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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13. 2022

패스트 영화에 대한 보충설명

*이 글은 지난 2022년 6월 11일 진행된 씨네미루의 네 번째 상영회 [패스트 영화]에서 배포된 글입니다.


 유튜브 등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영화나 드라마 시리즈를 요약해 놓은 콘텐츠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MCU의 새 영화가 개봉한다던가, 유명 넷플릭스 시리즈의 새 시즌이 나온다거나 하는 상황에서 이를 접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이를 “패스트(fast) 영화”라 부른다. 패스트 영화에 관한 법률적, 학술적 정의는 없지만, 보통 원 영화를 10분 이내의 분량으로 편집한 뒤 자막이나 내레이션 등으로 내용을 설명하는 영상을 이야기한다.[1] 하지만 여기서 다룰 “패스트 영화”는 그것이 아니다.그렇다고 소위 “슬로우 시네마”라 불리는, 차이밍량이나 라브 디아즈 같은 이들의 방법론에 반대하는 것에서 사용되는 의미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패스트(fast)”일 것이다. 속도를 의미하는 이 단어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패스트는 일본의 “패스트 영화”처럼 빠르게 감상할 수 있는 짧은 러닝타임의 영화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패스트는 제작과정의 의미에서 빠르게 제작되는 것일 수도 있다. 패스트는 그 제작과정만큼이나 빠르게 유통되어 관객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패스트는 빠르게 제작하여 빠르게 공개한다는 스스로의 제약 조건을 통해 영화학교 등으로 제도화된 기존의 영화제작 방식을 거부하는 것에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일 수도 있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한 것은 본 상영회에 상영된 영화들을 하나로 묶을 수 없기 때문이다. 씨네미루의 네 번째 상영회이자 문화 공동체 산닌과의 공동기획으로 진행되는 이번 상영회에서 상영된 7편의 영화는 일관성이 없다. 40초의 러닝타임을 가진 버드의 애니메이션 <무제>부터 1시간 40분의 러닝타임인 아니의 <우리 워크샵>까지, 러닝타임부터 천차만별이다. 아이패드로 그려진 애니메이션부터 놀목의 <새와 내가 다르고>나 <현수의 모험>처럼 익숙한 2D 컴퓨터 애니메이션, 갑작스레 실사 이미지를 마주하게 되는 지어의 <이른 가지>, 랜덤한 이미지들을 SF적 형식에 그러모은 바쿠의 <바쿠 present>와 퍼포먼스 비디오에 가까운 아니의 <회기동 110-3 203호>까지, 일곱 작품이 공유하는 형식, 분량, 주제의식 등은 찾아볼 수 없다. 산닌의 구성원인 아니는 “패스트 영화”라는 명칭에 관해 “일본에서 이미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우연히 떠올린 것과 같은 단어였고, 그렇기에 그냥 가져다 쓴다”고 설명해주었다. 때문에 이번 상영회에서, 그리고 이 글에서 사용될 “패스트 영화”라는 명명은 엄밀한 정의를 요구하는 용어라기보단 그저 실천에 관한 것이다.


 이 실천을 설명하기 위해 우선 산닌이 어떤 곳인지를 말해야 한다. 산닌(三人, @sannninnn) 은 각각 아니, 바쿠, 지어라는 예명을 사용하는 세 사람이 모여 만든 문화 공동체이다. 2022년 2월 말 메일링 서비스를 통해 각자의 창작물을 선보여왔고, 이후 놀목과 버드가 참여해 지금의 구성원이 되었다. 이들이 메일링을 통해 공유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인터뷰 영상, 플레이리스트[2]. 즉 이들의 창작물은 월 단위 구독제로 진행되는 메일링 서비스를 통해 공개되고, 더 나아가 마감이 존재하는 메일링 서비스의 루틴에 따라 창작이 진행된다. 메일링 서비스는 구독의 형태를 통해 창작자와 구독자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대안적인 창작물 유통망이다. 2018년 이슬아 작가의 「일간 이슬아」가 대성공을 거두며 메일링 서비스는 익숙한 유통망이 되었다. 소설, 시, 일기, 에세이, 뉴스레터, 인터뷰, 플레이리스트, 만화 등 많은 창작물이 메일링 서비스의 형식으로 유통되고 있다. 그리고 메일링 서비스는 “자기 고백과 자기 노출을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친밀성의 문화 안에서 … 자기 재현이라는 투명성의 실천을 통해”[3]구독자들에게 진정성을 안겨준다.


