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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05. 2022

비합법의 경험을 믿기

 2020년 마테리알 3호에 기고했던 글 "이미 흩어진 '밀레니얼 시네필'"(1)은 하나의 리스트로 시작한다. 이것은 나의 경험, 그러니까 영화를 접한 공간과 매체와 방식을 각각 처음 경험했던 순간을 적어둔 것이다. VHS부터 블루레이까지, 초등학교 교실에서 틀어주던 불법 파일부터 넷플릭스까지, 동네 극장에서 시네마테크까지. 이 경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니 그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궁금한 것은 다른 이들의 리스트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영화를 처음 보았고, 영화를 어떻게 보아왔는가? 위 리스트를 쓴 것은 나의 관람경험이 결코 단일할 수 없으며, 영상매체가 디지털로 이행되던 90년대 중후반 이후로는 더더욱 그러함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단일한 관람 경험이라는 것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허구다.


 저 경험들 중 무언가가 빠져있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영화를 만날 수 있는 경로 하나를 잃게 된다. 그것은 물리매체일 수도, "어둠의 경로"일 수도, 영화제나 시네마테크일 수도 있다. 그것은 굉장한 손해일 수밖에 없다. 내가 영화제에 가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단편영화, 실험영화, 토렌트로도 돌아다니지 않는 영화들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온라인의 해적들이 없었다면 그에 속하는 무수한 영화들을 보지 못했을 것이며, 물리매체를 사지 않았다면 각종 부가영상의 이로움과 양질의 화질을 집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고, 넷플릭스를 이용하지 않았다면 합법경로로 영화를 보는 것의 쾌적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경험들은 지금 내가 영화를 접하고, 알아가고, 탐색하고, 생각하고, 보는 행위의 토대다.


 "영화를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서만 봐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은 크게 틀린 구석이 없다. 나는 영화를 만드는 데 시간과 재능을 쏟아부은 이들에게 적절한 수익이 돌아가길 바란다. 하지만 그러한가? 넷플릭스는 <오징어 게임>의 흥행에 러닝개런티를 주지 않았고, 네이버 시리즈온을 비롯한 TVOD 플랫폼의 정산비율을 형편없다. 내가 도서관이나 DVD 대여점에서 대여하여 관람한 영화의 창작자는 나의 관람으로 수익을 얻나? 아니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들이 언제나 도서관, OTT, 대여점, 물리매체 판매점에 있나? 아니다. "창작자에게 수익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 합법적인 경로가 아닌 것을 폐쇄해야 한다"는 말은 창작자에게 올바른 수익이 돌아가게 하지도 못하고, 보고 싶었던 영화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이중의 패배다.


 마테리알 노션 페이지에서 연재되고 있는 한민수 필자의 "해적질의 옹호와 현양"(2)이 겨냥하는 것은 그러한 상황이다. 저작권법은 창작자의 재산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졌지만 미키마우스법이 알려주듯 그것은 실패했다. OTT, VOD서비스, 물리매체 등은 영화가 상품가치를 지닐 때에만 그것을 유통한다. 산업은 관객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산업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고객이다. 영화(산업)을 위해 합법적인 경로만을 택해야 한다는 주장은 비합법 경로로 유통 자본 바깥의 영화, 영화제조차 수용하지 못하는 영화, 수장고에 잠들어 있는 영화, 지리적/경제적/사회적 사유로 이동/물리매체의 구매 및 수집/외국어 습득 등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보고자 하는 영화의 관객을 향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산업 자체에게 되돌아가야 한다. 왜 <이미지 북>은 수입되었음에도 개봉은 커녕 2차 매체로도 유통되지 못했는가? 왜 멀티플렉스는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제대로 상영하지 않는가? 왜 IPTV에서는 1500원을 정산받던 영화는 OTT에서 100원밖에 받지 못하는가?(3) 영화를 합법적인 경로 안에서만 봐야만 한다는 주장은 결국 영화를 유통하는 자본을 믿으라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그 말을 던진 이는 그것을 믿는가? 그것을 믿은 결과는, 국내에 런칭하지 못한 OTT서비스와 제휴를 맺었다는 "토종 OTT"들이 결국 들여오지 못한 영화와 드라마를 보기 위해 VPN을 켜고 탈법적 영화관람이다. (다른 길로 새는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지점에서 왓챠의 "#헐왓챠에" 캠페인은 차라리 솔직한 마케팅이다)

한민수 "정품이라는 신화"

