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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Oct 29. 2022

오싹한 탑

<탑> 홍상수 2022

 인물이 상승할수록 추해지는, 다시 말해 계급, 지위, 경력, 나이, 재산 등의 상승이 물리적인 상승과 함께 이루어지며 인물의 속물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영화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이 라이즈>나 <기생충>과 같은 상승과 하강의 테마를 지닌 영화들은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홍상수의 28번째 장편영화 <탑>은 얼핏 이러한 테마를 반복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감독이 직접 기타를 연주한 음악을 분기점 삼아 4부의 구성을 취하는 이 영화는 서울 논현동에 위치한 한 건물을 배경으로 한다. 탑은 아니지만 외관상 탑처럼 느껴지는 이 좁은 건물은 지상 4층 지하 1층의 구조를 갖고 있다. 영화감독 병수(권해효)는 딸 정수(박미소)와 함께 이 건물의 인테리어를 맡은 디자이너이자 건물주 해옥(이혜영)을 찾아오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1층 식당에서의 식사로 시작한 1부는 2, 3, 4층의 모습을 각각 보여준 뒤 지하에 있는 해옥의 작업실로 이어진다. 병수가 근처의 영화사로 잠시 떠나간 사이, 정수는 해옥에게 “아버지는 안에서의 진짜 모습이 밖에서와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라 말하고, 해옥은 “안의 모습과 밖의 모습 모두 진짜 아닐까”라고 답한다.

 1부는 이러한 전제를 설정하고 있다. <탑>의 2, 3, 4부는 1부에서 사라졌던 병수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2부에선 2층 식당의 프라이빗 테이블에서 해옥, 식당 주인(송선미)과 술을 마시고, 3부에선 3층에 식당 주인과 함께 월세 들어 살아가며, 4부에선 4층에 홀로 살아가며 부동산 직원(조윤희)과 밀애를 나눈다. 1부와 2부는 홍상수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감독인 병수와 해옥의 관계는 (홍상수 영화 속 몇몇 인물들이 그러했듯) <당신얼굴 앞에서>와 <소설가의 영화> 속 권해효와 이혜영의 인물들을 연상시킨다. 정수가 갑작스럽게 격앙된 말투로 꺼내는 말들이나 2부에서 병수와 식당 주인이 나누는 대화는 차라리 홍상수를 따라는 영화들 속 대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3부와 4부다.

 3부와 4부의 병수는 자신이 앞서 했던 언행을 반복해서 뒤집는다.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던 2층의 병수와 달리 4층의 병수는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말한다. “혼자가 좋다”라고 말하던 3층의 병수는 (혼자 살긴 하지만) 매일 같이 연인의 케어를 원하는 4층 병수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사뭇 달라 보이는 네 명의 병수는 홍상수가 종종 취해온 반복의 구조에 속해 있지 않다. <탑>의 구조는 “탑”의 구조와 비슷하다. 영화 속 시간은 거의 선형적으로 흘러간다. 병수가 탑을 한 층 씩 올라갈 때마다 몇 개월의 시간이 흘러가고, 병수의 건강이 점차 좋지 않아진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오히려 <탑>은 홍상수가 <풀잎들>에서 프레이밍을 통해 각 테이블의 사람들을 절단시켰던 것을 연상시킨다. 관객은 분명 1부에서 탑의 전체를 보았지만, 탑의 각 층에서 마주하게 된 병수는 어딘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인물을 둘러싼 상황이나 태도, 혹은 세계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만 같던 <다른나라에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북촌방향>과 달리, <탑>에서는 모든 것이 그대로인 채 병수만 변화한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1부에서 정수와 해옥이 병수에 관해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아버지는 안과 밖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과 “그 모든 것이 진짜 모습”일 것이라는 말. 

 최근의 홍상수는 안과 밖이라는 경계에 천착했던 것만 같다. <인트로덕션>와 <소설가의 영화>의 저화질은 창밖의 저기와 건물 안의 여기를 완전히 구분시켰으며, 그것은 공간의 구획을 오감에 따라 변화하는 인물로, 더 나아가 프레임의 내부와 외부 중 어느 곳에 위치함에 따라 변화하는 인물로, 더욱 나아가자면 영화라는 큰 틀 속의 인물과 영화와 완전히 구별되는 ‘배우’라는 자연인 사이의 경계를 가늠해보는 것으로 나아갔다. 그 경계가 모호해지거나 뒤집힐 때마다, 혹은 인물이 그 경계를 오가며 서로 다른 여기와 저기를 기이한 방식으로 통합시키는 순간마다,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인식에 모종의 교란이 일어난다.


