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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pr 27. 2022

<소설가의 영화>와 '소설가의 영화'

<소설가의 영화> 홍상수 2022

 조금 웃긴 말이지만, <소설가의 영화>는 라면 같다. 그러니까 라면이 너무 땡겨서 가족이 몰래 야식으로 끓여온 것을 딱 한 입만 훔쳐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결국 직접 끓여 먹었을 때의 헛헛함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을 더는 쓰지 않는 소설가 준희(이혜영)가 후배 세원(서영화)을 찾아 하남의 동네 책방에 들르고, 우연히 찾은 전망대 건물에서 함께 작업할 뻔했던 박 감독(권해효)과 그의 아내 양주(조윤희)를 만나고, 그들과 산책하던 중 영화에 더는 나오지 않는 영화배우 길수(김민희)를 만난 뒤, 다시금 동네 책방으로 돌아와 시인 만수(기주봉) 등과 막걸리를 마신다. 준희의 만남들은 단편영화를 찍어보고 싶다는 그의 욕구를 불태우게끔 한다. 이때 준희가 상상하던 영화는 무엇일까? 

 <소설가의 영화>에는 ‘소설가의 영화’가 나온다. 준희는 영상원에 다니는 길수의 조카 경우(하성국)의 도움을 빌려, 길수와 그의 남편이 주인공인 영화를 찍고자 한다. 세원의 책방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던 준희의 궤적이 중단되고 영화는 서울 서대문구의 작은 영화관으로 향한다. 준희는 이곳에서 자신의 영화를 길수에게 보여줄 참이다. 준희가 길수를 비롯한 이들에게 설명하던 영화는 얼핏 홍상수의 작업을 설명하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배우와 장소가 결정된 뒤에야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아내겠다고 말하는 준희의 모습은 홍상수 자신의 작업을 준희로 하여금 설명하게끔 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고야 마는 ‘소설가의 영화’는 그것과 다르다. 길수와 그의 모친으로 추정되는 나이 든 여성만이 출연하는 이 영상은 핸드헬드로 촬영되었고, 흑백이었다가 컬러로 전환된다. 즉 준희의 말을 통해 홍상수 영화의 형식들을 떠올렸다면,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부정된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소설가의 영화’는 준희가 상상하던 영화였을까? 준희가 길수와 영화를 찍겠다는 말을 들은 만수가 이야기가 떠올랐다며 말하려 하자 준희는 그것을 저지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흐트러질 것 같다는 이유 때문이다. 길수에게 영화를 틀어준 뒤 건물 옥상에 올라간 준희는 금연구역이라는 극장 프로그래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꼭 담배를 피워야겠다며 구석에서 아이코스를 꺼낸다. <소설가의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간 뒤 상영관 문을 열고 나온 길수 앞에는 아무도 없다. 영화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표정을 일그러뜨리던 길수 앞에 나타난 프로그래머는 준희와 경우가 아마 옥상에 있을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준희는 길수가 나올 것을 고려해 상영종료 5분 전에 알람을 맞춰두기까지 했다. 

 몇 가지 가정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준희는 자신의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담배를 연달아 피우느라 상영관에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길수는 자신이 나오는 영화임에도 자신이 상상한 것과 너무나도 다른 ‘소설가의 영화’를 보고 당황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자면, 영화관 장면은 술자리에서 잠든 길수의 모습에서 곧장 이어진다. 어쩌면 새로운 영화를 찍는다는 것에 대한 길수 자신의 불안감이 투영된 꿈일지도 모른다. 준희가 의욕을 불태우며 찍고자 했던 영화가 무엇인지는 준희도 관객도, 아마 홍상수도 알지 못할 것이다. 길수와 분식집을 찾은 준희는 라면을 먹던 중 길수가 자리를 비우자 길수의 비빔밥을 한 숟가락 몰래 먹는다. 그러니까 준희가 상상하던, 길수가 나오고 경우가 촬영해주는 영화는 라면 같은 것이었는데 비빔밥 같은 것이었다, 같은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홍상수 영화’라는 껍데기에 대한 홍상수의 코멘트가 이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많은 이들이 ‘홍상수 영화’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것과 홍상수의 영화는 다르기 때문이다. 바쟁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는 영화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이며 기술을 통해 1895년 실현된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라는 관념은 언제나 사람들 앞에 존재했으며, 영화, 유성영화, 컬러영화, (실패했지만) 3D영화 등은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영화에 다가가기 위한 시도들이다. 그렇다면 ‘홍상수의 영화’, 혹은 준희가 생각하던 ‘소설가의 영화’, 혹은 <소설가의 영화>에서 보고 싶었던 영화는 대중의, 준희의, 관객의, 홍상수의 관념 속에 있던 것에 가까울 것이다. 영화는 만들어지는 순간 그것은 관념과 상상 속에 존재하던 것과 다른 것이 된다. 

 <소설가의 영화>는 그 경계로 인물들을 보내고, 자신 스스로 마저 보낸다. 열악한 카메라로 촬영된 흑백 화면의 대부분은 창밖을 새하얗게 만들어버린다. 얼핏 보이는 형상들은 카메라에 담긴 그대로라기보단 차라리 연필로 그린 애니메이션이나 그런 질감의 필터를 적용한 것만 같다.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바깥과 뚜렷한 인물이 보이는 안, 그 경계를 넘나드는 순간 인물은 어딘가 변모하는 것만 같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세원은 책방 직원인 현우(박미소)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낸다. 하지만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다음 숏에서 담배를 피우던 준희에게 다가온 세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 현우를 좋은 동네 동생이라 소개한다. 영화에 담긴 물리적이고 시각적인 경계는 물론, 영화 프레임 외부와 내부의 경계 또한 인물들을 뭔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게 한다. 다시 말해 영화 바깥(들)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음성이나 불명확한 형상을 통해 상상할 수만 있는 인물들은 영화 내부에 직접 등장하는 인물과 어딘가 다른 이들이다. 홍상수는 영화 속 인물 하나하나의 달라짐, 영화 안에 있을 때와 바깥에 있을 때 변화하는 것 자체의 미스터리를 <소설가의 영화> 안에서 실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상상하던 영화가 실제 상영되는 영화로 나왔을 때 그 둘이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다시 ‘소설가의 영화’로 돌아와 보자. <소설가의 영화>의 러닝타임은 준희가 책방을 중심으로 하남을 돌며 여러 인물과 갖는 우연한 만남으로 채워져 있다. 때문에 준희의 궤적을 따라가던 관객들은 ‘소설가의 영화’가 우연한 만남들을 통해 준희가 습득한 무언가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상상하게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소설가의 영화’는 그런 것이 아니다. ‘소설가의 영화’는 준희가 보낸 우연한 만남들의 시간을 담아낸 것도, 자연스러움에 가까운 길수의 모습을 담아낸 것도(자연스럽다기엔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는 인위적 조작이 너무나 강렬하게 다가온다) 아니다. 상상을 빗나간 영화, 혹은 관념적인 영화를 따라올 수 없는 실제 영화 이미지의 등장. ‘소설가의 영화’는 <소설가의 영화>의 시공을 가르고 관객을 급습한다. 어쩌면 영화를 보고 나온 길수의 오묘한 표정은, 홍상수가 관객에게 공감을 보내는 흔치 않은 광경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과거를 보여주는 영화는 그럼으로써 미스터리하며, 그럼으로써 우리의 뒤통수를 노린다는 것에 대한 공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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