 흥미로운 것은 메일링 서비스의 유통망을 활용한 창작물 중 영상은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업 유튜버들의 경우 일주일에 2~3개의 영상 콘텐츠를 공급하고 있지만, 산닌의 경우처럼 메일링 서비스를 통한 독점공개의 방식으로 영상 창작물을 유통하는 이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패스트 영화”라는 명명은 메일링 서비스의 성격을 통해 가장 강력하게 구성된다. 매달 새로운 영상을 제작해 구독자들에게 송출하는 방식은 적지 않은 제약을 창작자 스스로에게 부과한다. 오랜 기간의 제작과정을 필요로 하는 애니메이션은 물론이고, 촬영과 편집에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한 영화 작업들 또한 마찬가지다. 제작과정은 “패스트”해질 수밖에 없다. 영화학교에서 가르치는 영화제작방식, 이를테면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에서 출발하여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스토리보드를 만든 뒤 팀을 꾸려 영화를 만들어가는 방식은 한 달 안에 소화할 수 없는 작업 방식이다. 이러한 제약은 다른 방식의 제작으로 되돌아온다. <바쿠 present> 속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산닌을 통해 유통된 영화들은 스마트폰으로 촬영되었다. 영화의 출연자는 산닌 구성원이거나 그들의 친구다. 소자본/가내수공업 영화를 지향하는 제작여건의 특성상 다른 스탭이나 배우를 고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이들의 작업은 한 달 안에 소화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빠르게 실험하여 선보이는 것에 가깝다. 혹은 제작 중에 있는 것을 구독자들과 공유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인 지어의 <이른 가지> 후반부에는 실사 촬영이 등장한다. 이는 마감이라는 시간적 제약이 기존에 바라던 방식의 창작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민첩하게 대안을 찾아내야 하는 과정 속에서 일종의 재미를 발생시킨다. <이른 가지> 후반부에 등장한 풍경 이미지는 앞서 전개되던 이야기나 이미지의 톤과 크게 다르다. 기존에는 회화 작업을 주로 선보여온 버드의 <무제>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작가에게 새로운 장르를 재빠르게 경험해보는 기회다. 앱스토어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툴을 사용해 아이패드로 제작한 40초가량의 짧은 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창작 도구를 실험해보는 습작임과 동시에 빠른 제작, 유통, 감상이 가능한 패스트 영화의 사례다. 놀목의 두 작품 <새와 내가 다르고>와 <현수의 모험>도 이와 같다. 놀목의 경우 애니메이션을 배우는 학생이지만, 동시에 학교의 맥락에서 수용되기 어려운 작품을 생산해 유통하는 실험을 진행하는 셈이다. 


 SF를 표방하고 있는 바쿠의 <바쿠 present>는 새로이 촬영된 영상과 작업을 위해 촬영했지만 미사용된 과거의 영상이 뒤섞여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산닌의 다른 구성원들이다. 영화는 과거의 사건을 말하는 문장(“1969년 7월 20일, 인류는 처음으로 달에 갔다.”), 산닌 구성원의 미래를 설명하는 문장(“2053년 5월 9일, 아니는 모두에게 박수받지만 끝내 울고 말았다.”)이 등장한다. 얼핏 산닌 구성원의 일상과 작업과정을 담은 브이로그처럼 보이는 이미지의 연속이지만, 자막들이 지시하는 시제들과 명확한 차이를 지닌 영상 이미지(DSLR로 촬영된 과거의 영상들과 스마트폰으로 촬영된 현재의 영상)는 서로 다른 순간에 포착된 것들을 묶어 작품이 구독자에게 도달하는 현재의 문장(“2022년 4월 22일, 바쿠는 영화를 만들고 죽었다.”)으로 종합된다. “인간 바쿠는 죽기 전, 친구들을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는 시놉시스 겸 연출의도는 익숙한 아이디어를 민첩하게 구성하는 실험, 혹은 지나간 이미지를 현재에 선보인다는 영화 자체의 SF적 성격에 관한 흥미로움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메일링 서비스로 인해 촉발된 패스트 영화의 성격은 연출자가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것만을 사용하게끔 유도한다. 


