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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05. 2022

축복의 시간

<축복의 집> 박희권 2019

*스포일러 포함


 공장과 식당에서 바쁘게 일하여 살아가는 해수(안소요)는 어느 날 먼 동네의 의사에게 시체검안서를 받으러 간다. 형사(김재록)를 만나 다시 집으로 향하는 해수, 집의 안방에는 죽은 어머니의 시체가 있다. 해수는 연이 끊긴 듯 살아가던 고등학생 동생 해준(이강지)을 찾아가고, 어머니의 장례를 준비한다. <축복의 집>은 토일월 삼일 동안 진행되는 장례 절차를 따라간다. 해수의 삶은 누가 봐도 형편이 좋지 않다. 집의 화장실에선 녹물이 나오고, 텅 빈 집은 다가오는 재개발로 철거될 예정이다. 낮에는 공장에서, 밤에는 식당에서 일하는 해수에게 어머니의 사망보험금은 적지 않은 돈이다. 때문에 해수는 어머니의 죽음이 자살임을 감추고 지병인 당뇨로 인한 사망으로 처리하기 위해 형사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축복의 집>이라는 제목은 역설적이다. “먼지와 재(Dust and Ashes)”라는 영문 제목과도 전혀 다른 제목이다. 이 영화에 “축복”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 암전된 화면 위로 들려오는 공장의 거대한 기계 소리로 시작되는 영화는 조용히 해수를 뒤쫓는다. 폭염 속에서 고된 노동을 마친 해수의 등은 땀으로 가득 젖어 있다. 해수는 그 몸을 이끌고 형사를 찾아가고, 동생을 찾아가 엄마의 죽음을 알리고, 보험사(이정은)를 상대하고, 상조를 통해 장례를 준비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과정은 큰 어려움 없이 진행된다. 물론 보험사의 의심에 불안해한 해수가 집으로 달려가 자살에 쓰인 도구를 정리하는 모습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영화의 긴장감 같은 것을 만들어주는 장치가 아니다. 이 장면은 땀에 젖은 해수가 고단하게 삶을 이어가고 돈을 모으는 것처럼, 갑작스레 내린 비에 흠뻑 젖은 해수가 길을 걷는 모습을 담기 위해 등장하는 것만 같다. 땀과 빗물을 잔뜩 머금은 상복은 무겁게 그의 어깨를 누르지만, 해수는 계속 움직인다. 상조회사에서 준비한, 마치 공장처럼 기계적인 절차를 거쳐 진행되는 장례절차를 해수는 착실히 따른다. 찾아오는 조문객이라곤 보험사 밖에 없지만, 해수는 준비해온 영정사진을 꺼내고, 동생과 입관을 지켜보고, 화장터로 이동하고, 돈이 없어 납골당을 마련하진 못하더라도 비싼 유골함을 사 야산에 엄마를 묻어준다. 영화는 이 과정을 기계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조용하고 냉정하게, 하지만 절대 해수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따라가기만 한다.

 영화는 해수의 삶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동생과는 왜 사이가 안 좋은지, 아빠와는 왜 연이 끊긴 것인지, 자살을 감춰주는 형사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등등.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엄마의 장례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해수의 모습이다. 해수는 그렇게 자신의 최선을 통해 엄마를 잘 보내주고, 보험금도 받게 될 것이다. 영화가 끝난 이후 해수의 삶이 행복할 것이라 생각되진 않는다. 죽음, 재개발, 먼지와 재, 이런 단어들이 나열된 해수의 삶은 불행의 시스템 속에 놓여있다. 엄마의 죽음은 그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해수는 차근차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때문에 모든 것이 끝나고 해수가 동생과 육개장을 먹는 장면에서야 “축복”이라는 단어가 영화의 제목에 쓰인 이유를 알게 된다. 모든 것이 한 차례 지나간 그때, 다시 모든 것이 닥쳐올 것을 알고 있지만 잠시 숨 돌릴 수 있는 그때, 전염병도 없지만 괜히 마스크를 쓰고 자신을 가리던 시간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순간, 그 짧은 시간을 “축복”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영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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