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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25. 2022

“보드랍게” 삶을 마주할 시간

<보드랍게> 박문칠 2020

 “김순악”, “김순옥”, "요시코", "마마상", "위안부", "왈패", "개잡년", "기생", "식모", “엄마"… 영화는 여러 여성의 목소리로 위의 호칭들을 읊는 소리가 들려오며 시작된다. 영화의 포스터에도 적혀 있는 이 호칭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순악의 삶을 드러내는 파편들이다. 이민자 가정에 관한 사적 다큐멘터리 <마이 플레이스>부터 성주 사드 반대 투쟁을 기록한 <파란나비효과>, 대구 퀴어문화축제를 담아낸 단편 <퀴어 503> 등 다양한 방면의 작업을 진행해온 대구의 다큐멘터리스트 박문칠 감독의 신작 <보드랍게>는 지난 2010년생을 마감한 김순악의 삶을 따라간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기록한 김순악의 구술을 토대로, 그의 출생부터 사망 이후까지를 착실히 쫓는다. <보드랍게>는 크게 네 가지 형식을 취한다. 첫째는 김순악이 등장하거나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담은 아카이브 푸티지이고, 두 번째는 애니메이션으로 재현된 김순악의 삶이며, 세 번째는 ‘시민모임’ 활동가들의 인터뷰이고, 마지막은 김순악의 증언 녹취록을 읽는 미투운동 당사자들의 모습이다.

 이러한 구성은 김순악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위치시키는 대신 김순악 개인의 미시사를 “보드랍게” 담아내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2010년 이후 공개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관련된 영화들을 떠올려보자. 외교적 문제에 집중하며 논점을 파고들거나(<주전장>), 피해자의 과거를 재현하거나(<귀향>, <눈길>), 인권운동가이자 투쟁가로서 그들을 조명하거나(<허스토리>, <김복동>,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치유의 과정을 담아냈다(<그리고 싶은 것>). 한국, 중국, 필리핀의 피해자를 담아내며 그들의 삶에 주목한 <어폴로지>나 피해 이후의 삶에 주목하며 코미디 드라마의 형식으로 풀어낸 <아이 캔 스피크> 같은 작품도 있었지만, 전자의 경우는 개인보단 일제 침략을 겪은 동아시아 각국의 모습을 엮어내는 것에 주력했으며 후자의 경우 결국 민족주의로 귀결되고 마는 우를 범했다. <보드랍게>는 이들 영화와 다른 노선을 취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영화에서 으레 등장하곤 하는 수요시위나 소녀상의 이미지가 이 영화에 없다는 것에서, <보드랍게>의 지향점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보드랍게>에는 영화에 등장한 인터뷰이나 김순악의 증언 녹취록을 읽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자막이 없다. 사전 지식이 없다면 그들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짐작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즉 <보드랍게>는 인권운동 내지는 사회운동의 주체로서의 김순악을 다루지 않는다. 김순악이 투쟁하는 삶을 살아간 것은 2000년대 이후로 그의 인생에서 크지 않은 부분이다. 대신 영화는 경산에서 태어나고 만주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서울과 여수에서 일하고, 다시 고향으로 향했다 동두천에서 일한 뒤 식모살이를 하던 김순악의 삶의 궤적 전체를 쫓는다. 그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미디어 속 피해자들은 피해를 받았던 당시와 활동가로서의 현재만 존재하는 것처럼 다뤄졌다. 반면 영화 내내 술과 담배를 끼고 살고 종종 욕설을 내뱉는 김순악의 모습은 그간 재현된 피해자의 모습과 다르다. 인터뷰이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 인터뷰, 과거를 재현하는 윤리적 장치로서 사용되는 애니메이션은 김순악의 삶이 지닌 다양한 정체성을, 다양한 호칭을 향해 나아간다. 영화가 시작하며 등장한 김순악을 부르는 다양한 호칭들은 그의 삶의 궤적이 만들어낸 파편들이지만, 영화는 그것이 결국 김순악이라는 개인으로 수렴됨을 보여주고 들려준다. 

 이러한 방식은 그간 미디어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재현되던 방식뿐만 아니라, 포스트-미투 시대를 맞이한 지금 피해자성에 대한 반성적인 고민을 다시 하게끔 한다. 김순악의 증언 녹취록을 읽는 이들이 미투운동 당사자라는 것은 영화 마지막에서야 밝혀진다. 이는 김순악의 개인사에서 그가 다른 피해자들을 만나고 ‘시민모임’을 통해 이런저런 활동을 시작하는 모습이 등장하는 것과 맞물린다. 김순악의 녹취록을 읽던 이들은 김순악의 입장에서 기록된 김순악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물론 그들이 김순악의 삶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김순악이 고국으로 돌아와 성산업에 종사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그와 다른 입장을 보여주는 이도 등장한다. (#미투 대신 #OO계_내_성폭력 용어가 사용되었으나 같은 흐름에 있으므로) 2016년 말부터 국내 미투운동이 전개되면서 1991년 김학순의 공개 기자회견을 국내의 첫 미투로 보는 관점이 등장하기도 했다. 김순악을 비롯한 피해자들의 삶에 주목하는 것은 미투운동과 같은 반성폭력 운동의 새로운 시발점이자, 피해자성을 이야기하며 피해 당사자들을 공격하는 논리에 대응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정신없이 이야기했지만, <보드랍게>는 김순악이라는 개인의 삶에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더 큰 이야기를 슬며시 제시하는 영화다. 영화는 김순악의 삶에 집중하고, 그 삶이 남긴 유산을 탐색한다. “역사적 아픔”과 같은 단순한 말로 함축될 수 없는 그의 삶이 남긴 유산은 영화에 끝에서 만개한다. 2000년대 들어 김순악은 압화공예 작품을 여럿 남겼다. 이는 심리치료의 일환으로서 진행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김순악이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영화 후반부, ‘시민모임’의 한 활동가는 김순악의 압화 작업에 여백이 많은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김순악의 삶은 분노, 슬픔, 원환, 고통 등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 <보드랍게>는 그의 압화 작업에 담긴 꽃과 나비를 담아내고, 남은 여백을 김순악 이후의 사람들의 몫으로 남긴다. 김순악 이후의 사람들이란 ‘시민모임’의 활동가일 수도, 미투운동을 이끌어가는 이들일 수도,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일 수도 있다. 김순악이 캔버스에 남긴 여백을 무엇으로 만들어갈 것인가? 영화의 제목인 <보드랍게>는 자신에게 “보드랍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김순악의 말에서 나온 단어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보드랍게” 그의 삶을 담아냈다. 이제 관객, 목격자, 연대자인 우리가 김순악이 남긴 압화 작품을, 캔버스에 남은 여백을 “보드랍게” 마주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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