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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y 19. 2022

미국 장르와 한국 소재의 불화

<엄마> 아이리스 K. 심 2022

 영미권 영화와 드라마에서 한국계 혹은 한국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횟수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이는 여러 스튜디오에서 활동하는 헤드스텝 이상 직급의 한국계/한국인 창작자가 많아진 것과 더불어, 때마침 히트한 <기생충>, <미나리>, <오징어게임> 등의 영향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 오스카나 에미에서, MCU에서, 시트콤에서 한국계/한국인 배우와 캐릭터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고, 드림웍스나 카툰 네트워크 등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BGM으로 케이팝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한국계 미국인 감독 아이리스 K. 심의 첫 장편영화 <엄마>는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을 준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엄마>의 이야기는 익숙하다.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미국에 온 아만다(산드라 오)는 양육과정에서 자신을 학대한 엄마(미화 앨라나 리)에 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피복이 벗겨진 전등 전선을 잡고 있게 하는 체벌을 일삼던 어머니로 인해 전기를 가까지 하지 않고 살아가며, 시골에서 딸 크리스(피벨 스튜어트)와 함께 양봉업을 하며 살아간다. 두 사람이 마주하는 타인은 꿀을 팔아주는 대니(더모트 멀로니) 뿐이다. 그러던 중 아만다의 삼촌이 찾아와 엄마의 죽음을 알린다. 아만다는 삼촌에게 유골과 유품을 전달받고, 그 이후부터 엄마의 유령에 시달리게 된다.

 <엄마>의 주된 호러 요소는 ‘한’이다. ‘한’이라는 개념은 한국 호러 영화/드라마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전설의 고향> 등에 수두룩하게 등장했던,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요절한 처녀귀신들, 이용민의 <살인마>부터 <여고괴담> 시리즈에 이르는 한국 호러영화의 계보 속에서 발견되는 ‘한’과 다르지 않다. 다만 한국영화에서의 ‘한’과 <엄마>에서의 ‘한’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한국영화에서의 ‘한’은 대부분 역사적 사건(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민주화운동 등)이나 사회적 압력(가부장제, 학구열 등)으로 인한 것이다. <엄마>에서 귀신이 된 엄마의 ‘한’은 얼핏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만 같다. 전도유망한 한복 디자이너였던 엄마는 자신의 뜻이 아니었던 이민을 하게 되고, 영어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편은 집을 버리고 떠나간다. 여기서 엄마의 ‘한’은 가부장에 의한 일종의 강제이주로 인해 발생한 것임과 동시에, 그간 한국영화에서 다뤄오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산된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가 발산하는 ‘한’ 자체가 한국영화의 것과 다르다고 하기보단, 그것을 마주하는 아만다의 반응에서 큰 차이가 발생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한국영화의 인물이었다면 무당이나 스님을 찾아가 도움을 구했을 상황들이, 아만다에게는 예상치 못한 침범으로 다가온다. 이는 아만다가 제사 같은 한국의 의례를 알고 있다는 것과 다른 문제다. <미나리>의 가족이 정착하려 애썼던 평야와 같은 공간에 아만다는 살고 있다. 지극히 미국적인 공간 속에서 아만다는 엄마의 ‘한’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그것을 예상하고 있지도 않다. 미국 하우스호러의 전형을 따르는 전개와 해당 장르에 충실한 미국영화적인 호러 장치들은 비-미국적인 테마와 불화한다. 표면적으로는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이 겪는 이민에서 기인한 호러처럼 느껴지지만, 영화 자체는 그렇지 않다. 차라리 한국의 귀신이 미국으로 이민 와 그곳의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하는 게 <엄마>에 관한 타당한 묘사에 가깝다.

 <엄마>는 그 간극을 활용할 정도로 야심 있는 작품도 아니다. “UMMA”라는 타이틀이 등장한 후 이어지는 60~90년대에 이르는 한국의 이미지들을 몽타주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스스로 빈약한 토대 위에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시대를 구분하지 않는 한국에 관한 아카이브 속 실제 이미지와 연출된 이미지들이 뒤섞이는 이 장면은 단순히 영화의 만듦새가 아쉽다는 것을 넘어, 영화 스스로 자신이 무엇을 호러의 소재로 삼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게끔 만든다. 영화는 제목으로 내세운 것처럼 엄마의 ‘한’과 엄마에 대한 ‘한’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그것은 장르적 틀의 소재를 기계적으로 갈아 끼운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 보니 소재와 장르적 장치는 불화한다. 영화의 부족한 완성도는 그 불화를 전면화하여 드러낼 뿐이다. <엄마>가 다른 한국 콘텐츠를 따라 등장한, 단순히 트렌드를 따르는 기획이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영화와 같은 기계적 이식만으로는 성취할 수 있는 게 없을 뿐임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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