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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01. 2022

누아르 리바이벌 배트맨

<더 배트맨> 맷 리브스 2022

*스포일러 포함


 비 내리는 할로윈 밤, 의문의 살인마 리들러(폴 다노)에 의해 고담 시장이 살해당한다. 배트맨으로 활동한 지 2년가량 지난 브루스 웨인(로버트 패틴슨)은 고든 경감(제프리 라이트)의 도움으로 리들러의 범죄현장을 둘러보다 그가 남긴 편지를 발견한다. 리들러는 고담시의 정치인, 경찰, 검사, 범죄조직이 내통하며 만들어낸 거짓말을 폭로하고자 한다고 밝히며, 배트맨이 그의 계획을 쫓을 수 있도록 수수께끼(Riddle)를 남긴다. 배트맨은 고든과 합심해 수사를 이어가고, 셀리나(조 크라비츠), 펭귄(콜린 파렐), 팔코네(존 터투로) 등과 마주하게 된다. <클로버필드>와 <혹성탈출> 리부트 트릴로지를 연출했던 맷 리브스 감독의 신작 <더 배트맨>은 다시 한번 맞이하는 새로운 배트맨의 이야기다. 배트맨 코믹스 중 [배트맨: 이어 원]과 [롱 할로윈]의 이야기를 적절히 뒤섞고 있다. 참고로 두 코믹스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 나이트>를 연출하는 데 적극 인용한 작품이기도 하다.

 모든 슈퍼히어로 캐릭터의 리부트가 그렇지만, <더 배트맨>은 그간 등장한 팀 버튼, 크리스토퍼 놀란, 잭 스나이더의 배트맨의 종합처럼 다가온다. 놀란의 배트맨처럼 리얼리즘에 기반한, 다시 말해 시카고를 바탕으로 뉴욕, 런던 등 여러 대도시의 이미지를 빌려온 고담시를 만들어낸다. 그와 동시에 고담시에 대한 클로즈업 장면은 오히려 팀 버튼의 작품에 가까운, 혹은 프리츠 랑이나 무르나우 같은 독일 표현주의 감독들이 할리우드 시절 만들었던 필름 누아르에 가까운 도시 이미지를 구현하려 한다. 둔탁하고 느릿하며 묵직한 배트맨의 움직임은 일정 부분 잭 스나이더의 스타일을 연상시킨다.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은… 당연하게도 여기 낄 곳이 없다) 하지만 <더 배트맨>은 ‘The’를 붙인 만큼 그간의 배트맨과 크나큰 차별점을 부여한다. 앞서 제작된 배트맨 영화들에 비해 필름 누아르 장르의 노선을 강경하게 쫓는 것이다. 전형적인 팜므파탈 캐릭터처럼 등장하는 셀리나, 끝없이 비가 내리는 도시 풍경, 안개, 빗물, 성에로 흐릿하게 가려진 건물과 인물들, “착한 경찰-나쁜 경찰(Good Cop Bad Cop)”의 전형을 쫓는 고든과 배트맨의 관계, 무엇보다 “탐정”이라는 정체성에 집중한 배트맨의 활동 등이 그것이다. 영화 스스로도 이를 인식하고 있다. 펭귄은 그를 심문하는 배트맨과 고든에게 “좋은 경찰 미친 박쥐냐?”라고 쏘아붙이고, 셀리나는 스스로가 팜므파탈 캐릭터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다 어느 순간 장르 컨벤션을 위반한다. 

 기존 배트맨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도 영화가 개봉한 시점과 동시대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방송곡으로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면, <더 배트맨>의 리들러는 온라인에서 범죄를 모의하고, 실시간 스트리밍 서비스로 범죄를 송출한다. 토드 필립스의 <조커>가 시대 배경을 모호하게 설정한 것과 반대로, 조커 분장을 하고 동양인을 집단 린치 하려는 불량배들을 때려잡으며 처음 등장하는 배트맨은 그것과의 단절을 발판으로 삼고 있다. <더 배트맨>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물론 이는 MCU나 놀란의 영화에서도 등장한 것이지만, 배트맨의 등장 이후 그의 적수라 할 수 있는 빌런들이 등장하는 시점을 배경 삼았다는 지점이다. 리들러는 로버트 패틴슨의 배트맨이 맞이하는 첫 빌런이다. 밤하늘을 비추는 배트 시그널이 켜지면 범죄자들이 두려움에 떨며 사라지는 것과 반대로 그것을 동경하며 두려움으로 고담을 변화시키려 한다. 이 지점에서 배트맨과 리들러는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 둘 모두는 두려움을 통해 각각 범죄자와 시민을 통제하려 한다. 두 사람의 유사한 지향점은 시장의 집을 쌍안경으로 들여다보는 리들러의 시점 숏과 셀레나를 미행하는 배트맨의 쌍안경 시점 숏을 통해 드러난다. 그림자를 자처하는 두 사람이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감시와 폭력이다. 

