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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18. 2022

연기라는 우연이 만들어내는 순간

<우연과 상상> 하마구치 류스케 2021

*본 원고는 팟캐스트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의 방송을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우연은 내게 늘 흥미로운 주제였다. 우연을 묘사한다는 건, 현실에 바탕을 둔 존재보다는 희귀성이 세계의 본질이라고 보는 거다.”라고 하마구치 류스케는 말합니다. 이는 <우연과 상상>이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라는 말은 당연히 아닐 겁니다. 하마구치의 저 말은 <드라이브 마이 카> 속 대본 리딩 장면, 하마구치가 실제 대본 리딩에서 “감정을 빼고 대본을 읽으라” 주문하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대사가 배우의 입에서 자동으로 나올 때까지 감정을 빼고 대본을 반복하여 읽게 하는 것이죠. 현장에서는 별 다른 디렉션 없이 배우가 이끌리는 대로 연기하게끔 합니다. 우연은 여기서 발생합니다. 하마구치의 글에서 출발한 영화지만, <우연과 상상>을 가능케 한 것은 “배우의 연기”라는 우연입니다. 

 하마구치는 또한 “연기를 한다는 것은 곧, 사회적으로는 소위 광기로 인식되는 다중 정체성을 갖는 것”라고 쓰고 있기도 합니다. 이건 <드라이브 마이 카>의 서울독립영화제 상영 때의 연출의도에 쓰여 있던 문장인데요. 최근 국내에 출간된 저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의 서문에서는 <해피 아워>의 배우들에 관해 “대본에 쓰인 대사를 외워서 말하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람이 아니다.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며, 이는 너무도 쉽게 드러난다.”고 쓰고 있기도 하죠. 그의 말대로 영화 속 배우는 다중 정체성을 갖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우연과 상상> 속 캐릭터들도 모종의 다중 정체성을 갖고 행동한다는 것인데요. 1부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의 메이코는 츠구미와의 대화 내내 자신이 카즈아키의 전 애인이라는 것을 감추고, 2부 “문은 열어둔 채로”의 나오는 모종의 음모를 품고 세가와 교수를 만나고, 3부 “다시 한번”의 아야는 나츠코가 자신을 다른 사람과 착각했다는 사실을 숨깁니다. 이들이 숨기고 있는 것이 드러나는 각각의 순간은, 다시 하마구치의 말을 빌리자면 “연기가 부서지기 쉬운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앞의 문장에서 제가 빼먹은 단어가 있는데요. 하마구치는 연기에 대한 위와 같은 사실을 정확히 투영하는 것이 카메라라 말합니다. <우연과 상상>은 수많은 대화로, 다시 말해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를 오가는 숏들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한 대의 카메라만 사용한 영화입니다. 이는 한 번의 연기를 무수한 숏들로 쪼개는 효율적인 촬영방식과도 다릅니다. <우연과 상상>에 관한 하마구치의 방식은 한 번에 하나의 연기만 담아내는 하나의 카메라를 통해 배우가 만들어내는 우연을 담아냅니다. 두 사람의 대화장면을 통해 지속되던 “배우의 연기”라는 우연은 어느 순간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갑니다. 저는 그 순간들이 각 배우들의 정면숏이라 생각하는데요. <해피 아워>나 <아사코>에서도 볼 수 있었던 이 정면숏들은 배우-캐릭터의 가장 명확한 초상을 담아냄과 동시에, 그럼으로써 배우-캐릭터가 지닌 “다중 정체성”을 벗겨냅니다. 우연이 발생되는 순간에서 배우-캐릭터를 떼어와 제시한다고나 할까요?

 어쩌면 저번 달에 다룬 <소설가의 영화>에서의 김민희의 모습과 비슷한 느낌인데요. 그 지점에서 홍상수가 다루는 영화와 하마구치가 다루는 영화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시 <우연과 상상>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하마구치는 <해피 아워>부터 이 영화에 이르기까지 유사한 작업들을 이어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중 정체성을 가진 캐릭터를 고쳐 말하자면 일종의 분열증을 갖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연과 상상>의 하마구치는 그러한 다중정체성, 일종의 분열증이 권장되는 작금의 상황을, 연기라는 우연이 만들어내는 순간들로 돌파해보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세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각각의 주인공은, 다양한 가면을 돌려쓰는 단일한 자신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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