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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Oct 12. 2022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후기

<와서 직접 봐봐> 호나스 트루에바 2022

마드리드에서 살아가는 한 커플이 시골로 이사 간 다른 커플을 만나러 간다. 이 영화는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을 담아낸다. 영화 상영 전 주연배우 잇사소 아라나의 인사영상은 이 영화가 팬데믹의 경험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2020년 연말과 그로부터 6개월 뒤라는 시간적 배경을 제시한다. 길거리 장면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들로 가능하다. 네 사람이 시골에서 보내는 시간은 평범하다. 이야기를 나누고, 산책을 하고, 탁구를 치는 등이 이어진다. 얼핏 작년 부산영화제 상영작인 <트스거오 다이어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모린 파젠데이로와 미겔 고미쉬의 기획이 팬데믹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면, 호나스 트루에바는 그 시간을 '이미 지나간 과거'로 만드려는 것만 같다. 8mm 필름으로 촬영된, 영화의 촬영현장 저전체와 시골의 풍경 등을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의 지향을 보여준다. 다만 그 방식이 다소 뻔하게 다가왔다는 점이 흠이지만.

<EO> 예르지 스콜리모브스키 2022

이오는 영화의 주인공인 당나귀의 이름이다. 서커스단에서 일하던 이오는 동물권 단체의 시위와 서커스단의 파산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 영화는 승마장, 농장, 동물보호소, 야생동물 불법거래단 등을 거치고, 시위대, 공무원, 소방관, 서커스단원, 다운증후군 환자들, 훌리건, 트럭운전수, 의문의 부자 등을 만나는 이오의 여정을 따라간다.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를 느슨하게 리메이크한 것만 같은 이 영화는 모든 인공적인 산물을 혐오하는 것만 같다. 그것은 불법동물거래소나 서커스단, 농장처럼 실체가 있는 장소일 수도, 시위대나 축구팀과 같은 집단일 수도, 법, 제도, 동물권 등의 관념일 수도 있다. 물론 동물권 앞에는 '인간 사고의 산물'이라는 것이 붙어야 겠지만. 영화 속에서 이오는 다양한 방식으로 대상화된다. 그것은 그가 말을 할 수 없는 비인간 동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의사표현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는 이오의 모습은 그것을 빗겨간다. 아니, 빗겨가려 한다. "빗겨가려 한다"라고 말한 이유는 결국 이오를 담아내는 것 또한 인공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핸드헬드, 클로즈업, 몸에 부착된 카메라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오의 여정을 쫓던 카메라는 종종 이오(혹은 주변의 인간들)을 완전히 벗어난다. 난데없이 등장한 뒤집힌 스키 장면이나 붉은 숲을 드론으로 보여주다 풍력발전기의 회전에 맞추어 회전하는 움직임, 혹은 댐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역재생으로 보여주는 것 등이다. 이러한 카메라의 움직임 혹은 이미지에 가한 조작은 카메라 자체의 인공성을 극대화한다. 과장된 붉은 조명과 음악이 동원된 서커스 장면에서 시작한 이 영화는 영화가 근본적으로 지닌 인공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벗어날 수 없음을 스스로 시인한다. 다시 말해, <EO>는 어떤 식으로도 이오를 대상화할 수밖에 없음을 자백하는 영화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오는 공장식 축산농가의 소떼와 함께 어디론가 향한다. <옥자>나 공장식 축산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으레 보았던 동물의 행렬 속에 이오가 뒤섞인 채 영화가 끝난다. 이는 영화라는 인공은 언제나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인공이 아닌 것에 배패할 수밖에 없다는 노장의 자기고백이다.

