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군주의 의무로서 치국과 부민의 상관성을 인지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면, 선의와 효용성을 보장하는 왕정과 패정의 기제 역시 군주에게는 상부(相符)해야 할 의무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미 [관자]에 내포된 법치와 예치의 주체인 밝은 군주로서 성왕은 그가 상도로서 법 또는 예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에 차이점을 가질 뿐 “패업과 왕업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보자면 “무릇 나라를 통치하는데 옛 것을 돈독히 하는데 있지 않고 세상을 운영하는 이치는 선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패자와 왕자는 이미 만들어진 법전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다”는 [관자]의 정언은 “인의예악이라는 것도 모두 법에서 나오며 이로써 예전 성왕이 백성을 하나로 한 것”이라는 정언과 논리적 일관성을 이룬다. 즉 [관자]는 “나라를 풍성하게 하는 자를 패라 이르고 겸해서 나라를 바르게 하는 자를 왕이라 부른다”는 구분에서도 드러나듯이 왕패(王覇) 개념이 엄격히 구별하지 않고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 이러한 진술은 밝은 군주의 통치를 규범적 기제로서 예와 제도적 기제로서 법이라는 이분법적 접근이 아니라 통치 자체가 예법 양자의 겸전을 본질적인 속성으로 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즉 성공한 통치자로서 선왕의 통치가 예법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며, 선왕의 도로 명명되는 통치의 규준이 단지 상고주의가 아닌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기제로 치환된 것임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패왕이란 누구일까? 우선 패왕의 의미는 제환공과 관중의 첫 만남에서 제시되는 양자의 목표에서 찾아진다. 사직의 안정을 위한 방법을 묻는 제환공의 질문에 “패왕이 되면 사직이 안정될 것이고 패왕이 안 되면 사직이 안정될 수 없다”는 관중의 대답은 기존 질서의 유지와 새로운 질서의 창출이라는 상반된 목표에 따른 관점의 차이를 드러낸다. 뒤이어 관중은 제환공에게 패자로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근본이 되는 일을 추구할 것’을 요구하는데, “제나라의 백성이 공의 근본 … 세금을 가볍게 하면 백성이 기아를 걱정하지 않을 것이고 형벌을 느슨하게 하면 백성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때에 맞춰 부역에 동원하면 백성이 지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즉 패왕은 법제에 기초한 패자도, 규범에 기초한 왕자도 아닌, 더 나아가 양자를 절충한 혼합적 성격이 아니라 “농업을 강화하고 쓸모없는 사치품 제작을 없앤 뒤에야 백성을 부유하게 할 수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등용하면 백성을 다스릴 수 있으며 부세를 줄이고 백성에게 가혹하게 하지 않으면서 성실과 사랑으로 대하면 백성을 친하게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가 패왕의 일이다. 일에는 근본이 있는데 인의가 핵심”으로 삼아 부모와 같이 ‘백성을 돌보는’(牧民) 통치자인 셈이다.
도대체 패왕의 통치가 어떻기에 ‘부모와 같은 돌봄’의 의미를 지닌 것일까? 한 가지 주의해서 봐야 할 점은 앞서 설명했던 현실군주의 의무로서 사회적 소외계층을 구휼해야 한다는 사항이다. 새로운 질서와 통치기제의 성공여부는 모든 수준에서 백성들을 돌보는데 달려 있다. 그 첫 단계가 신민의 생존과 안전이라는 사적 영역을 보존하는 것이고, 그 구체적인 대상이 최우선적인 배려와 시혜를 필요로 하는 소외계층이었다. 따라서 다음 대상은 정상적인 신민의 현실 삶을 항상적으로 유지하는 방편일 것이다. 여기에서 소외된 성원과 정상적인 성원을 동일한 안전장치로 가동시키기 위해서 역시 제도화가 요구된다. 이로부터 “많은 규범과 제도를 갖추었다는 것은 규범과 제도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규범과 제도를 이룬 것이 많다는 것은 큰 곳에서도 가득 차지 않고 작은 곳에서도 막히지 않는 것 … 잘 맞고 잘 갖추어지니 선택해도 고달픔이 없다”는 [관자]의 정언은 패왕의 부모와 같은 통치가 지닌 신민의 수요와 부합하는 것이며 그 결과 ‘천하의 백성들이 물이 밀려오듯 귀부한다’는 점을 예단한다. 그 단서는 [맹자]의 왕패(王覇) 비교이다.
