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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26. 2022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 속 현재의 이야기

<안테벨룸> 제라드 부시, 크리스토퍼 렌즈 2020

*스포일러 포함


 남북전쟁시기 미국 남부의 플랜테이션으로 보이는 한 대농장. 마초적인 남부군이 관리하고 있는 이곳에서 흑인들은 목화를 따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종종 성적인 학대를 받는다. 백인의 허락 없이는 인사조차 꺼낼 수 없는 흑인들은 남부군 몰래 탈출을 계획한다. 제이지를 비롯한 힙합, R&B 뮤지션의 뮤직비디오 몇 편을 연출한 콤비 제라드 부시와 크리스토퍼 렌즈의 첫 장편영화이며, <문라이트>와 <히든 피겨스>를 통해 배우로 데뷔한 자넬 모네의 첫 장편 단독 주연작이기도 하다. <겟 아웃>과 <어스>의 제작진이 참여했다는 홍보문구는 얼핏 조던 필이 이 영화의 제작을 맡은 것처럼 느껴지게 하지만, 조던 필은 <안테벨룸>의 제작에 관여하지 않았다. 두 영화의 다른 제작자가 이번 영화에 참여했다고 한다. 영화의 제목인 안테벨룸(Antebellum)은 라틴어로 “전쟁 이전”이라는 의미인데, 미국 남북전쟁 시기를 가리키는 용어로 영화 속에 등장한다.

 <안테벨룸>의 예고편을 본 관객이라면 이 영화의 배경이 남북전쟁시기뿐 아니라 스마트폰과 자동차가 등장하는 현대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 작품이 옥타비아 버틀러의 걸작 SF 소설 [킨]처럼 타임슬립을 소재로 한 영화로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테벨룸>의 설정은 타임슬립과 같은 비현실적인 SF라기보단, 피터 위어의 <트루먼 쇼>나 M. 나이트 샤말란의 <빌리지>에 가깝다. 즉,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현대이며, 주인공 베로니카(자넬 모네)를 비롯한 플랜테이션의 “노예”들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남북전쟁을 재현하는 테마파크에 꾸려 둔 일종의 세트장으로 납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알려주는 요소는 영화에서 현재가 등장하는 장면 이전에도 눈치챌 수 있다. 가령 어렵게 수확한 목화를 농장 한쪽에서 불태우고 있다던가, 농장으로 새로이 끌려온 노예 줄리아(키어시 클레몬스)가 베로니카의 정체를 알고 있다던가 하는 등의 힌트가 곳곳에서 등장한다. 

 <안테벨룸>의 설정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재스퍼(잭 휴스턴)와 엘리자베스(제나 말론) 등을 주축으로 한 극단적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흑인 인권운동에 앞서는 학자, 작가, 방송인, 셀럽들을 납치해 그들을 “노예”로 삼는 가상적 세트장을 꾸린 것이다. 베로니카는 흑인 여성의 인권을 주장하며 수차례 백인우월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인 사회학자이자 작가다. “과거는 결코 죽지 않는다, 아직 지나간 것도 아니다. (The past is never dead. It's not even past.)"는 윌리엄 포크너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 영화는 현재에 되살아나는 과거의 망령, 백인우월주의라는 망령을 소환해낸다. 특히나 영화 속에서 엘리자베스의 딸로 하여금 <샤이닝>의 한 장면을 재현하게끔 하며 그들이 과거적 유령임을 드러내기도 한다. 베로니카가 백인우월주의자와 논쟁을 벌이는 TV토론을 본 딸이 “저 사람은 왜 이렇게 화가 나 있어요?”라고 묻자, 그는 “화가 난 것이 아니라 겁난 거야”라고 답한다. 비단 백인우월주의뿐 아니라 거의 모든 종류의 인종차별은 분노에 앞서 두려움에서 촉발된다. “저들이 우리의 자본을 가져간다.”, “저들이 우리의 땅과 집을 차지한다.”, “저들이 우리의 일자리와 여성을 빼앗아간다.” 등등. 해소되지도 억압되지도 않는 두려움은 분노의 형태로, 흑인을 다시금 노예 상태로 되돌리려는 사디즘적 욕망으로 되돌아온다. <안테벨룸>이 다루는 것은 그 욕망이며, 이는 “백인을 억압하는 인권교육을 멈춰라”는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로 드러나고 있다.

 다만 <안테벨룸>은 그러한 이야기를 장르적으로 풀어내는 데 실패한다. 억압된 것, 빼앗겼다고 간주되는 것을 욕망하는 백인과 그들의 폐쇄적인 공동체의 이야기는 이미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겟 아웃>에서 완성된 형태로 제시된 바 있다. 더 나아가 자유시민으로서 존재하는 흑인들의 이름을 지우고 일종의 도플갱어, 새로운 자아상을 내세워 그들을 노예상태로 되돌린다는 설정 또한 <어스>에서 등장한 바 있다. <안테벨룸>은 조던 필이 퍽 흥미롭게 선보인 이야기를 설정만 바꾸어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동시에 <안테벨룸>의 만듦새가 조던 필의 두 영화만큼 뛰어나지도 못하다. 이야기의 진행, 특히 현재에 복귀한 백인우월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가미된 현재 장면에서의 전개는 꽤나 답답하게 다가온다. 영화가 품은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하더라도, 아니 그렇다고 한다면 영화 중반부를 차지하는 현대 장면은 실패에 가깝다. 소위 “토큰 블랙(인종차별 논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넣는 흑인 캐릭터)”이라 불리는 현상을 미러링한 베로니카의 백인 친구 사라(릴리 코울스) 캐릭터를 떠올려보자. 어딘가 으스스한 현재 장면 속 백인들 (이들 대부분은 플랜테이션 세트에서도 등장한다) 가운데 베로니카의 친구로서 그들과 거리를 두는 사라라는 캐릭터는 베로니카의 다른 친구 캐릭터인 던(개버레이 시디베이)과 대비되는 인물이다. 이 장면에서 그의 역할은 “백인도 흑인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당연한 말을 굳이 시간 들여 말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영화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사라와 던을 등장시키고, 적지 않게 시간을 허비한다. 

 샤말란 풍의 반전 스릴러 플롯을 지닌 <안테벨룸>에서 이러한 서사의 지연은 큰 손실을 가져온다. 반전이 등장하기에 앞서 그것을 눈치챌 수 있는 힌트를 잡아낼 시간을 충분히 제공하는 셈이다. 게다가 이는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현대라는 것과 플랜테이션이 “안테벨룸”이라는 이름의 남북전쟁 재현 공원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라는 두 가지 반전을 플롯에 마련해둔 채, 어느 한 쪽에 치중한 힌트를 쏟아내다 마지막에 다른 반전을 제시하는 방식 자체를 스스로 무너트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어쩌면 반전의 충격요법을 영화의 주요 플롯으로 끌어들이는 시도 자체가 더는 유효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해당 영역에 머무르고 있는 샤말란의 근작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실패하고 있는지, 차라리 그것에서 조금 벗어난 <글래스> 같은 작품이 조금이라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떠올려본다면, <안테벨룸>의 플롯팅은 이미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상품과도 같다. 조던 필의 성공 이후 인종차별 문제를 다루는 여러 호러/스릴러 장르 영화들이 유사한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이젠 그러한 충격요법에서 벗어날 때가 아닌가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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