<슈퍼에이트 시절> 아니 에르노, 다비드 에르노-브리오 2022

때마침 아니 에르노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발표된 날 보게 된 (참고로 그의 책을 읽어보진 못했다) 그의 첫 연출작은, 1972년부터 1982년 사이 그의 남편 필립 에르노가 슈퍼8 카메라로 촬영한 홈비디오 영상으로 채워져 있다. 아니 에르노가 아들 다비드와 함께 연출한 이 영화는 과거의 홈비디오 영상을 통해 프랑스 중산층 가족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프랑스 뿐 아니라 스페인, 소련 등 곳곳의 휴양지를 찾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등 다양한 시간을 보내는 가족의 모습이 아니 에르노의 내레이션과 함께 이어진다. 프로그램노트에 따르면 ‘한 가족의 아카이브일 뿐 아니라 1968년 이후 10년 동안의 여가 생활, 삶의 방식, 중산층의 꿈 등에 대한 증언′이라고 아니 에르노는 이 영화를 소개했다고 말한다. 가족이 소련 휴양지를 찾는 장면에서 느끼는 부르주아 계층 가족의 자의식이라던가, 카메라를 남편이 들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내레이션과 같은 부분은 그것에 충실해 보인다. 아니 에르노가 소설가로서 입지를 다지는 동안 남편과의 사이가 벌어지고, 한 가족은 서로 흩어지게 된다. 영화는 아니 에르노의 개인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상황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이를 통해 무엇을 볼 수 있을까? 혹은 무엇을 더 생각할 수 있을까? 아니 에르노의 작품세계에 관한 작가 본인의 주석이라고 한다면 납득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의 것을 발견하기엔 연도순으로 나열된 홈비디오의 연속은 그저 한 가족을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내가 꿈꾸는 나라> 파트리시오 구즈만 2022

영화는 "구즈만의 첫 영화 <첫 해>의 푸티지로 시작한다. 살바도르 아옌데를 보며 환호하는 칠레 민중의 모습이 담겨 있다. 구즈만은 크리스 마르케가 그 영화를 마음에 들어 했으며, 프랑스에 배급하는 것에 도움을 주었음을 언급하며 영화를 시작한다. 오랜만에 칠레를 찾은 그가 마주한 것은 거리의 돌들이다. 최루탄과 고무탄, 살수차 등으로 무장한 경찰에 맞서기 위해 시위대가 부순 길바닥의 잔해들이다. 구즈만의 전작 <꿈의 안데스>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돌들이다. 그는 세 편의 전작(<빛을 향한 노스탤지어>, <자개 단추>, <꿈의 안데스>)를 통해 피노체트 군부정권 하에서 진행된 투쟁을 되짚어 보았다. <내가 꿈꾸는 나라>는 2019년 10월 18일 시작되어 현재도 진행중인 새로운 혁명에 관한 이야기다. 구즈만은 자신이 목격한 칠레의 두 번째 혁명에서 일종의 데자뷔를 느낀다. 길바닥에 돌들, 무장한 경찰들, 길거리에 배치된 군인들, 그리고 무수한 군중들. 이 데자뷔에서 구즈만은 1970년대외 2020년대 사이의 차이를 하나씩 찾아간다. 우선 이 영화의 모든 인터뷰이는 여성이다. 언어학자, 영화인, 대학생, 사진작가, 체스 기사, 음악가 등 다양한 직업군의 여성들은 이번 혁명의 의의를 각자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보수적인 칠레의 문화를 철폐하고자, 신자유주의와 가부장제와 여성, 사회적 소수자, 노동자, 농민, 원주민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정치를 철폐하고자 이들은 거리로 나섰다. 백만이 넘는 인파가 몰린 광경이나 수많은 여성이 성폭력과 성차별에 반대하며 군무를 추는 광경은 엄청난 폭발력을 보여준다. 다만 이 폭발력은 피노체트 정권을 타파하고자 거리로 나섰던 이들이 동일한 목표로 모였던 것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구즈만이 이 영화에서 여성만을 인터뷰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의 목표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지 않는다. 이번 혁명에 참여한 이들의 이데올로기는 "차별과 배제의 철폐"와 같은 모호한 것에 가깝다. 마침내 자신이 꿈꾸던 나라에 가까워진 칠레의 모습을 목격하는 구즈만의 내레이션과 시선은 그가 느꼈을 감격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물론 한 인터뷰이의 말처럼, 그것은 실패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새로운 헌법 제정에 실패할 수도, 선거에서 극우파가 득세할 수도 있다. 하나로 조직되지 않은, 지도부도 이데올로기도 통일된 의제도 없는 투쟁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영화를 보는 내내 절반의 성공을 거둔 2016년 이후의 한국을 떠올리게 된다. 구즈먼은 이번 영화의 제목을 "My Imaginary Country"라 지었다. 그가 꿈꾸는 나라는 완수된 과거의 것도, 완수될 것이라 예측하기도 어려운 지향점이다. 70년대의 '칠레 전투'를 지켜보았던 구즈먼은 여전히 새로운 칠레를 꿈꾸고 카메라에 희망을 담아내려 한다. 언제든 절망으로 바뀔 수 있는 희망일지라도, 구즈먼의 카메라는 희망의 모호한 실체를 찍는다. 영화의 엔드크레딧에는 <칠레 전투>에 나왔던 칠레 민중의 모습이 등장한다. 동일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당시의 이미지는 영화 내내 그와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던 2020년대 칠레 민중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단지 이미지에 담긴 이들의 모습이 변화하였을 뿐이다. 구즈만이 꿈꾸는 나라는 도래할 수 있을까? 다가올 미래를 확신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구즈만이 40년 간 품어온 절망이 희망으로 변화하는 순간을, 이 영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실비아의 도시에서 찍은 사진들> 호세 루이스 게린 2007

