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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05. 2022

신정원 감독에 관한 메모

 어제 부산 무사이에서 진행한 신정원 감독 1주기 추모 상영회에서 토크를 하고 돌아왔다. <시실리 2km>를 큰 화면으로 본 것도 처음이었고, 다른 지역의 커뮤니티 시네마에서 활동하고 계신 분들을 만날 수 있어서 즐거웠다. 토크 중 금동현 씨가 “신정원을 추모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의 영화들이 어떻게 기억될지 혹은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저 이야기에 나는 남기남이나 고영남 같은 한국의 (쓰레기 영화 혹은 쿠소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장르영화 감독들이 기억되는 방식을 이야기했는데, 신정원은 약간 다른 방법이 필요해보인다. 아래는 토크를 준비하며 메모처럼 적은 신정원 감독에 관한 생각.


 나는 지금 <차우>의 첫 장면을 생각하고 있다. 거대 맷돼지가 파먹은 무덤가로 빨려들어가듯 굴러 떨어지는 경찰들. <살인의 추억> 속 유명한 논두렁 롱테이크 장면의 패러디처럼 다가오는 이 장면에서 경찰들은 총 4번이나 무덤 구덩이에 빠진다. 몇 장면 넘어가서, 주말농장을 운영하는 사업가와 이장이 술을 마시는 장면을 보자. 이 장면의 첫 쇼트는 메기탕을 가져오는 점원의 모습이다. 펄떡이는 메기가 바닥에 떨어졌음에도, 그는 태연하게 메기를 집어 전골냄비에 다시 집어 넣는다. 이후의 장면에서 메기가 펄떡이며 사방에 국물을 튀기는 모습이 세 차례 정도 반복된다. 신정원의 코미디 루틴은 이런 방식이다. 같은 요소를 관객이 웃을 때까지 반복하기, 혹은 그렇게 반복되는 상황 자체를 코미디화하기.


 이 반복을 조금 더 큰 틀에서 볼 필요가 있다. 신정원의 데뷔작 <시실리 2km>는 2004년에 개봉했다. 2000년대 초반의 한국영화는 <친구>나 <말죽거리 잔혹사> 같은 조폭물, <조폭 마누라>와 <가문의 영광>으로 대표되는 조폭 코미디들이 흥행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장화, 홍련>, <지구를 지켜라!> 등으로 대표되는 '2003년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시기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정원이 들고나온 데뷔작 <시실리 2km>는 농촌을 배경으로 한 조폭 코미디의 탈을 쓴 호러 코미디...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당시 조폭물과 조폭 코미디는 과거 일본 찬바라물과 홍콩 누아르의 영향을 받았던 '협객물'이 90년대 임권택의 <장군의 아들> 시리즈로 막을 내리자 등장한 마지막 한방 혹은 패러디였다. 2010년대의 조폭물(<신세계>, <범죄와의 전쟁>)은 '협객물'의 대과거를 직접 차용하거나, 아에 주인공을 검사, 정치인, 변호사, 경찰(<내부자들>, <부당거래>, <베테랑>, <불한당>, <아수라> 등) 등으로 옮겨갔다. 그 사이에 끼어 있다고 보여지는 <시실리 2km>는 '패러디의 패러디'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문의 영광> 시리즈를 포함해) <마파도>부터 <육혈포 강도단>까지 김수미 배우가 출연한 영화들이 스스로를 패러디하는 것을 넘어 자가복제로 인해 무너지고 있을 때, <시실리 2km>는 다른 양념을 첨가한 패러디로 나아간다. 


 물론 신정원 감독 또한 과거의 영화들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류승완, 김지운, 김용화, 임필성 등은 물론, 그를 영화계에 입문시킨 윤제균이 그랬던 것처럼 그 또한 할리우드 키드다. <차우>의 전체적인 플롯은 <죠스>를, <점쟁이들>은 <빅 트러블 인 리틀 차이나>와 같은 존 카펜터의 소동극을,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은 제목부터 조지 A. 로메로에게서 빌려오고 있다. 하지만 다른 감독들이 할리우드적인 것을 한국화하는 것에 힘썼다면 - 이를테면 만주물과 서부극 사이의 기묘한 종합을 보여주는 류승완의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라던가, 괴수물을 한국에 성공적으로 번안해낸 봉준호의 <괴물>, 재난영화가 한국에서도 가능함을 보여주고자 특유의 '신파 플롯'을 개발해낸 <해운대>의 윤제균 같은 사례들 – 신정원은 할리우드 영화의 구조 위에서 한국영화를 패러디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할리우드를 한국화’하는 것이 아니라, ‘할리우드 라는 틀 위에 한국영화를 올려보기’를 선보이는 것이다.


 <차우>에서 ‘차우’가 주말농장을 습격하는 장면이 <괴물>의 한강공원 습격을 연상시키는 것과함께, 안타깝게도 유작이 되어버린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의 첫 장면은 그러한 패러디의 한 순간을 보여준다. 너무나도 PPL 같아 보이는 영화의 두 번째 장면을 떠올려보자. 소희(이정현)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던 만길(김성오)는 ‘마린’이라는 음성인식 AI를 불러 레시피를 보여달라 한다. 냉장고의 액정 화면에 레시피가 등장하고, 두 사람은 맛있는 아침식사를 한다. 한국 드라마에서 익숙하게 보던 PPL의 패턴이 이 영화의 초반에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마린’이라는 이름의 AI 서비스가 없다는 것이다. 신정원은 PPL로써 연출된 장면들을 패러디하고, 더 나아가 ‘마린’이 스타일러에 감춰둔 닥터 장(양동근)의 ‘기절한 시체’가 들어 있음을 폭로하는 상황까지 끌고 나간다. 신정원의 ‘뇌절하는 코미디’ 스타일은 한국영화 혹은 한국의 영상콘텐츠 전반에 관한 패러디를 반복하고 양식화하는 것에 있다. 신정원의 영화 중 할리우드 레퍼런스가 가장 두드러지는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한국영화로 뇌절하는 스타일을 이전에 비해 완성도 있게 끌어올렸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방식의 코미디는 신정원뿐 아니라 <달콤, 살벌한 연인>과 <이층의 악당>의 손재곤 또한 선보여왔다 하지만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과 비슷한 시기 개봉한 <해치지않아>는 그가 그 스타일을 내려놓았음을, 혹은 손재곤과 신정원이 유사한 스타일의 코미디를 구사함에도 그 재료가 완전히 다른 방향성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신정원이 이러한 작업을 통해 한국영화에 관한 메타-비평 같은 것을 시도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한국영화의 돌출된 부분을 극단적으로 강화하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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