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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28. 2022

기묘한 요리 영화

<피그> 마이클 사노스키 2021

*스포일러 포함


 포틀랜드 인근 숲 속 오두막에서 트러플 돼지와 함께 자연인처럼 살아가는 롭(니콜라스 케이지). 그가 만나는 사람은 매주 목요일 트러플을 가지러 오는 바이어 아미르(알렉스 울프) 뿐이다. 어느 날 괴한들이 찾아와 돼지를 훔쳐가고, 이에 분노한 롭은 아미르의 도움을 받아 돼지를 찾기 위해 도심으로 향한다. 단편영화와 TV시리즈를 연출해온 마이클 사노스키의 장편 데뷔작이다. 아내가 죽었다는 설정과 함께 살던 동물이 해코지를 당하자 일종의 복수를 결심한다는 점에서 얼핏 <존 윅> 같은 작품이 떠오르지만, 한때 거물 셰프였던 롭의 과거가 밝혀지며 영화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방향은 꽤나 기묘한 감흥을 전달한다.

 <피그>는 3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챕터는 해당 챕터의 요리를 가리킨다. 첫 챕터에선 버섯 타르트를, 두 번째 챕터에선 엄마표 프렌치토스트와 해체주의 가리비 관자 요리를, 마지막 챕터에서는 비둘기 요리, 와인, 소금 바게트를 사용한다. 버섯 요리가 등장하는 첫 챕터는 트러플 돼지와 롭의 동거생활, 둘 사이의 우정을 보여준다. 아내의 죽음 이후 요식업계에서 은퇴하고 숲에 칩거하며 살아가는 그가 자신의 방식으로 슬픔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것이다. 돼지가 납치된 이후인 두 번째 챕터에선 트러플과 식자재 업계의 큰손인 아버지 다리우스(아담 아킨)와 불행하게 생활하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내는 아미르, 그리고 한때 자신의 식당에서 일했던 요리사가 파인다이닝의 셰프가 되어 시그니처로 판매하는 해체주의 가리비 관자 요리가 등장한다. “엄마표”라는 이름에서 프렌치토스트는 아미르의 이야기와 롭의 과거사를 공명하게끔 하는 요리가 되지만, 진정한 영국식 펍을 차리고 싶었다던 셰프가 내온 가리비 요리는 “해체주의”라는 공허한 말로 지칭되는 그저 그런 음식으로 다뤄진다. 마지막 챕터의 제목은 롭이 과거 자신의 식당을 찾아온 다리우스와 그의 아내에게 요리해준 음식이다. 

 <컬러 아웃 오브 스페이스>, <맨디> 등 주목받은 최근작에서 바깥으로 발산하는 광기 어린 연기를 주로 선보여온 니콜라스 케이지는 이번 영화에서 캐릭터 안으로 수렴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캐릭터의 성격 자체가 자신이 겪은 상실의 슬픔을 고독으로 소화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캐릭터의 내면으로 수렴되는 연기의 강한 구심력이 종종 캐릭터 바깥으로 빠져나올 때 발생하는 강렬함을 위한 선택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한 순간은 크게 두 차례 찾아온다. 첫 번째는 두 번째 챕터에서 롭 밑에서 일하던 요리사이자 그가 직접 해고하기도 했던 인물의 레스토랑에서 요리의 공허함을 지적하는 장면이다. 피투성이인 얼굴을 하고 레스토랑을 찾은 거구의 롭이 굵고 낮은 목소리로 음식을 지적하자, 셰프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과거에 꿈꾸던 펍의 메뉴를 말한다. 잔뜩 쫄아 있는 듯한 그의 모습은 어떤 요리를 선보일 것인가를 넘어, 상대방에게 요리를 대접한다는 것, 더 나아가 상대방을 마주하는 모든 행위의 자세에 대한 롭의 말에 압도된 반응이다. 

 두 번째 상황은 롭이 아미르와 함께 다리우스에게 요리해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앞서 언급한 장면과 함께 <피그>를 관람하기 전 이 영화에 관해 가장 떠올리지 못했을 장면이다. 롭과 아미르가 차린 추억의 음식과 와인을 먹은 다리우스는 눈물을 흘리며 식탁을 떠난다. 얼핏 일본 요리만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리액션의 정제된 버전을 보는 것만 같다. 이는 물론 앞서 롭이 셰프를 꾸짖는 장면에서도 가능한 연상 작용이다. 이 두 장면은 <피그>가 전달하는 기묘한 감흥의 본원지다. 본명을 말하면 포틀랜드 요식업계 전체가 알아보는 은퇴한 거물 요리사가, 돼지의 납치라는 사건으로 다시금 세상으로 나온 뒤 자본논리에 휘둘리는 마초적인 업계에 관해 요리로 말하는 이야기.

 물론 <피그>는 <더 셰프> 같은 영화처럼 마초적인 레스토랑 주방을 다루는 작품도, <라따뚜이>나 <아메리칸 셰프>처럼 낭만적인 요리를 담아내는 영화도 아니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 롭은 단 두 번 요리할 뿐이고, 요리의 클로즈업 단독 숏도 거의 없다. <피그>가 주목하는 것은 요리보단 요리하는 행위, 요리를 준비하는 행위, 누군가에게 요리를 대접한다는 것을 통해 상실이라는 꽤나 보편적인 감정을 다루고 있다. 이는 요리라는 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라는 것과 함께, 누군가가 만든 요리를 누군가가 먹는다는 것이 서로에 대한 신뢰와 교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다시금 알려주는 것과 같다. 롭은 결국 돼지를 찾지 못한다. 돼지는 납치되는 과정에서 죽었다. 하지만 영화 속의 여정을 통해 롭은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숲 속으로 달아났던 때의 롭과 다른 사람이 된다. 롭의 내면과 함께 움직이는 주관적인 카메라가 종종 과도하게 다가오지만,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온 롭이 예전엔 미처 틀지 못했던 아내의 음성이 담긴 테이프를 재생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피그>가 전달하는 기묘한 감흥을 익숙한 맛의 요리로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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