이 영화는 얼핏 <실비아의 도시에서>를 위한 준비작업, 혹은 그 영화에 관한 주석처럼 느껴진다. 호세 루이스 게린이 해당 영화를 만들기 전 스트라스부르크를 어떻게 돌아다녔는지, 누구를 보았고 어떤 풍경을 목격했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가 <실비아의 도시에서 찍은 사진들>에 담겨 있다. <실비아의 도시에서>는 마치 보들레르가 [현대적 삶의 화가]에서 묘사했던 콘스탕탱 기스라는 도시 산보자를 연상시키는 영화였다. 한 남자가 예전에 보았던 것으로 착각한 한 여성을 따라가는, 실비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있는 도시에서의 세 밤을 담아낸 그 영화는 사람, 풍경, 소음, 대중교통, 음식, 상점 등 도시 자체에 관한 일종의 크로키였다. <실비아의 도시에서 찍은 사진들>은 자동기술법으로 담아낸 도시의 모습이다. 게린이 촬영한 도시의 풍경, 뒷모습, 낙서, 가게, 간판, 얼굴들은 게린의 행적을 따라 그의 카메라에 자동적으로 포착된다. 동시에 이 이미지의 나열, 내레이션이나 소리 없이 사진의 연속과 자막만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도시를 '자동적으로 포착하는' 카메라의 기능 뒤에서 셔터를 누르는 게린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단순히 스트라스부르크에 관한 다큐멘터리적 기록 이상의 것이 된다. 사진과 자막은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이는 도시를 거닐며 게린이 떠올린 어떤 이야기이다. 화자의 정체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 자막(마지막의 자막은 'he'라는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다)은 사진을 찍은 사람과 그것을 이 영화로 만든 사람이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를 심어준다. 영화는 마지막에서 이것이 다큐멘터리인지 픽션인지 불분명하다고 스스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때문에 이 영화는 <실비아의 도시에서>를 보충해주는 다큐멘터리적 기록일 수도, 그것과 평행하게 움직이는 전혀 다른 픽션일 수도 있다. 게린은 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도록 이 영화에서 무빙이미지와 사운드를 배제한다. 다만 그 가능성을 충분히 즐기기엔, 영화 전반에 깔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시선 자체의 찝찝함이 걸리지만.

<카메라퍼슨> 커스틴 존슨 2016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는 놀랍다. 카메라는 넓은 평원의 도로를 찍고 있다. 제작자 등의 크레딧이 화면 구석에 등장한다. 자막이 사라진 사이 멀리서 번개가 내리치고 천둥소리가 울린다. 커스틴 존슨과 영화의 제목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카메라를 잡은 사람이 기침하고 프레임이 함께 흔들린다. 이 장면은 카메라를 잡고 있는 사람을 한없이 강조한다. 카메라를 잡은 사람은 천둥번개에 놀라고, 그의 기침으로 인해 화면이 흔들리기도 한다. 영화에서 카메라를 든 사람은 좀처럼 의식되지 않는다. 물론 여러 액티비즘 다큐멘터리나 파운드 푸티지처럼 그것의 강조가 중심이 된 장르와 형식들이 있지만, 그것은 '대부분의 영화'는 아니다. <카메라퍼슨>은 오랜시간 여러 다큐멘터리의 촬영감독이었던 커스틴 존슨이 25년 동안 촬영한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큐멘터리에서 연출자와 구별된 촬영감독은 영화 내부에서 인식되기 어려운 존재다. <카메라퍼슨>은 그것을 뒤집는다. 미국, 나이지리아, 보스니아, 예멘 등 세계 곳곳에서 직접 촬영한 푸티지를 보여주는 영화의 절반은 베르토프의 키노-아이적인 시도처럼 다가온다. 이는 "Man with a Movie Camera"라는 베르토프 영화의 제목에 관한 하나의 반발로 다가온다. Camera'man'도 Camera'woman'도 아닌 Camera'person'이라는 영화의 제목은 카메라를 들고 무언가를 찍는 사람 자체에 관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커스틴 존슨은 카메라 앞에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촬영에 집중하느라 무언가에 부딪히고, 촬영장소를 옮기며 길바닥을 찍고, 카메라 렌즈를 닦는 이로 등장한다. 그의 카메라 앞에는 자크 데리다부터 전쟁 난민까지, 아프간의 감옥부터 감독의 집까지, 수많은 사람과 장소가 담긴다. 그 과정에서 커스틴 존슨은 (베르토프와 달리) 무엇이든 방부처리된 이미지로 만드는 카메라의 권능을 이야기하는 대신, 카메라 뒤의 자신과 카메라 앞의 대상 사이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한다. 커스틴 존슨의 카메라에 포착된 것은 지식, 전쟁, 평화, 가족, 죽음, 탄생, 유희, 토론, 파괴, 소멸임과 동시에 그 모든 것과 관계맺고 있는 자신이다. 'Cameraperson'은 프레임 속에 들어오지 않는 비가시적 존재로 이 영화 바깥에 존재하지만, 영화 내부의 모든 것과 관계함으로써 영화에 포함되는 존재다.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2007년 알츠하이머로 세상을 떠난 감독의 어미니가 등장하는 순간들은 그것을 다른 어떤 이미지보다 강하게 드러낸다. 샹탈 아커만이 집 없는 존재의 집이 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영화를 찍었다면(<노 홈 무비>), 커스틴 존슨의 기획은 영화 속 모든 이미지 뒷편에 있는 자신에 관한 영화(홈-무비)를 만들었다.

