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브루노 뒤몽 2021
*본 원고는 팟캐스트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의 방송을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방송은 다음 링크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8916/series/4
"그런데 왜 늘 당신을 중심으로 영상을 찍죠? 당신이 많이 나와요. 거의 모든 취재영상에서 당신이 화면에 항상 있어요." 프랑스가 게스트로 출연한 토크쇼의 호스트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프랑스는 이것이 연출은 아니며, 상황을 주관적이고 감성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라 설명한다. 하지만 몇 장면 앞서 등장한, 중동 분쟁지역에서 프랑스가 취재하는 장면 속 그의 모습은 연출과 주연을 겸하는 배우 출신 감독들의 모습을 떠올리게끔 한다. 다만 여기서 더 중요한 부분은 프랑스가 취재영상을 ‘연출’했는가 보다는, 그가 화면에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연출된 화면입니다”와 같은 문구를 방송이나 유튜브 등에서 마주칠 때, 그 문구가 안전장치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촬영된 허구임을 지시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마치 라면봉지의 “조리예” 사진과 문구처럼, 화면의 내용이 지시하고 있는 것이 내용물을 지시하고 있지만 그것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게 된다. 프랑스의 취재영상은 이와 같다. 취재영상, 즉 뉴스, 더 나아가자면 40~50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 상영 전 상영되던 뉴스릴은 실제로 벌어진 일과 연출의 종합이다. 때문에 연출과 주연을 겸하며 화면에 항상 존재하는 프랑스는 카메라에 담긴 실제와 연출된 실제를 종합하는 존재다. 프랑스가 취재영상을 촬영하는 모습을 목격한 관객은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의 취재영상에서 전쟁, 폭격, 파괴, 난민, 총탄 등의 실제상황과 연출된 화면을 명명백백히 분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취재영상 속 프랑스의 가장 강력한 존재론적 의미는 “그곳에 있었음”을 지시하는 것이다. 프랑스 드 뫼르는 TV 스타고, 방송 저널리스트이고, 인플루언서다. 카메라 앞에 서고, 카메라를 다루는 것이 그의 직업이다. 물론 카메라는 그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교통사고를 낸 뒤 촬영된 사진이라던가, 그의 행보를 음습하게 쫓는 카메라의 존재가 그러하다. 하지만 프랑스 드 뫼르라는 인물은 자신을 감시하는 카메라를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카메라, 더 나아가 카메라가 대리하는 보이지 않는 곳의 시선 혹은 응시들이 존재하기에 존재할 수 있는 인물이다.
<프랑스>는 종종 기술적 오류를 드러낸다. 스크린 프로세스를 사용한 자동차 장면들에선 배경과 자동차가 분리된 것처럼 보이고, 종종 자동차가 만들어내는 물리적 경계가 없는 것처럼 촬영된다. 프랑스의 남편과 아들이 사고를 당하는 장면을 담던 드론 카메라 숏은 일부분이 삭제된 것처럼 튀는 편집을 보여준다. 전자의 오류는 프랑스가 진실과 허구, 실제로 벌어진 것과 연출된 것을 종합하며 내/외부의 경계 사이에 놓인 인물임을 드러낸다면, 후자의 오류는 영화 내부에서 등장하는 카메라와 시선이 아닌 <프랑스>라는 영화를 찍는 카메라와 그것을 보는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는 장치처럼 느껴진다.
다시 취재영상과 그 속의 프랑스, 그리고 취재영상을 내보내는 TV쇼의 프랑스로 돌아와보자. 프랑스가 진행하는 TV쇼 없이는 그의 취재영상은 존재할 수 없고, 프랑스가 없다면 TV쇼는 존재할 수 없으며, 영화 <프랑스>가 없다면 프랑스 드 뫼르라는 인물은 존재할 수 없다. 추락과 재기를 반복하는 프랑스의 시지프스 같은 삶은 카메라를 통해 중계되고, 매개되고, 촉발된다. 몇 겹의 카메라를 거치는 프랑스의 삶은 카메라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카메라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권력의 시선을 넘어 개인의 존재와 결부되는 것이 되었음을, <프랑스>는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