 당연한 말이지만, 이 이야기는 <헤어질 결심>이나 <토르: 러브 앤 썬더>를 불법 다운로드해서 영화사-자본주의자들을 망하게 하자는 소리가 아니다. 한민수 필자의 첫 글 "정품이라는 신화"에는 위의 캡처와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우리는 저 수많은 감독들의 영화를 합법적으로 관람할 수 없다. 그것은 정품으로 위장한 해적판이거나, 끔찍한 화질과 자막과 화면잘림과 모자이크가 곁들여진 질 낮은 판본이거나, 아예 합법 유통망 바깥에 있다. 씨네스트의 해적들과 그들이 해적질해온 결과물을 살펴보는 관객들은 자본이 선택하지 않은 영화를 보고자 할 뿐이다. 합법적인 유통망 내에서 저것을 보고자 하는 것은 망상이다. 누군가의 주장과는 다르게, 씨네스트에서, 토렌트를 통해서, 지금은 사라진 P2P 사이트를 통해서 영화를 보던 이들은 그것이 비합법적 경로임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둠의 경로" 따위의 말은 왜 생겨났겠는가? 그러한 경로를 거치지 않는다면 볼 수 없는, 혹은 끔찍한 판본으로 봐야만 하는 영화들은 이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 그것은 영화제와 시네마테크가 제공하지 못하는 대안적인 프로그래밍이자 비평의 가능성을 개방한다. 무엇보다, 그러한 방식으로 영화를 보지 않는다면 영화제와 시네마테크의 프로그래머들은 그러한 영화들을 어디서 접하고 보겠는가? "카라가르가 같은 사이트들이 어둠의 페스티벌 스코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한민수의 목격담을(4) 떠올려보자. 합법 유통과 비합법 유통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 짓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당장 영화관에 개봉했거나 이제 막 OTT에 공개된 신작에 관한 것이나 멀쩡한 판본으로 판매되고 있는 "최신작들"을 물론 제외해야겠지만, 합법 경로가 내세우는 매대 최상단에 놓인 "최신작들"의 숫자는 영화 전체의 숫자보다 작다는 것을 명심하자.


 다시 영화관람이라는 경험의 층위로 돌아와 보자. 정발( 탈을  해적판) DVD VOD사놓고 화질이나 자막이 너무 구려서 “불법영상이랑 자막 구해서  경험은  흔하다. 반대로 고화질의 비합법 파일로 영화를  뒤에 묘한 죄책감으로 괜히 다운로드 서비스로 구매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이들이 경험적으로 증언하고 있듯이, OTT TVOD 서비스, 물리매체, 영화제, 시네마테크의 주된 고객은 해적질을 통해 영화를 보는 관객과 크게 겹친다. 좋은 영화를 찾아 해적질을 감행하는 이들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것을  주저하겠는가? 그들은 해적질에 공을 들이는 만큼 그것을 보러 떠나는 것에도 적극적인 이들이다. 이들을 "불따충"으로 지칭하며 모든 영화를 "불따"하여  것이라 매도하는 것은, 이들의 행위를 들여다볼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는 자백이다. 이들은 강력한 소비자다. 다만 그들이 소비하는 상품의 광범위함이 역설적으로 그들을 자본 바깥으로 몰아낸다. 20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제를 찾는 관객보다 1편의 영화를 보고 굿즈를 구입한  근처 맛집을 탐방하는 관객이 영화제( 지자체)   수익을 가져다주고, 1000원짜리 고전영화 VOD 대량 구매하는 10명보다 20000원짜리 신작을 구매하는 100명이 플랫폼에   수익을 안겨줄 뿐이다. 정직한 소비자가 해적이 되는 이유는, 산업과 자본이 그들의 소비를 장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프라인의 관객과 해적질의 결과물을 내려받는 이들이 수행하는 영화관람이라는 행위는 단일한 경험은 아닐지라도 연속된 경험으로 존재한다. 단일한 관객이 수행하는 경험의 연속성을 "불법"이라며 잘라내는 것은 불법의 근절이 아니라 논의의 단절을 초래할 뿐이다.

 이제 막 한국에 정식개봉하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라던가, 최근 몇 년 사이 극장 개봉 및 2차매체 유통이 진행된 에드워드 양의 영화들을 떠올려본다. <큐어>를, <해탄적일천>을 합법적으로 보기 위해 걸린 시간은 각각 25년과 39년이다. 나는 내가 미성년자였을 때나 영화제와 시네마테크에서 틀었던 영화들을, 내가 그곳들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게 된 나이에는 상영하지 않았던 영화들을 보기 위해 누군가가 그것을 "합법적으로" 유통시키길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물론 그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방법은 아니다. "비공식 유통되며 '전설'된 영화"(5)라는 수식어는 기사의 제목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을 보는 행위는 불법이기에 지탄받아 마땅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영화를 가로막는 것은 바로 그 자다.



p.s.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이 논의를 웹툰이나 음원시장 등 다른 사례에 곧이 곧대로 대입하는 것은 위험하다. 시장의 사정도 다를 뿐더러, 논의 대상인 작품/작가가 처한 상황도 다르다. 가령 플랫폼의 하청노동자에 가까운 웹툰 창작자의 위치는 문화콘텐츠 저작권 관련 논의보단 플랫폼 노동의 측면에서 바라볼 때 문제점이 명확해진다.




1) https://ma-te-ri-al.online/19696961

2) https://ma-te-ri-al.notion.site/ma-te-ri-al/74e104f5dfeb421f9f348b733f4df443

3) 영화수입사들 OTT에 서비스 중단, 콘텐츠 정산 방식 논란 확산하나? https://www.hani.co.kr/arti/PRINT/956608.html

4) 2. 해적들의 도시 https://ma-te-ri-al.notion.site/2-f50f5f2c3e244a5eb5c4167c10e15e54

5) 비공식 유통되며 '전설'된 영화, 대체 어떻길래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847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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