 이는 “나는 복수다”라고 말하던 영화 초반의 배트맨이, 영화 마지막에 가서 복수와의 단절을 결심하는 계기로서 작동한다. <더 배트맨>은 배트맨이 (영화엔 등장하지 않는) 지난 2년 간 복수라는 감정을 통해 자신의 두려움을 억누르고 동기로 삼아 활동해왔다는 설정에 바탕한다. 이는 그가 부모를 여의고 집사 알프레드(앤디 서키스)에 의해 양육되어 온 시간 동안 쌓아온 감정에 관한 것이다. 그는 누가 부모를 죽였는지 알지 못한다. 이는 배트맨의 반대에 놓인 리들러도 마찬가지다. 웨인 가가 설립한, 그리고 토마스 웨인의 죽음 이후 방치된 고아원에서 자란 그는 도시에 대한, 도시를 운영하는 자본가, 정치인, 경찰과 검찰, 범죄조직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을 쌓아 간다. 두 사람이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같다. 법 바깥에 있는 폭력. 하지만 두 사람이 맞이하는 결론은 다르다. 살인과 게임에 바탕한 리들러의 행각은 <다크 나이트> 속 조커의 목적 없는 무정부주의적 혼돈 상태를 지향한다. 반대로 불살을 신조로 삼는 배트맨은 전통적으로 법과 제도를 믿는 보수주의자이자 자본가이다. 두 사람의 전략은 행동주의적 측면에서 일맥상통하지만, 그들의 신념에서 차이를 빚어낸다. 리들러는 전형적인 대안우파의 행동전략, 가령 익명성을 띤 온라인에서 또 다른 익명들과 뒤섞여 같은 목표를 지향하며 총기난사와 같은 행동을 택한다. 반면 배트맨은 가면 속 얼굴은 드러내지 않을지언정 그림자 바깥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경찰 대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든과 함께 사건 현장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이라던가, 리들러가 벌이는 인질극이 함정임을 알면서도 걸어 들어가는 모습에서 둘 사이의 차이가 명백해진다.

 여기까지만 보면 <더 배트맨>은 <다크 나이트>의 재구성 밖에 되지 않는 것만 같다. 물로 기본적인 세팅은 같다. 하지만 새 배트맨은 놀란의 배트맨처럼 반동적이지 않다. 놀란의 배트맨은 투페이스가 되어버린 하비 덴트를 영웅으로 추대하며, 자신 스스로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택한다. 다시 말해 이 배트맨은 범죄를 근원부터 뒤바꾸는 대신 조커라는 혼돈주의자가 시도한 제도의 파괴를 막아서는 것에 그친다. 말하자면 이스트우드의 <셜리> 같은 영화 속 시민적 영웅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인물임에도 그를 영웅으로서 합법화하는 반동적 시도에 가깝다. <더 배트맨>은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는다. 노련함이 부족하며 건물에서 뛰어내리기 전 두려움에 휩싸이는 이 새내기 배트맨은 시민적 영웅이 될 생각도, 그러한 인물을 추대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리들러가 남긴 수수께끼의 문장처럼 “쥐를 빛으로 내보내는” 사람으로서 배트맨은 존재한다. 때문에 끝내 두려움을 억압하는 대신 받아들이는, 감전 위기에 놓인 시민들을 구하러 뛰어들고 자신 스스로가 빛이 되어 걸어간다. 

 물론 <더 배트맨>이 만들어낸 배트맨의 모습이 진정한 의미에서 동시대적 영웅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클래식 필름 누아르 풍의 배트맨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적절한 완성도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그리고 놀란의 배트맨처럼 반동적이지 않으며 잭 스나이더나 팀 버튼의 배트맨처럼 스타일에만 치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배트맨>은 퍽 만족스러운 영화다. 배트카를 이끌고 펭귄과 벌이는 카체이싱 장면이나 정전된 팔코네의 건물에서 벌어지는 액션처럼 눈길을 사로잡는 액션도 등장한다. 3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종종 부담스럽게 다가오지만, DC가 내놓은 근작들 중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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