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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09. 2022

가족에 관한 동상이몽

<브로커> 고레에다 히로카즈 2022

*스포일러 포함


 <브로커>의 첫 인상은 예고편에서 물씬 느껴지는 <어느 가족>의 분위기였다. 직접 본 <브로커>는 <어느 가족>과는 달랐다. 전작이 이미 가족으로 구성된, 구성원이 스스로를 가족 구성원이라 생각하는 이들의 집합을 다루고 있다면, 본작은 가족 같아 보이는 무언가로 구성되어가는 집단을 보여준다. 이 차이는 꽤 크다. 1999년작 <디스턴스>에서 2015년작 <태풍이 지나가고>에 이르는 그의 “가족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혈연을 중심으로 짜여 있었다. 아이가 뒤바뀐 두 가족이던, 세 자매가 배 다른 막내 동생을 흡수한 가족이던, 아이들만 남아있는 가족이던 간에 말이다. <어느 가족>과 <브로커> 속의, 어떤 면에서는 대안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집단의 구성원 대부분은 혈연관계가 아니다. <어느 가족>에선 하츠에와 아키 만이 혈연이였고, <브로커>에선 소영(이지은)과 그의 아기 우성을 제외하면 전통적인 의미에서 가족은 없다.

 혈연이 뭐가 중요하냐고 말하는 영화에서 혈연관계를 따지는 이유는 그들이 결혼과 혈연으로 구성된 정상가족 바깥의 가족 형태를 구성하고 있음에도, 정상가족이 되려 하기 때문이다. <어느 가족>에서 드러나는, 랜덤하게 모인 이들의 구성이 익숙한 가족구성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상가족을 향한 욕망은 영화의 기저에 존재한다. 즉, <어느 가족>은 제도 바깥에서 형성된 모종의 대안가족이 자신 그대로를 인정해달라며 투쟁으로서의 거짓말을 이어감과 동시에, 정상가족이 되지 못한 자신들의 처지를 극복하는 방식으로써 가족을 구성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반대로 <브로커>의 집단은 가족이 되지 못한다. 가족이 되지 못할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동수(강동원)와 소영의 대화에서 그들은 가족을 꿈꿔보지만, 아동 인신매매를 뒤쫓는 경찰 수진(배두나)과 이형사(이주영)의 존재로 인해 그 꿈은 이뤄지지 못한다. 아니, 동수와 소영은 그것이 이뤄질 수 없는 꿈이라고 알고 있음에도 꿈을 나눠본다. 도박으로 인해 이혼한 상현(송강호)의 마음은 영화 중반부부터 배드엔딩을 꿈꾸고 있다. 가족, 부모, 부모됨에 대한 각자의 가치관이 다른 이들이 모여 꾸는 가족의 꿈은 애초부터 동상이몽이다. 때문에 이들의 구성은 <어느 가족>에서처럼 전형적인 가족구성원의 것을 따르지도 못하고, 가족이라는 강력한 명명으로 묶이지도 못한다.

 <브로커>는 얼떨결에 가족의 꿈을 나누게 된 이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꿈은 각자가 생각하는 부모됨의 차이로 인해 갈라진다. 보육원에 버려진 동수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이해하지 못하고, 성매매 중 임신하게 된 소영은 그런 상황에서 아이를 낳고 길러보려 했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브로커>가 덜컹거리는, <어느 가족>의 이중적인 모순을 다른 방향으로 뿜어내기 시작하는 것은 이들의 동상이몽이 드러나는 순간부터다. 서로가 서로의 가족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혹은 그러지 못하는 게 당연한 상황에서 이들의 동행은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가는 가족적인 순간을 제공해줄 뿐이다. 다시 말해, 이들이 서로의 상황에 대해 서로 수행하는 돌봄은 일회적일 뿐이며, 그들은 그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도 서로를 속인다. 돌봄에 대한 신뢰는 있되 상황에 대한 믿음은 없는 기묘한 공동체가 <브로커>의 인물들이다.

 이 기묘한 공동체는 소영의 모성애를 촉발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가출해 성매매를 하고 살인도 저지르고 아이를 버리기까지 한 소영의 교화가 이 이야기를 추동하는 목적인 것마냥 영화는 굴러간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은 소영과 옅은 러브라인을 나누는 동수도, 소영의 뒤를 쫓으며 그런 사정에 아이를 왜 지우지 않았냐고 꾸짖는 수진도(두 사람이 나누는 임신중단에 대한 논쟁은 모든 면에서 무가치하다. 현실의 논쟁을 끌어오지도, 캐릭터를 설명해주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 모두를 엮는 아기 우성도 아니다. 모든 인물의 뒤에서 각자의 사정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상현의 존재는, 역할 나눔이 불분명한 이 공동체에서 오로지 아버지라는 하나의 역할만 수행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여기에 세탁소를 운영한다는 직업 정체성은 그가 주변인은 물론 우연히 마주치는 이들의 옷을 살펴봐준다는 것으로 이어지고, 이는 “아버지의 돌봄”이라는 형태의 부성애로 발현된다. 상현이 보여주는 부성애는 돌봄에 기반해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가부장의 부성애를 벗어나는 것 같지만, 그가 맞이한 결말은 그것을 스스로 부정하고야 만다. 소영의 모성애는 그러한 상현의 부성애를 거울 삼아 발전한다. 

 한 인터뷰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간 부성애만을 다뤄왔다는 비판을 듣고 <어느 가족>과 <브로커>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로 나온 두 작품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부성애와 모성애, 가족됨이란 무엇인지 질문한다. 제도적, 사회적으로 가족이 되지 못하는 공동체를 보여줌과 동시에 이들에게 가족-수행을 맡김으로써 벌어지는 이중성, 어떤 긴장감이 두 영화의 목표였을 것이다. 하지만 두 영화는 다른 방향의 비슷한 이유로 실패한다. <어느 가족>이 결국 가족이라는 기표가 지닌 정상성을 놓지 못해 무너졌다면, <브로커>는 처음부터 가족의 기표를 사용할 수 없는 집단을 상정해놓고 부성애와 모성애의 발현을 그것의 접착제처럼 사용한다. 예정된 배드엔딩으로 향하는 이들의 모습은 제도적으로 인정받는 가족만이 가족이라는 관념에 대한 비판이 아닌, 다양한 편견으로 파편화된 부성애와 모성애, 즉 부모됨을 하나씩 대입해보며 짜맞춰보는 것에 가깝다. 그들은 그들이 놓인 상황과 생각 자체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영화가 담아낸 짧은 “체험판 가족”을 통해 교화되고, 모성애를 갖춘 이후에야 그들은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준비가 된 것으로 간주된다. <브로커>는 그 상황을 비판하거나 일종의 사실적시를 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구현되는 적극적인 교화를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정상성 바깥의 무언가로 존재하는 이들을 그 자체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그 누구보다 고레에다 자신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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