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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pr 02. 2022

격리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것처럼

<더 버블> 주드 아패토우 2022

 “쓰레기 같은 영화”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 시리즈, 폴 W. S. 앤더슨의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를 비롯한 영화들, <워크래프트>를 위시한 게임 원작 졸작 영화들, “Z무비”라 불리는 일본의 싸구려 장르물이나 “V 시네마”라 불린 비디오 영화들, 어사일럼의 영화를 필두로 삼은 “목 버스터”들…. 주드 아패토우의 신작 <더 버블>은 그러한 영화의 제작기를 담고 있다. 그것도 코로나 19 팬데믹의 한가운데서 진행되는 촬영 말이다. 영화의 제목인 “버블”은 코로나 19로부터 안전한, 모두가 백신을 맞았고 PCR 검사에서 음성을 받은 뒤 14일의 격리 기간을 거친 이후의 격리된 촬영장을 일컫는다. 이 버블은 문자 그대로 무균실임과 동시에 영화사에 의해 통제되는 무법지대다. 영화 속 시리즈인 <클리프 비스트>의 6편을 촬영하기 위해 배우 캐롤(카렌 길런), 크리스탈(아이리스 아패토우), 디터(페드로 파스칼), 션(키건-마이클 키), 더스틴(데이비드 듀코브니)과 감독 대런(프레드 아미센)이 모였고, 제작사 사람들은 이를 감시한다. 하지만 격리와 다름없는 촬영장 생활 속에서 제작사 대표 폴라(케이트 맥키넌)는 줌으로 그들을 감시하고, 각본은 계속 수정되며, 재능 없는 감독과 어떻게든 영화를 완성하려는 제작사의 감시와 압력은 끔찍한 상황을 계속 자아낸다.

 만우절에 공개된 이 영화는 “팬데믹 시대에 블록버스터 만들기”에 관한 거대한 농담처럼 다가온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존 시나, 제임스 맥어보이, 가수 벡과 같은 카메오들은 조롱의 대상이 된 할리우드의 초상을 가볍게 스케치한다. 그것이 철 지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문제겠지만. 당연하게도, 할리우드에서 벌어지는 각종 상황들을 패러디하고, 할리우드 자체를 조롱하는 코미디는 꾸준히 만들어졌다. 주드 아패토우의 절친들이 만든 <디스 이즈 디 엔드>라던가, <트로픽 썬더>, 혹은 코엔 형제의 <헤일 시저!>까지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들과 다르게, <더 버블>은 최근의 이슈를 발 빠르게 소화해내는 SNL 코미디 스케치에 가깝다. 조롱의 대상은 할리우드이지만, 마치 반년 전의 할리우드를 뒤늦게 조롱하고 있는 것만 같다. 팬데믹 3년 차를 맞이한 지금 격리기간 중 고통스러워하는 배우의 코미디 몽타주에 웃을 관객이 얼마나 될까? 격리와 원격 만남이라는 상황을 담아낸 인디 호러 <호스트>가 공개된 것도 벌써 1년 9개월 전의 일이다. <더 버블>은 정말, 늦게 도착했다. 게다가 이 영화가 다루는 이슈들, 가령 코로나 19로 인해 촬영이 연기된다거나, 배우들이 격리생활을 한다거나 하는 등의 상황은 모두가 실시간으로 목격해온 것이다. 배우들은 격리생활 중에도 화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SNS를 켜 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더 버블>은 반년이 아니라 팬데믹 기간 중 어느 때 개봉했더라도 뒤늦은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쓰레기 영화 제작기”로서의 <더 버블>은 어떠한가? <더 버블>은 그린 스크린 앞에서 허둥대는 배우들을 보여준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많은 장면이 소품이나 분장 없이 그린 스크린 앞에서 촬영된다는 것은 익숙한 사실이다.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같은 경우엔 빌런 미스테리오를 VFX 전문가로 설정한 뒤, 그가 그린 스크린 앞에서 모션 캡처 슈트를 입고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더 버블>은 이를 반복한다. 그린 스크린 앞에서의 과장된 연기는 이 영화가 패러디하고자 하는 “쓰레기 영화”의 것과는 다르다. 거대한 공룡 괴수 앞에서 벌벌 떠는 캐롤의 모습과 이어지는 그린 스크린 같은 것은, MCU 영화의 개그릴보다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다시 말해 <더 버블>은 무엇도 제대로 패러디하지 못하며, 뒤늦게 무언가를 조롱하고 있을 뿐이다.

 차라리 <더 버블>을 팬데믹 시대의 우울증을 체화한 실패한 코미디라 여기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의도는 절대 아니겠지만, <더 버블>의 총체적인 실패는 무언가를 제대로 겨냥한 패러디나 조롱이라기보단, 그것을 하지 않고서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무언가에 가깝다. 미국 코미디는 언제나 조롱의 대상이 될 것이 필요하고, 이번 영화에선 그 대상이 “쓰레기 영화”였을 뿐이다. 여기서는 주드 아패토우가 그간 연출, 각본, 제작으로 참여한, 재기발랄한 화장실 유머조차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발작적으로 튀어나온 아이디어의 집합을 보는 것만 같다. 농담은 정교하지 못하고, “쓰레기 영화”라 불리는 것을 제대로 패러디하지 못하며(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주드 아패토우는 <샤크네이도> 같은 영화를 경멸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한물 간 이슈들이 영화를 너저분하게 채우고 있을 뿐이다. 주드 아패토우는 항상 어디서 본 것만 같은 것들로 즐거움을 주었었다. <더 버블>은 그 관성이 적절한 인내를 거치지 못한 채 공개되어버린, 마치 영화 속에서 격리 중인 배우들이 지루함에 미쳐버리는 것처럼 만들어진 영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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