<은빛 수면, 시리아의 자화상> 오사마 모하메드, 위암 시마브 베디르산 2014

이 영화는 두 감독을 포함한 1,001명의 시리아인이 촬영한 영상들을 편집하여 만들어졌다. 2011년 시작된 시리아 내전의 참상이 영화 속 저화질 이미지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저성능의 휴대폰 카메라나 초기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된 영화의 영상들은 픽셀이 고스란히 노출되고 화면이 일렁이는 열악한 화면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리아 내전의 참상을, 시리아 민중에 대한 독재자의 탄압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오사마 모하메드는 계속하여 이 영상들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영화 속에서 말한다. 그의 바램대로 그 이미지들은 영화가 되어 시리아 바깥의 관객들에게 당도하고 있다. 영화의 절반은 프랑스로 망명한 오사마가 수집한 영상들의 몽타주로 구성되어 있다. 나머지 절반은 오사마가 페이스북을 통해 접촉한, 아직 시리아에 머물러 있는 위암 시마브 베디르산과의 대화-내레이션으로 구성된다. <라스트맨 인 알레포>나 <사마에게>와 같은, 시리아 내전에 휘말린 당사자들이 촬영한 여러 다큐멘터리가 그러했듯 이 영화 또한 스크린이라는 '은빛 수면' 위에 참상을 보여주는 것에 충실하다. 다만 이 영화는 영화가 좀 더 영화적인 무언가가 되었으면 하는 오사마 모하메드의 욕망으로 인해 어떤 괴리감을 갖게 된다. 1,001명의 시리아인이라는 숫자에서 느껴지듯 이 영화는 [천일야화]를 모티프로 삼지만, 이 모티프는 온전히 사용되지 못한다. 시리아에서 혁명학교 교사로 활동하는 위암 시마브 베디르산과의 대화에서 오사마가 종종 내비치는 무력감과 자괴감은 그가 말하던 영화와 맞닿지 못한다.

