란 군주와 신민 모두를 규범화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 이유는 법령을 반포하여 반드시 시행하려면 마음 씀씀이를 모르고서는 할 수 없고 추진하는 일을 반드시 이루려면 치밀한 계산에 어두워서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가 생살권을 홀로 장악하고 항상 위세를 가지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명령하여 금지시키는 권병을 손에 쥐고 여러 신하들을 부리는 것이 바로 군주의 도라는 것이다. [한비자]에서도 “술수란 가슴 속에 감추어 두고 많은 사례들에 맞추어 몰래 여러 신하들을 부리는 것”이라고 강조하듯이, 위세와 술수를 행사하는 군주의 통치술은 유도한 군주의 마땅한 수단으로 소개된다. 이렇듯 [관자]에서 명확히 강조하지만, 군주의 도가 우선될 경우 나라가 다스려지고 신하의 술책이 우선될 경우 나라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무릇 군주를 높이고 신하를 낮추는 것은 신하가 군주를 친애하기 때문이 아니라 군주의 위세가 이기기 때문이며, 그 결과 존법을 보이지 않게 강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군주의 힘, 곧 권력(權力)에 의해 존군의 실현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관자]에서는 ‘권력’을 이해하기 쉽게 제환공과 관중의 대화를 가탁하여 군주의 권력(權)에 대한 이론적 정의보다 행사되는 방식을 소개한다. 제환공이 통치술, 즉 권력행사의 술수(權數)를 묻는 방식으로 시작하는 이 대화에서 관중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하늘은 홍수와 가뭄으로 그 권(權; 힘)을 드러내고 땅은 재원으로 권을 드러내며 사람은 힘으로 권을 드러내고 군주는 정령의 완급으로 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주가 홍수와 가뭄을 이기는 능력을 잃어버리면 사람과 땅의 재원을 장악하는 능력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이 대화내용은 외형상 관중의 입을 빌어 권력과 술수에 대한 관념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 군주의 통치술에 의해 뒷받침된 법치실행이 현실정치에서 부국강병을 어떻게 결과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론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람과 땅의 통제력=군주의 권력’은 ‘부민=부국’이라는 결과를 통해 합리화될 수 있다는 역설적인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외형상 신민이 자발적으로 존군하는 것으로 합리화할 수 있다. 이제 외형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싫든 좋든 군주-신민 간 의무이행이 규범화되는 단계에 이르는 셈이다.
정말 이런 의도를 내포한 것일까? [관자]에서 그 단서를 찾는다면, “백성의 인정은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이익을 좋아하고 해로움을 싫어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군주가 백성을 살리고 이롭게 하는 것을 명령하면 행하고 백성을 죽이고 해로움을 주는 것을 금하면 그친다. 정령을 실행하는 방법은 반드시 백성이 그 정령을 즐겁게 받아들여야 정령이 행해진다”는 정언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법치의 당위성을 역사와 인간에 대한 경험적 통칙으로부터 추출한 법가의 인식론으로부터 비롯하며, 애민(愛民)의 방법론으로 합리화하는 현실주의적 논리이기도 하다. 즉 군주가 통치술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통치의 대상인 신민의 이기성을 합리성으로 전환하기 위한 현실적 고민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법하는 군주로부터 출발하는 법치가 “법을 세워 백성이 즐거이 따르고 명령하여 백성이 받들어 행하며 법령이 민심과 서로 합하는 것이 마치 부절이 서로 맞는 것 같으면 군주가 존엄해진다”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함으로써 신민의 존군 의무형성과 이행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제임을 제시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