[맹자]에서는 “힘을 사용하면서 인을 실천하는 것처럼 가장하는 사람은 패자인데 패자에게는 반드시 큰 나라가 있어야 한다. 덕으로써 인을 실행하는 자는 왕자이다. 왕자는 큰 나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왕정과 패정을 덕을 갖춘 군주에 의한 통치와 힘에 의한 통치로 구별한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맹자는 왕정(王政)의 실질에 대해 “현자를 존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기용해서 덕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합당한 지위에 있게 되면 천하의 선비가 모두 기뻐하며 그 나라의 조정에서 벼슬하기를 원할 것 … 거주지에 대해 인두세와 공한지세를 거두지 않으면 천하의 백성들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진실로 이 다섯 가지를 잘 시행한다면 이웃나라 백성들이 그 군주를 마치 부모처럼 우러러 보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그것은 왕정(王政)의 정의를 위해 맹자 자신이 왕자(王者)에 의한 통치라는 의미로 국한시킨 의도에 기인하지만 ‘백성의 부모’와 같은 통치자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중첩된다.
이로부터 패왕의 통치는 “살아 있는 사람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죽은 이를 안장하며 현명한 이를 공경하여 높여주고 백성을 잘 대우하여 민심을 얻는다. 상 주는 것을 믿음이 있게 하고 벌주는 것을 신중히 하며 재주 있는 사람에게 벼슬을 주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녹봉을 주어 강성할 수 있다. 전체세입을 계산하고 지출을 맞추며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조정하여 부유해진다. 법을 밝히고 계책을 살피며 떳떳한 규칙을 세우고 유능한 신하로 대비하게 하면 잘 다스릴 수 있다. 같은 것과 다른 것을 구분하고 맡을 일을 나누어 다스리면 편안해진다”는 양생상사, 민심획득, 부민, 신상필벌, 신중성, 이공수관, 국가통제의 유연한 중농억상, 명분확립 등 기존 패정과 왕정이 갖는 모든 장점이 취합된 양상으로 전개된다. 그 역사적 사례야말로 제환공인 셈이다. 즉 “관문과 저자에서 조사만 하고 세금을 걷지 않고 점포에만 세금을 부과하고 물품에는 세금을 걷지 않아서 제후들을 이롭게 했으며 … 성을 쌓아 제하의 땅을 보호하여 중원의 각국에 권위를 과시했다. 교화가 크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천하가 환공을 먼 나라의 백성은 부모처럼 우러르고 가까운 나라의 백성은 흐르는 물처럼 좇았다 … 무도한 제후를 죽이고 주나라 왕실을 안정시켜서 천하에 능히 그를 막을 사람이 없었으니 무업을 이룬 것이고 조복을 입고 황하를 건너서 회맹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문치가 확립된 것”이라는 [관자]에서의 평가는 그 편집의도와 별개로 패왕이 법제와 폭력, 덕례와 규범을 통섭한 행위자로 새롭게 정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럴 경우 새로운 패왕에 의한 새로운 질서의 양상은 명백해진다. 그것은 “널리 현인을 등용하고 백성을 자애롭게 보살피고 멸망한 나라를 보존하고 녹이 끊어진 세가를 다시 이어주고 나를 위해 죽은 사람의 자식을 채용하고 세금을 가볍게 하고 형벌을 가볍게 하는” 일차적인 치국(治國)을 이룸으로써 “어떤 곤경에 처해도 천하를 다스림에 법도를 잃지 않으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지 않고 백성이 치세를 향유하는” 최종적인 평천하(平天下)를 성취하는 것이다. 