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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17. 2022

가스라이팅 연대기

<멘> 알렉스 가랜드 2022

*스포일러 포함


 최초의 가스라이팅은 성서 속 이브의 이야기다. 그는 선악과를 먹었다는 이유로 원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하느님의 처벌에 따라 출산을 하게 된 이브와 후대의 여성들은 그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이어지는 여성혐오의 역사 속에 놓이게 된다.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1944년 영화 <가스등> 이후이지만, 가스라이팅이라는 학대행위 자체는 오랜 시간 인류사에 새겨져 있었다. <멘>에서 하퍼(제시 버클리)가 2주간 머물 전원 저택에 방문했을 때 사과를 하나 따먹고, 집주인인 제프리(로리 키니어)가 선악과에 관한 농담을 던지는 것은 이를 드러내는 단적인 예시다. <멘>은 가스라이팅이 어떻게 여성혐오적 학대행위로 작동해왔는지를 보여준다. 단순히 하나의 예시로서 하퍼의 이야기를 가져오는 것을 넘어, 가스라이팅이라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여성혐오가 인류사를 어떻게 구성해왔는지 압축하여 보여주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하퍼는 왜 시골 마을에서 휴가를 보내고자 했는가? 영화는 첫 장면에서 하퍼의 남편 제임스(파파 에시두)가 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 이전의 과정을 여러 플래시백으로 나누어 보여준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여주거나 들려주진 않지만, 두 사람의 싸움이 등장하는 첫 플래시백만으로 과거를 짐작할 수 있다. 제임스는 이혼을 요구하는 하퍼에게 자신의 목숨으로 상대방을 협박하는, 최근의 한국에서도 수차례 있어온 전형적인 가스라이팅-협박을 벌이고 있다. 하퍼의 반응으로 짐작하건대, 그러한 상황은 수차례 반복되어 왔을 것이다. 오죽하면 하퍼가 “우리가 이혼하는 이유”가 그러한 가스라이팅-협박이라고 반박하기도 한다. 결국 제임스는 추락사한다. 이것이 자실인지 실족사인지 알 방법은 없다. 제임스는 죽었고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사실 그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마을 교회의 신부가 그 이야기를 꺼내며 하퍼가 제임스를 몰아붙인 것 아니냐고 묻자 욕을 하며 자리를 뜨는 모습에서, 제임스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하퍼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제임스가 죽었다는 상황 자체가 타인들로 하여금 하퍼를 향한 가스라이팅을 행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제임스의 죽음은 그 자체로 협박이 되었다. 

 시골에 내려간 첫날, 하퍼는 산책 중에 나체의 남자를 마주한다. 그날 밤, 나체의 남자는 하퍼가 머무는 저택에 접근한다. 하퍼는 경찰에 신고하고 경찰은 그를 체포한다. 하지만 진술을 받는 경찰은 그가 순순히 붙잡혔다며 위협적이지 않은 인물이라 말하고, 다음 날 펍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 경찰은 그가 무혐의이기에 풀어주었다고 말한다. 그를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듯이 말이다. 하퍼는 그날 마침 마릴린 먼로 가면을 쓴 소년에게 “멍청한 년”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신부에게 “제임스의 죽음은 너의 책임”이라는 말을 들은 참이다. 게다가 그날 밤 풀려난 나체의 남성은 다시 하퍼를 찾는다. 이 과정에서 생략한 묘사가 하나 있다. 영화 속 등장한 남성들의 얼굴이다. 제임스를 제외한 영화의 모든 남성들은 제프리를 연기한 배우 로리 키니어의 얼굴을 하고 있다. 소년의 경우엔 다른 배우가 연기한 몸에 키니어의 얼굴을 합성하였다. 제프리, 소년, 신부, 펍의 주인, 펍의 두 손님, 경찰, 나체의 남성까지 모든 남성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영화의 예고편만 봐도 감지할 수 있는 이상함을 하퍼는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행동한다. 