 산닌의 다른 구성원과 자신이 주인공인 아니의 <회기동 110-3 203호>는 아니 자신이 목소리로 읽는 스크립트가 영화의 뒷부분에서 실제로 구현되는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형식적 구성은 짧은, 저예산의 제작과정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다.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른 아니 본인이 스크립트를 읽는 모습은 산닌의 패스트 영화의 제작과정과 다름없다. 아이디어가 존재하고, 그것을 만든다. 너절하게 느껴지는 중간 공정을 제거한 채 내 앞에 놓인 장비들로 무언가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패스트 영화라는 명명은 하나의 장치가 된다. 자신들이 창작물을 공개할 일정을 미리 설정해둔 채 진행되는 메일링 서비스 및 패스트 영화를 추동하는 것은 아이디어라는 관념적 존재가 아니라 정해진 시점에 반드시 결과물을 발송해야 한다는 마감의 감각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미리 결과물의 내용과 성격을 고지한 뒤, 그것을 지키기 위한 행위에 가깝다. 아니의 <우리 워크샵>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작품의 1부라 할 수 있는 초반부에선 한 가지 제약이 참가자들에게 부과된다. 모든 말을 과거형으로 하는 것이다. 반대로 2부라 부를 수 있는 후반부에선 모든 말을 미래형으로 해야 한다. 카메라 앞의 참가자들은 현재의 발화를 과거행으로 말해야 하고, 또 과거의 이야기를 미래형으로 말해야 한다. 이 기묘한 시제설정은 산닌이 내세우는 패스트 영화의 성격, 창작을 추동하는 장치로써의 패스트 영화와 맞닿아 있다. <우리 워크샵>은 패스트 영화의 포맷이 산닌에게 부여하는 제약을 참가자들에게 넓히며 확장한다.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이디어와 마감뿐일 때, 그 아이디어는 어떻게 실천될 수 있을까? 이번 상영회에서 상영된 일곱 편의 결과물이 모두 성공적이라고 할 순 없다. 다만 어떤 실천의 과정으로서 선보여진 것으로 생각할 때, 일곱 작품과 다섯 작가가 보여주는 실천은 성공적이다. 상영회라는 포맷을 통해 선보일 수 있는 것은 결과물이지 실천 자체가 아니다. 이 글 또한 그들의 작업이 어떤 작업인지, 어떤 면에서 성공하고 어떤 면에서 실패했는지를 가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산닌이라는 공동체가 수행하는 실천의 성격이 무엇인지, 그들 스스로 패스트 영화라 명명한 실천이 어떤 방향을 지니는지에 관한 글이다. 서로 다른 작업을 이어가는 이들의 영화는,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일관성을 찾을 수 없다. 유일한 일관성이라면 그것이 한 달 단위의 메일링 서비스를 통해 공개되며, 그것이 만든 제약 속에서 스스로를 위치시킨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번 상영회 또한 산닌의 메일링이 선보이는 실천의 연장선상에 있다. 어쩌면 이 또한 패스트 영화라는 명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실천일지도 모른다. 패스트 영화가 영화의 내용을 빠르게 소개하고 설명하는 유튜브 콘텐츠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영화가 되었건 다른 창작물이 되었건 모든 것이 콘텐츠로서 유통되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과 같다. 일본에서 패스트 영화 관련한 사건이 저작권과 연계된 것임을 떠올려보면 이는 의심이 아니라 확신에 가깝다. 


 모든 것을 콘텐츠로 부르는 상황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아마추어리즘도, 주류에서 벗어난 무언가도 모두 콘텐츠로 불린다. 메일링 서비스라는 형식은 산닌이 생산하고 유통하는 것이 ‘콘텐츠’임을 숨기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콘텐츠라는 범주를 내파할 수 있는 것이다. 25년 전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이라는 영화제가 있었다. 제목 그대로 십 만원 정도의 제작비를 사용하고 비디오로 제작된 영화들을 상영하는 영화제였다. 카메라가 있다면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반대로 영화라는 것의 범람을 초래한다. 영화라는 것이 범람한다면 그것을 만들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 가령 시놉시스-트리트먼트-시나리오라는 투자 유치를 위한 영화제작의 단계들, 장편영화로 향하기 위해 제작되는 포트폴리오형 단편영화들, 이 과정을 체득하게끔 하는 영화학교의 커리큘럼 같은 것은 더욱 무의미한 것에 가까워진다. 물론 배우는 과정은 필요하다. 하지만 커리큘럼 바깥의, 규격 외의 영화를 생산하는 사람과 그것을 만날 수 있는 장소 또한 필요하다. 십만원비디오페스티발을 추동하던 아마추어리즘은 독립영화의 제도화와 함께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산닌이라는 영화제도 바깥의 창작자들이 무엇을 지향하는지는 모르겠다. 그것은 이번 상영회를 찾아 이 글을 읽고 있을 여러분이 그들의 작업을 보고 그들과 대화하며 알아가야 할 일이다. 다만 한 가지는 명확하다. 이들의 “패스트 영화”는 20여년 전에 존재했던 아마추어리즘의 활력이, 규격 바깥의 영화들이, 콘텐츠라는 이름 내부를 파고들어 범주를 무력화하는 창작물이 어딘가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 신현철, 「일본 패스트 영화와 저작권 보호」, 『해외 저작권 보호 동향』, 한국저작권보호원, 2021, 2p.

[2] 산닌의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sannninnn/ )에서 구독 관련 정보를, 유튜브 채널(

https://www.youtube.com/channel/UCkmuIiZnBoKQmo9O5PedVeA)에서 인터뷰와 플레이리스트 등을 볼 수 있다.

[3] 강보라, 「《일간 이슬아》의 진정성」, 『한편 2호 인플루언서』, 민음사, 2020, 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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