<스칼렛> 피에트로 마르첼로 2022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참전군인인 라파엘은 아내가 머물렀던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에 도착한다. 하지만 아내는 세상을 더났고, 어린 딸 쥘리에트만이 남아 있다. 외지인이기에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지만 훌륭한 목수인 그는 작게나마 일을 하기 시작한다. 라파엘과 쥘리에트는 그렇게 버겁지만 자유로운 삶을 이어간다. 쥘리에트는 자신이 주홍색 돛을 단 배에 납치당할 것이란 예언을 듣고, 어느 날 그의 앞에 주홍색 비행기 하나가 나타나게 된다.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신작 <스칼렛>은 알렉산드르 그린의 러시아 콩트 <스칼렛 세일즈>를 각색한 작품이다. <마틴 에덴>을 비롯한 전작들에서처럼 행군이나 과거의 풍경 등이 담긴 아카이브 푸티지를 등장시키며 영화가 전개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방법론은 <마틴 에덴>은 물론 <늑대의 입>이나 <상실과 아름다움>처럼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에 있던 전작들은 물론, 아카이브 푸티지가 대부분을 차지했던 다큐멘터리 <루치오를 찾아서>와도 어딘가 다르다. 앞선 작품들이 아카이브 영상들을 통해 극 중 인물들(그들이 아카이브 속 실존인물이든 마틴 에덴과 같은 픽션 속 인물이든 간에)이 역사 속으로 포섭되는 방식이었다면, <스칼렛>의 라파엘과 쥘리에트는 역사 위에서 인물 자신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때문에 인물과 역사가 영화 속에서 대립하며 영화의 레이어를 만들어냈던 전작들에 비해 <스칼렛>은 물 흐르듯이 흘러간다. 이것이 마르첼로의 새로운 영화적 국면일지, 프랑스와 프랑스어를 택한 만큼 잠깐의 외출일지는 모르겠다. 다만 영화의 유려함에 비해 그의 전작들만큼 흥미롭지는 않다.

<암화> 유달지, 두기봉 1998

세기말의 마카오, 카지노 경영권을 두고 두 조직이 대립하는 와중에 부패경찰 샘(양조위)은 그들의 대립 속에서 고군분투한다. <암화>는 샘이 겪은 하룻밤 동안의 일들이다. 두기봉 감독의 밀키웨이 프로덕션이 제작한 이 영화는 사실 썩 만듦새가 훌륭한 영화는 아니다. 촬영은 종종 어색하고, 액션이나 특수효과는 상황과 어긋나기도 한다. <암화>는 영화적 만듦새보단 샘이 휘말린 사건의 불분명함, 그리고 그것에 휘둘리는 한 사람에 집중하는 영화다. 마치 장기판 위의 버리는 말처럼 사용되는 샘과 수많은 인물들은 죽어나가기 위해 영화 속에 존재하는 것만 같다. 이 영화는 자신이 뒤집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어떤 사람의 발악을 담아낸다. 영화 후반부 거울이 가득한 창고에서 벌이는 액션 같은 인상적인 장면도 만나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이상의 재미나 흥미로움은 주지 못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미야케 쇼 2022

선천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 여성 복서의 실화를 각색한 작품이다. 주인공 케이코는 청인인 동생과 함께 살며, 낮에는 호텔에서 일하고 밤에는 복싱 훈련에 매진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귀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훈련은 물론 경기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지만, 케이코와 복싱장의 트레이너는 훈련과 경기 모두를 훌륭하게 해낸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복싱장이 운영의 어려움을 겪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체육관 회장의 건강도 악화된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케이코는 계속 복싱을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2020년 12월부터 2021년까지의 시간대를 담고 있는 이 영화는 얼핏 익숙한 휴먼 감동 드라마처럼 다가온다. 이를테면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운동선수의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미야케 쇼가 집중하는 것은 신파적 감동코드라기보단, 케이코와 체육관의 사람들이 보내는 시간 자체를 담아내는 것이다. 케이코가 트레이너와 미트 훈련을 하는 영화 초반부의 장면은 이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듣지 못하는 케이코의 속도에 함께하는 이들의 시간, 경쾌한 리듬으로 울리는 미트 소리 등은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영화 속 첫 경기가 끝난 후 회장은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케이코의 장점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재능은 없습니다. 리치도 짧고, 느리고. 하지만 솔직하고 정직합니다." 이 말은 케이코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회장이 자신과 체육관 트레이너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들의 장점, 혹은 재능은 솔직함과 정직함이다. 케이코와 함께 훈련하고 경기에 나가는 그들의 활동에서 다른 것은 없다. 어쩌면 케이코와 소통하는 그들의 모습은 극단적인 효율을 추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선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복싱만화 같은 것에서 보았던 그러한 인물상 말이다. 데뷔작 <플레이 백>부터 최근작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까지 미야케 쇼가 그려온 인물들은 꾸준히 그래왔던 것 같다. 자신이 다른 사람과 보내는 시간에 솔직하고 정직한 인물들. 때문에 미야케 쇼의 영화들은, 이번 영화에 대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코멘트 "흘러가는 시간을 부드럽게 필름에 정착시킨 걸작"에 걸맞는 것을 보여준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그것을 가장 훌륭히 해냈다.