 어쩌면 그들의 얼굴은 하퍼에게 중요한 이슈가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남성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사태가 하퍼에겐 벌어지지 않고 <멘>의 관객에게만 일어나는 것이라 가정해보자. 하퍼에겐 이상하지만 친절한 집주인이었던 제프리를 비롯한 영화 속 남성들과 대면하고 말을 나누기 전까지 그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아니 잠재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이라는 생각을 할지라도 그것을 드러낼 수 없다. 하지만 관객은 그들이 위협임을 즉각 감지할 수 있다. 그들은 하퍼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그에 준하는 언행을 저지른 얼굴임을 이미지로 인식하게 된다. 때문에 하퍼와 관객 사이에 마을의 남성들이 영화의 제목이 지시하는 하나의 군집임을 인식하는 데 시차가 발생한다.

 이 시차는 무엇을 반영하는가? 가스라이팅은 피해자가 자신이 피해자임을 인식하지 못하게끔 몰아붙인다. 더 나아가 자신이 학대당하고 있음을 의심하는 것조차 가스라이팅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 된다. 제임스가 하퍼를 정신적으로 학대하던 와중에, 제임스는 하퍼의 스마트폰을 뺐고 친구에게 제임스가 무섭다고 문자를 보낸 사실을 추궁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도 네가 무서워” 해당 장면을 본 관객이라면 알겠지만, 이는 두려움의 언어가 아니라 협박의 언어다. 부부 사이의 젠더적 위계가 존재하는 와중에 쏟아낸 저러한 언행은 자신의 위치가 피해자와 같다고 주장하는 가스라이팅의 언어다. 하퍼는 그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에 맞선다. 제임스의 죽음은 제임스가 택할 수 있는 최후의 가스라이팅 수단이다. 앞서 언급한 시차는 이 수단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하퍼는 남성들이 먼저 위협적인 언행을 저지르기 전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다. 그랬다면 하퍼는 즉각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하퍼에게 자신과 게임을 해주지 않는다고 “멍청한 년”이라 말했던 소년은 마릴린 먼로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마릴린 먼로가 누구인가? 백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스튜디오와 언론으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했던, 카메라 앞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자신의 다른 모습을 감추어야만 했던 대표적인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다. 영화 후반부 그 가면을 모욕하고 있는 소년의 행동은 가스라이팅이 작동하는 사회적 구조, 이를테면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행위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소년은, ‘남성들(men)’의 얼굴을 피해자의 가면 뒤에 숨기고 있었다. 

 영화 후반부 등장하는, 나체의 남성으로부터 시작되는 같은 얼굴을 한 남성이 다른 남성을 출산하는 장면은 어떤 구조의 완성이다. 남성이 낳는 것은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다른 남성, 자신의 학대행위에 연속성을 가져 줄 남성이다. 그것은 맨박스(Man Box)의 자기파괴적인 마트료시카다. 인류가 종교, 신화, 법과 제도의 힘을 빌어 만들어 온 여성혐오적 가스라이팅의 압축이다. 다만 영화의 엔딩, 그러니까 마지막 남성의 신체를 가르고 태어난 남성이 제임스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은 지금까지 서술한 관점을 전복시켜버릴 수 있다. 그것이 여성이 지닌 트라우마, 정확히 말하자면 프로이트가 정의한 히스테리라는 것으로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멘>의 엔딩이 열어 둔 오독의 가능성은, 어찌 보면 일종의 리트머스지처럼 작동할 수도 있다. 히스테리가 자궁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히스테라(Hystera)에서 유래되었음을 들먹이며 모든 것이 하퍼의 트라우마가 발현된 것임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영화의 타이틀이 뜬 이후의 장면을 머릿속에서 삭제했을 것이다. 하퍼가 무엇과 맞서고 있었는지 그 흔적을 보여주는 그 장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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