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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21. 2022

액정-시점숏에 관해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스포일러 포함


 <헤어질 결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이미지는 시점숏이다. 박찬욱의 여러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 영화 또한 다수의 시점숏이 등장한다. 그것은 의심과 확신 사이를 넘나드는 계략이기도, 관음증적으로 대상을 탐닉하는 시선이기도 했다. 물론 <헤어질 결심>의 해준(박해일)과 서래(탕웨이) 사이에서 오가는 시점숏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흥미를 끄는 것은 사물의 시점숏이다. 이를테면 절벽 아래의 시체가 절벽 위의 형사 해준을 바라보는 숏, 벽에 붙은 사진 속 눈이 서래를 바라보는 듯한 숏 같은 것. 다만 이러한 숏들도 대단히 특별한 것은 아니다. 영화 속 여러 사물의 시점숏 중에서도 흥미로운 것은 액정 화면의 시점숏이다.

 액정화면의 시점숏이 무슨 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다. 말 그대로 액정 화면의 시점에서 비춰진 숏들이다. 액정의 형태는 다양하다. 아이폰, 애플워치, 병원의 모니터 등등. 박찬욱의 주요 레퍼런스 중 하나인 <이창>의 시점숏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잠시 떠올려보자. 다리에 깁스를 한 사진작가는 망원경으로 창문 건너편의 아파트를 관찰하고, 그곳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으며, 자신을 대리해 사건에 개입한 애인을 노리는 범인을 목격하는 것 또한 사진작가의 망원경-시점숏이다. 이 시점숏은 관음증적임과 동시에, 범죄행각에 대해서 전지적 3인칭의 성격을 지닌다. <헤어질 결심>의 액정-시점숏이 그것에 해당한다.

 형사인 해준은 애플워치의 녹음기능을 통해 사건 관련 정보를 기록한다. 습관적으로 녹음기능을 사용하는 그의 목소리는 종종 사건 정보를 넘어 수사 대상에 관한 개인적인 사견을 옮기기도 한다. 수사 과정 중에 해준과 서래가 가까워짐에 따라, 서래 또한 해준의 습관을 따라 하게 된다. 어느새 서래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애플워치에 녹음하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구성하는 각종 스마트기기는 이 영화의 주요한 장치들이다. 간병인으로 일하는 서래가 돌봄노동을 제공하는 할머니는 아이폰의 시리 기능을 사용해 영화의 모티프가 된 정훈희의 노래 ‘안개’를 재생한다. 스마트폰의 운동기록 기능이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주요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한국어에 서툰 서래의 중국어는 구글번역기의 음성번역 기능이 대리해준다. 해준의 파트너 수완은 죽은 서래의 남편이 고가의 무선 이어폰을 사용하고 있음을 굳이 언급한다. 두 사람이 수사 중에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는 장면을 유달리 자주 보여주기도 한다. 해준이 서래의 알리바이를 역으로 추적하는 과정에서 동원된 것은 서래의 남편이 남긴 유튜브 브이로그다. 포항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2부(딱히 챕터를 나누지는 않지만 명확한 구분점이 존재한다)에서 서래의 남편을 쫓던 빚쟁이는 몰래 깔아 둔 스마트폰 위치추적 앱을 사용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헤어질 결심> 속 스마트기기는 단순히 인물들의 활동을 보조하는 도구를 넘어선다. 스마트기기가 구성하는 개인화된 네트워크들은 알리바이의 증명과 반박 같은 장르적 활용을 넘어, 해준과 서래 두 인물의 정동을 매개하는 매체가 된다. 따라서 <이창>의 망원경-시점숏이 망원경 뒤의 사진작가를 염두에 둔 일종의 관음증적인 영화 작가론으로써 기능한다면, <헤어질 결심>의 액정-시점숏은 스마트기기에 기록되고 저장된 이미지/사운드/텍스트는 두 주인공 사이에 오가는 의심과 애정의 전말을 마치 제3자의 입장에 서 있는 것 마냥 담아낸다. 그렇기에 1부에서 해준이 쌍안경으로 서래의 집을 들여다볼 때 그가 물리적으로 서래 옆에 있는 것처럼 묘사되던 장면에서는 쌍안경-시점숏의 주인이 해준임을 명확히 보여주지만, 액정-시점숏들에서는 시점숏의 주인인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 시점숏의 주인은 오롯이 스마트기기다.

 박찬욱과 정서경은 전통적인 치정 멜로를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히치콕부터 샤브롤, 르네 클레망의 영화들은 물론 필름 누아르 황금기의 범죄-멜로 영화들을 연상시키는 <헤어질 결심>의 이야기는 그것을 충실히 따른다.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본다면 전형적이고 익숙한 플롯이다. 사랑에 빠진 형사가 팜므파탈인 여성의 범죄를 밝혀내는 데 실패하고, 이후 재회한 둘이 파국을 맞이하는 것. 칸 영화제에서의 여러 평가처럼 <헤어질 결심>이 기존의 박찬욱 영화와 다르다면, 물론 촬영감독의 변화도 크겠지만, 그것은 정동의 그릇을 캐릭터가 아닌 스마트기기의 개인화된 네트워크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이 네트워크는 기기를 소유한 사람만이 공유가 가능하다. 배타적인 네트워크는 그것의 소유자가 공유를 허락했을 때만 바깥으로 송출된다. 해준은 자신도 모르게 사랑을 고백했고, 서래의 네트워크는 그것을 기록하고 있다. 1부에서 해준을 바라보던 액정-시점숏이 서래가 숨겨온 사건의 전말 자체라면, 2부의 액정-시점숏은 해준에 대한 서래의 감정 자체다.

 1부에서 해준과 서래의 시점숏이 맞부딪히는 것은 애정의 확신 자체다. 서래가 남편을 살해했다는 것을 알게 된 해준이 서래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은 마주치지 않는다. 2부에서 두 사람의 시점숏의 부딪힘은 불신과 애정의 부딪힘이다. 해준은 영화의 마지막까지 1부에서와 같은 시선의 교환을 얻지 못한다. 서래 대신 그와 시선을 교환하는 것은 서래와의 문자와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스마트폰의 액정이다. 액정-시점숏의 주체인 개인화된 네트워크는 범죄를 해결할 객관적 증거의 매체임을 넘어, 각자가 발화하지 못하는 혹은 말했으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담아내는 정동의 판도라 상자다. 단순히 과거의 말을 반복하는 자동응답기의 기능 이상으로, 이 영화 속 스마트기기는 기록하고, 상기시키고, 설득한다. 영화에서 시점을 소유한다는 점은 그 소유자가 영화 속 캐릭터임을 환기함과 동시에, 시선에 들어온 대상에 관한 정동을 숏 자체에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어쩌면 <헤어질 결심>의 액정-시점숏들은, <스파이의 아내>의 필름, <언컷 젬스>의 원석, <드라이브 마이 카>의 카세트 테이프 같은 것들, 모종의 진실과 진실된 정동을 내포하고 있는 비인간 존재들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헤어질 결심>이 언급한 작품들만큼 걸작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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