 <탑>은 이 교란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1부와 2부에서 이는 크게 두드러지진 않는다. 다만 홍상수가 직접 연주한 음악이 이전의 영화들에서와 다르게 악기 이외의 현장음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깥은 이미 “탑”의 각 층을 구별하는 무언가로 영화에 기입된다. 이 교란이 가장 극적으로 펼쳐지는 순간은 3부의 마지막이다.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던 연인과 말다툼을 했던 병수는 연인에게 연락을 하려다 그의 핸드폰이 집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 무언가 체념한 듯 침대에 엎드려 누운 병수의 위로 연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목소리는 이 장면과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벌어질 수 있었던 어떤 사건이 유령처럼 홀연히 들려오는 것만 같다. 집으로 돌아온 연인과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병수의 목소리는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는 병수의 모습 위로 들려온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프레임 바깥은 대체로 외화면, 다시 말해 화면에 담겨 있진 않지만 화면이 담아내는 세계에 속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의 음성은 영화 바깥에서, 마치 다른 버전의 세계가 화면 위에 사운드의 형태로 얹혀진 것처럼 들려온다. 사운드로만 확인할 수 있는 병수와 연인의 대화가 끝나면, 병수는 그 음성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역시 혼자가 편해”라는 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여기서의 병수는 마치 텔레파시로 다른 자신과 대화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앞선 1, 2, 3층에서의 병수와 다르게 4층의 병수는 유달리 활달하게 느껴지고, 고지서를 들고 4층을 찾은 해옥은 거의 저승사자처럼 느껴진다. 몸이 좋지 않아 채식을 한다던 3층 병수와 달리 4층 병수는 연인(부동산 직원)이 사 온 소고기를 먹는다. 3층 병수가 “집에서는 가정적”이었다던 정수의 말처럼 설거지하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면, 4층 병수는 집을 찾은 연인과 다짜고짜 사랑을 나눈다. 그 공간은 1부에 잠시 소개되었던 것과 완벽히 같다. 1부의 시간대에서 4층에 살던 사람이 걸어둔 그림은 여전히 집에 걸려 있다. 우리는 알고 있던 공간과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인물을 보고 있지만, 무언가 다른 사람이 그곳에 존재함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진 결과를 마주한다. 2층 병수는 별거 중인 아내가 제주도에 있다고 했고, 3층 병수의 연인은 자신이 제주도에 내려가고 싶다 했으며, 4층 병수는 “병수야 제주에 내려가 열두 편의 영화를 찍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일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동일한 병수가 맞을까? <소설가의 영화> 속 “소설가의 영화” 속 김민희의 모습이 길수인지 김민희인지 알 수 없었던 홍상수의 관객은 <탑>에서 같은 문제를 더욱 압축된 긴장 속에서 마주한다.

 영화의 마지막, 연인과 어딘가로 가기로 한 병수는 일 때문에 이동해야 하는 연인을 보내고, 자신의 차를 빌려갔던 식당 직원 줄(신석호)에게 차 키를 돌려받는다. 잠시 차에 타 있던 병수는 이내 내린다. 그 순간 1부 마지막 인근 편의점에 술을 사러 갔던 정수가 돌아온다. 마치 1부에서 영화사에 잠시 일 보러 떠났던 병수가 편의점에 다녀온 정수를 우연히 마주친 것만 같은 상황이 컷 없어 이어진다. 하지만 정수는 1부 마지막의 모습과 다르게 우산을 들고 있고, 병수에게 존댓말을 쓰지도 않는다. 병수는 1부에서 피웠던 것과는 다른 담배(4부에서 연인이 준 담배)를 들고 있다. 이 순간 <탑>이 <북촌방향>이나 <풀잎들>에서 홍상수가 횡적으로 펼쳐 놓은 구조를 수직으로 세워놓은 것만 같다는 기시감과 함께, 그것만으로 이 영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괴리감을 느낀다. <소설가의 영화>가 영화 바깥의 이미지를 통해 이것과 저것, 여기와 저기, 영화의 안과 밖을 충돌시켰다면 <탑>은 그것을 오로지 영화 내부에서 선보인다. 건물 앞 나무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병수의 모습은 마치 “탑”이라는 영화적 장치가 그를 소화해낸 뒤 뱉어낸 것만 같다. 탑에 들어가기 전과 후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2부에서 탑에 들어간 이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바깥에 나온다) 논현동 한 복판에 놓여 있다기엔 기이한 외관과 인테리어를 한 이 탑은, 한 사람의 여러 모습을 낱낱이 분해한 뒤 다시 하나로 합쳐 세워둔다. 오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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