<노 베어스> 자파르 파나히 2022

영화의 감독인 자파르 파나히는 현재 6년 형을 받고 구속되어 있다. 동료 감독을 위한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다. 이미 2010년 반정부 활동을 이유로 6년형과 20년 간의 영화제작 금지를 당한 이후에도 그는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택시>, <3개의 얼굴들> 등의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 왔다. 그가 구금되기 전 완성한 <노 베어스>는 그의 근작들처럼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에 서 있다. 국경지대의 한 마을에서 원격으로 영화를 촬영하는 자파르 파나히가, 국경마을의 전통과 연관된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번 영화 또한 <3개의 얼굴들>이나 <숨겨진>처럼 이란 시골지역에서 벌어지는 전통과 현재의 충돌을 담아냄과 동시에, '영화만들기'라는 행위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이어질 수 있음을 역설한다. 무엇보다 <노 베어스>는 국경지대라는 배경을 택함으로써 파나히 자신이 겪은 딜레마를 이야기한다. 단지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튀르키예 등으로 빠져나갈 수 있음에도 그는 왜 이란에 머물며 영화를 찍는 것일까? <노 베어스>는 이 곤란한 질문에 대한 파나히의 대답이다. '이란' 영화감독으로써 파나히는 계속해서 이란의 현재를 촬영한다. <노 베어스>는 그러한 그의 열망을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는 작품임과 동시에, 그의 근작 중 가장 비관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사갈> 이동우 2022

사갈은 뱀과 전갈이라는 뜻으로, ‘남을 해치거나 심한 혐오감을 주는 사람’을 뜻한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자막으로 시작해서 "이 영상이 내가 만드는 마지막 다큐멘터리였으면 좋겠다"는 자막으로 끝난다. 감독이 오랜만에 만난 영화과 동기인 박건호는 도박에 빠져 있는 사채업자다. 이 영화는 156분 동안 박건호와 그 주변 인물들의 끝없는 실패를 담아낸다. 사채업자라곤 하지만 그가 수금해야 하는 돈은 꽤나 작은 돈이다. 100만원 이하의 작은 돈들은 불법도박으로, 돌려막기로, 또 다른 샛길들로 사라진다. 이는 사채를 쓴 채무자 뿐 아니라 박건호 본인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그는 수금한 돈을 자신의 사업이나 빚을 갚기 위해 쓰기보단, 돈이 생기는 족족 불법도박에 사용한다. 그야말로 대책없는 상황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동우는 박건호가 빠진 무간지옥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전작 <셀프-포트레이트 2020>의 주인공이었던 이상열이 영화 촬영 이후 조울증이 심해지고 구치소를 들락거리며 살고 있음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다큐멘터리가 헛된 희망을 심어준 것 같다는 죄책감을 토로한다. 그는 자신이 <사갈>이라는 영화를 왜 찍고 있는지, 박건호를 왜 찍기로 하였는지, 그는 왜 자신을 찍어달라고 했는지 생각해내지 못한다. 그는 그저 끝없이 반복되는 빚과 도박의 악순환에 놓인 한 사람을 찍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이동우 자신이 자신의 영화에 대해 떠올린 생각과도 같다. 박건호에 대해 관객이 약간의 희망을 볼 때면, 카메라는 어김없이 다시 추락하는 그의 모습을 담아내고 보여준다. 이 영화는 그 지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대상과 자신에 관한, 한없이 솔직하고 끔찍한 자기반성이다. 이동우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이번 영화에서 그의 얼굴이나 목소리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사갈>의 이미지와 사운드에 이동우 감독 자신의 자리가 마련될 필요가 없다. 대신 그는 자막을 통해 말한다. 카메라가 향하고 있는 대상과 자신이 우정의 동행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자신의 판단을, 카메라를 통해 비극의 연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남기는 질문이 영화가 끝난 뒤에 맴돌고 있다.