즉 패왕의 통치는 치국의 기제와 평천하의 기제를 일원적인 내포와 외연의 기제로 채택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내부의 치국은 “남녀의 생활을 살피고 향리의 십과 오를 정비한다. 저장된 식량의 많고 적음을 헤아리고 관리들의 지출을 결정한다. 노약자들을 돌보아 내치거나 유기하지 않고 백성의 이익과 손해를 공정하게 따져서 조치하고 사사로움이 없게 한다”는 점에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별과 공존을 모색함으로써 명분의 확립에 성공한다. 동시에 치국의 내포로부터 외연으로 확대될 경우, 패왕은 “큰 나라의 위엄을 이용하여 다른 나라의 세력을 줄이고 강한 나라의 권력을 이용하여 다른 나라의 세력을 약하게 하고 권세가 큰 나라를 이용하여 다른 나라의 세력을 가볍게 하는” 국가 간 관계의 제일성과 공정성을 보장하는 통치자로 의무를 이행한다. 따라서 패왕은 패자와 왕자의 절충이기보다 겸전의 성격을 지닌 새로운 유형의 성왕이기도 하다. 결국 새로운 “성왕은 자신을 낮추고 예로 천하의 현자를 대우하여 왕 노릇을 하고 토지의 이로움을 고르게 나누어 천하의 대중을 끌어들여 신하로 삼을 수 있었기에 존귀하기는 천자가 되고 부유하기는 천하를 소유”할 수 있는 셈이다.
이제 [관자]의 패왕은 “하늘을 본받고 땅을 법칙으로 삼으며 백성을 교화하고 역사를 변화시키며 천하의 제도를 창제하며 제후를 작위에 맞게 안배하며 사방이 모두 빈객으로 와서 복종하도록 하며 때에 맞추어 천하를 바로잡은” 새로운 성왕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광천하(匡天下)에 요구되는 치도(治道)는 “군주가 생살권을 장악하고 위세에 거처하면서 명령하여 금지시키는 권력 자루를 손에 쥐고서 여러 신하들을 부리는데 이것이 바로 군주의 도 … 낮은 지위에 편안히 지내고 군주의 명령을 받들어 행하고 자기의 직책을 지키고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이것이 바로 신하의 도”라는 명분의 성립을 결과한다. 그 사례 역시 제환공이 치민의 방법을 물었을 때, “무릇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은 반드시 그들의 고충을 알고 그를 헤아려 덕으로 감싸주고 형벌로 다스려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해서는 안 되며 힘으로 저지해서도 안 됩니다. 이 네 가지를 삼가는 사람은 충분히 백성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라는 관중의 대답에서 찾아진다. 즉 존법으로부터 출발하여 일체화한 존덕으로 결론짓는 셈이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하지 않아도 잘 다스리는 사람은 제업을 이룰 수 있고 억지로 다스리지 않는 사람은 왕업을 이룰 수 있으며 최선을 다하여 다스리되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패업을 이룰 수 있다. 스스로를 귀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은 군주의 도리이고 벼슬이 높아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 것은 신하의 도리”라는 군주-신민 간 명분확립의 질서이다. 왜냐하면 “기획 총괄하는 사람은 그 일에 명령만 내릴 뿐 일처리에 직접 참여할 필요가 없고 일에 참여하여 직접 노력하는 사람은 그 일이 되어가는 원리를 살필 필요가 없기에 군신 사이에 상하의 직분이 확정되면 예의와 제도가 확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세와 존현함은 군주의 직분이요 비천함과 경외는 신하의 직분이므로 군주와 신하의 사이가 명확하게 구별되면 군주는 존귀하고 신하는 비천하다”는 [관자]의 정언은 ‘광천하’하는 새로운 성왕의 질서가 존법과 존덕으로부터 출발한 존군의 태도를 신민으로 하여금 규범으로 습속화한 항상적 기제임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