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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02. 2022

이상한 재난영화

<비상선언> 한재림 2022

 <비상선언>을 보며 이스트우드의 <설리>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같은 항공재난을 다룬 작품이고, 비행기의 기장과 승무원부터 관제탑의 직원들, 사건을 처리하는 공무원들의 이야기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설리>가 한없이 건조하고 묵직한 방식으로 – 허문영은 톰 행크스가 연기를 거의 안 하고 있다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 실제 사건을 다루고 있다면, <비상선언>은 허구의 사건을 매우 감정적인 방식으로 다뤄낸다. 2016년 국내에 개봉한 <설리>의 평을 다시 보고 있자면 모두가 세월호를 언급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2016년 이후 한국의 관객들은 포스트-세월호 영화라 할 수 있는 것들을 잔뜩 봐왔다. <부산행>, <엑시트>, <나쁜 경찰> 같은 영화들 말이다. 그 시간을 통과하던 중 우리는 다른 재난을 맞이했다. 코로나 19 팬데믹은 재난영화를 대하는 태도를 다시 한번 바꾸었다. <컨테이전>이 재평가된다거나, <#살아있다> 같은 영화가 등장했다거나 하는 등의 사건들 말이다. <비상선언>은 그러한 상황에서 등장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비상선언>은 <설리>의 정 반대 위치에 놓여 있다. <설리>의 육중하고 정적인 카메라와는 반대로 <비상선언>의 거의 모든 숏은 핸드헬드다. <설리>가 비행기의 일반 승객을 포함한 모두가 시스템 내에서 올바르게 작동했을 때 가능한, 다시 말해 “Make America Great Again”의 신화를 정직하게 소환하는 영화라면, <비상선언>은 시스템의 존재는 믿지만 시스템의 올바른 작동을 불신하며 개인으로 돌아가는 영화다. 인천에서 호놀룰루로 날아가던 비행기에서 바이러스 테러가 벌어진 이후의 상황은 <신고지라>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착착 돌아가는 시스템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국토부장관이 모든 일정을 취소한 채 나서고, 관할 형사는 자신의 할 수 있는 추리를 보태고, 청와대는 곧장 위기관리센터 실장을 파견한 뒤 대처 센터를 수립한다. 빠르게 지나가는 곳곳의 기관들은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그 환상은 결국 영화에 목소리조차 비추지 않는 존재인 최종결정권자, 즉 대통령의 고뇌로 인해 지연된다. 우리는 여기서 세월호를 떠올린다. 보호자 없이 호놀룰루로 여행 가는 고등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비상선언>은 명백히 세월호를 연상시키고 있다. 이 사태를 타개하는 것은 아내가 비행기에 타고 있는 형사와, 과거의 트라우마를 이겨낼 기회를 잡은 전직 파일럿과, 인명을 먼저 생각하는 고위급 공무원이라는 개인들이다. 

 <비상선언>은 애초부터 시스템을 믿을 생각이 없었던 영화다. “비상선언”이 무엇인지에 관해 4차례나 자막을 띄우며 시작한 영화이지만, 정작 영화 속에서 ‘비상선언’은 아무런 효력을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도 해결하지 못한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을 영화 속 개인들의 판단에 맡겨 둔다. 시스템은 판단의 방향성을 보여줄 뿐이다. 그 지점에서 <비상선언>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개인의 판단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영화 속 다양한 인물들에게 전사를 부여하고, 그것은 많은 대사들로 드러난다. 인물들의 선택에 개연성을 부여하려던 <비상선선>의 시도 대부분은 개연성의 표피만을 살짝 스칠 뿐 그것에 닿지 못한다. 그러한 설정들은 시스템을 파훼하고 생존으로 향하려는 인물들의 발버둥을 지연시킬 뿐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그러한 지연의 시간일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비상선언>은 한국의 현재를 퍽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세월호 참사를 지나고 팬데믹을 통과한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본 <비상선언>은 지난 몇 년간의 트라우마를 그대로 되돌려준다. 영화 후반부 등장하는 영상통화 장면에서 두통을 느꼈을 관객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팬데믹 시기에 가속화된 극단적 개인주의를 지극히 세월호를 연상시키는 사건 속에 투사하고 있다. 영화의 엔딩은 산산이 분열된 촛불의 행렬을 스마트폰의 불빛으로는 되살릴 수 없음을 자백하고 있다. 어쩌면 <비상선언>은 “이상한 방식으로 윤석열을 지지하는”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윤석열을 당선시킨 시대를 지지하는 영화에 다름없다. 믿음은 붕괴했고 믿을 수 있는 것은 나의 판단밖에 없는 세상을 이 영화는 묘사하고 있다. <비상선언>에는 군중은 있지만 시민은 없다. <비상선언>에는 개인의 영웅적인 판단은 있지만 결정권자의 존재는 화면 바깥에만 존재한다. <비상선언>에는 ‘비상선언’은 있지만 그것을 수용할 시스템은 없다. <비상선언> 속 영웅적 판단을 내린 개인들은 저승에서야 재회하는 것만 같다. <비상선언>은 그들을 추모하는 대신 그들을 저승이 속박해버린다. <설리>를 보던 한국인들의 가정법은 <비상선언>에 존재할 수 없다. “허드슨 강의 기적”이 보여준, “모든 것이 잘 맞물렸으면”이라는 가정법은 <비상선언>에서 통용될 수 없다. <비상선언>이 보여주는 세계의 규칙은 오직, 나의 판단(이라 쓰고 투자나 희생이라고 폭넓게 바꿔 부를 수 있는)이 적중했을 때만 나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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