<인체해부도> 베레나 파라벨, 루시엔 카스탱-테일러 2022

하버드감각민속지연구소의 두 감독은 고프로를 아일랜드 어부들의 몸과 어선에 부착하거나(<리바이어던>), 여성을 강간 살해하고 인육을 먹은 살인마의 얼굴을 집착적으로 클로즈업 했다(<카니바>). 그들의 신작인 <인체해부도>는 파리의 있는 병원을 찾는다. 경찰이나 구급대원도 등장하고, 간호사나 의사 등이 등장한다. 얼핏 프레데릭 와이즈먼의 <병원> 같은 작품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두 감독이 집중하는 것은 병원이라는 장소를 둘러싼 법과 제도, 직업과 윤리, 공동체 등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인체해부도>는 제목 그대로 인체를 탐구하려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인체를 하나의 풍경으로, 풍경의 가장 극단적인 한 사례로 소환려 한다. 뇌수술, 척추수술, 각막수술, 전립선수술, 제왕절개 등 다양한 신체 부위의 수술 장면이 등장하고, 극단적인 줌인이나 통해 인체 내부에까지 들어가는 초소형카메라 등을 통해 신체를 거대한 스크린 위에 확대하여 보여준다.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살아 움직이는 뇌, 매스로 배를 째고 아기를 꺼내는 장면, 태반과 탯줄, 안구를 찌르는 바늘, 절개된 유방, 훤히 드러난 척추, 영안실의 시체와 같은 것들이다. 엑스레이나 MRI를 통해 인체를 간접적으로 들여다 보는 것도, 이미 죽은 시체를 해부하는 것도 아니다. <인체해부도>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풍경은 한없이 과학적이면서 어딘가 주술적이고, 한없이 비인간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수술이라는 행위를 문자 그대로 '감각'하게 한다. 이는 인체에서 인간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분리하는 것과 같다. 신체에서 분리된 살과 내장들, 아니 여전히 신체에 붙어있는 등뼈와 같은 것들은 종종 우리가 식당에서 마주하는 것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나의 위니펙> 가이 매딘 2007

가이 매딘이 고향이자 캐나다 매니토바주의 도시 위니펙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의뢰받아 만든 작품이다. 감독 스스로는 이 영화를 '다큐판타지'라 명명하고 있다. 이는 <나의 위니펙>이 도시에 관한 익숙한 영화, 혹은 아카이브를 뒤져 도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그런 영화가 아님을 말한다. 영화는 감독 스스로 위니펙의 사람들과 자신을 몽유병자라 지칭하며 시작된다. 위니펙과 그곳에서 살아온 감독의 가족의 역사라 여겨지는 이미지들이 영화 속에 반복해서 재현되고, 격앙된 톤의 내레이션이 이어지고, 점멸하는 듯한 자막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가이 매딘의 목소리로 설명되는 위니펙에 관한 묘사와 역사 서술은 어디까지가 참이고 가상인지 모호하다. 때문에 이 영화는 위니펙을 배경과 소재로 삼은, 감독 자신의 가족과 고향에 관한 한편의 블랙유머처럼 느껴진다. 이를테면 경마장에 불이나 도망친 말들이 강에서 얼어붙었는데, 그곳이 연인들의 데이트코스가 되었으며 다음 해 가을은 베이비붐이 되었다는 식의 내레이션 같은 것들 말이다. 가이 매딘은 위니펙이라는 도시를 끊임없이 왜곡하고, 음해하고, 참과 거짓을 뒤섞고, 문제의 근원인 것마냥 취급한다. 위니펙에 관한 자전적인 다큐멘터리라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자면 가이 매딘이 위니펙을 혐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나의 위니펙>은 정말 이상한 방식으로 고향에 애정을 표현한다. 가이 매딘의 냉소적인 유머와 혐오감에 가까운 도시의 가상 역사는 결국 이곳이 없었다면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로 향한다. 다큐멘터리가 사실을 기록하는 영화 장르라면, <나의 위니펙>은 그것에 한없이 충실한 다큐판타지다.

<너와 나> 조현철 2022

수학여행 전날, 새미는 하은에 관한 불길한 꿈을 꾼다. 다리를 다쳐 입원한 하은을 찾은 새미는 함께 수학여행에 가자고 한다. 이 영화의 배경은 경기도 안산이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을 알 수는 없으나, 영화가 보여주는 것 이면의 위치한 거대한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간 세월호 참사를 다룬 극영화가 종종 등장했지만 대부분은 관객의 공감보단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시기 개봉한 <악질경찰>과 <생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월호를 타자화했고, 오멸의 <눈꺼풀> 같은 작품은 슬픔 속으로 한없이 침잠하기만 할 뿐이었으며, <엑시트>와 <비상선언> 같은 재난영화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죄책감을 내비쳤다. <너와 나>는 곧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날 고등학생의 이야기다. 표면적인 이야기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하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려는 새미의 고군분투를, 그 첫사랑과 짝사랑의 섬세한 감정을 담아내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훌륭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 이면의 사건이 영화의 표면에 덧붙여지며 다른 겹의 감흥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일종의 소원, 죄책감, 간절함, 일상의 감각, 사랑, 그리움 등이다. 종종 새미와 하은은 무언가를 추모하는 이들 앞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새미의 불길한 꿈처럼, '나'가 '너'가 된 그 꿈에서 들려온 라디오 뉴스의 소식처럼 말이다. 그 사건은 일상을 갑작스레 침범해왔다. <너와 나>는 그 감각을 슬그머니 되살려준다. 이를 통해 <너와 나>는 극영화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기억술을 선보이려 한다. 

<다크 글래시스> 다리오 아르젠토 2022

다리오 아르젠토가 10년 만에 내놓은 신작 <다크 글래시스>는 그가 70~80년대 사시 내놓은 무수한 지알로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성노동자를 살해한 연쇄살인범이 디아나를 쫓고, 차를 타고 도망치던 디아나는 사고로 시력을 잃는다. 사고에 휘말린 중국인 가족의 유일한 생존자인 친이라는 이름의 소년은 디아나를 찾아온다. 살인마의 추적은 계속되고, 두 사람은 함께 도망치게 된다. 단순한 플롯을 심플하게 이끌고 나간다. 아르젠토의 인장과도 같은 강렬한 음악, 검은 장갑을 낀 살인마의 손 등이 이번 영화에도 등장한다(아르젠토가 여전히 검은 장갑을 낀 살인마의 손을 연기하는지는 모르겠다). <지알로>나 <드라큐라 3D> 같은 근작들이 혹평을 받았던 만큼, 이번 영화에 대한 기대도 없었다. 그리고 <다크 글래시스>는 그러한 기대에 맞는 영화였다. 아르젠토는 여전히 과거와 같은 영화를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고 있으며, 2022년은 그러한 방식의 영화가 어울리는 시간대가 아니다. <말리그넌트>나 <라스트 나잇 인 소호>와 같은 21세기 장르 감독들의 지알로 복각 시도가 종종 이루어지지만, 이 영화들에 관한 엇갈리는 평을 보고 있자면 '지알로 스타일'이라는 것은 과거의 것으로 머물 때에야 기능할 수 잇는 게 아닌가 싶어지기도 한다. <다크 글래시스>는 그러한 생각에 확신을 더해준다. 나는 이 영화를 즐겁게 봤다. 하지만 이 때의 즐거움은 <수정 깃털의 새>나 <쉐도우> 같은 영화를 지금 시점에서 마주할 때의 즐거움에 가깝다. 다만 당시의 지알로 영화들이 가졌던 흉폭함이 사라졌을 뿐이다.

<퍼시픽션> 알베르 세라 2022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한 섬, 그곳을 관리하는 고위공무원 드 롤러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섬에는 핵실험이 수십년 만에 재개될 것이란 이야기와 함께 여러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롤러는 섬의 주민들과 다른 관료들, 군인과 외국인 사이를 오가며 소문의 정체를 파악하고 자신의 입지와 섬의 안정을 모두 챙길 수 있는 방향을 찾으려 한다. 이렇게 적으면 <퍼시픽션>은 태평양의 작고 아름다운 섬에서 벌어지는, 어딘가 급박한 정치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느리다. 무지하게 느리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압축"을 수행하는 예술이지만, 차이밍량이나 라브 디아즈 등의 감독들은 느림을 영화에 복각시키는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 알베르 세라의 영화들도 종종 그래왔다. <루이 14세의 죽음>은 루이 14세가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시간을, 마치 관객도 그 시간을 견디며 함께 죽어가길 바라는 것처럼 담아냈다. <퍼시픽션>의 관객은 롤러와 함께 무기력 속으로 침잠한다. 국방력을 과시하기 위한 비밀작전, 폴리네시아 식민지를 착취하는 외부의 권력, 그 권력과 주민의 이익 사이에서 바쁘게 자리를 오가지만 무엇 하나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상황, 그야말로 바다속의 잠수함처럼 그것의 존재를 알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는 힘과 힘의 투쟁. 이제는 '슬로우 시네마'라는 명명도 어딘가 낯간지럽게 느껴지긴 하지만, <퍼시픽션>은 너무나도 빠른 지하수의 움직임을 알지 못하는 지상의 인간들을 우롱하듯 그들을 정교한 '느림' 속으로 밀어 넣는다. 너무나도 느릿하게 감각되지만 모든 것이 재빠르게 진행되는 곳, <퍼시픽션>은 우리를 마비시키는 정치의 감각을 그대로 옮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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