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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Nov 26. 2022

돌아온 델 토로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기예르모 델 토로, 마크 구스타프슨

 세바스티안 J. 크리켓(이완 맥그리거)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1차 세계대전 시기에서 시작한다.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살아가던 목수 제페토(데이비드 브레들리)는 폭격으로 인해 유일한 가족인 아들을 잃는다. 아들의 죽음 이후 절망과 술에 빠져 살던 그는 아들의 무덤 옆에 심어 둔 소나무를 베어 가 목각인형을 만든다. 그날 밤 푸른 요정(틸다 스윈튼)이 나타나 목각인형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피노키오(그레고리 만)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피노키오의 모습에 제페토는 당황하지만, 파시스트 시장 포데스타(론 펄먼)는 죽지 않는 피노키오를 병사로 키우려 하고, 볼페 백작(크리스토프 발츠)은 피노키오를 자신의 서커스로 유인하려 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열두 번째 장편영화이자,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의 애니메이션 감독이었던 마크 구스타프슨이 공동연출을 맡은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익숙한 피노키오의 이야기를 빗겨나간다.

 19세기 말 쓰여진 원작소설을 디즈니가 애니메이션으로 내놓은 것이 1940년이었고, 그것을 그대로 실사화한 것이 올해의 일이다. 디즈니의 피노키오는 애니메이션 영화 역사상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언제나 손꼽히지만, 동시에 19세기 유럽 아동문학이 가지고 있던 가학성과 그로테스크를 다른 방향으로 뒤틀어버렸다. 지금의 디즈니 애니메이션들을 떠올렸을 때 <피노키오>를 비롯한 1940년대 디즈니 셀 애니메이션을 기괴하다 생각하는 것은 약간 다른 문제다. 1940년의 <피노키오>와 로버트 저메키스의 <피노키오>는 과거 작품이 가지고 있던 백인중심주의의 혐의를 벗겨낸 정도였다면, 1940년의 <피노키오>는 빈곤, 계급, (집안에서의) 아동학대 등을 일정 부분 삭제한 각색이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디즈니보다 원작에 가깝게, 더 정확히는 그가 <판의 미로>를 만들었을 때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두 영화는 모두 파시스트 정권 하의 전쟁 시기를 그려내고 있으며, 청소년인 주인공이 겪는 판타지적 고난을 통해 시대에 관한 비판과 비평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죽음을 맞이해도 잠시 저승의 문턱에 다녀온 뒤 살아나는 피노키오의 능력(?)은 디즈니의 작품에도, 원작에도 없던 것이다. 원작의 피노키오는 단순히 잘 죽지 않는 것 정도로만 묘사되며, 그의 부활은 그가 진짜 인간 소년이 되는 순간 정도다.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설정은 단순히 강력한 존재라는 설정 너머에 있다. 겁이 없는 존재, 2차 세계대전에 돌입한 파시스트 정권이 그토록 원하던 능력을 지닌 것으로 피노키오는 묘사된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피노키오는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던 제페토의 말을 무시하고 성당으로 향해 모든 마을 사람 앞에서 악마의 주술이라 모욕을 당하지만, 피노키오가 죽음에서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난 포데스타는 그를 소년병 훈련소에 어떻게든 집어넣으려 한다. 한편 자본주의자인 볼페 백작의 계약서는 파시스트인 포데스타의 권력 바깥에 있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으며, 이데올로기도, 종교도 습득하지 못한 백지상태의 피노키오가 겪는 상황들은, 두 가지 상황이 모순적으로 뒤섞여 있던 시기에 관한 것이다. <판의 미로>가 스페인 근현대사의 압축적인 은유였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러한 부분을 생각하지 않고(하지만 무지 노골적으로 역사를 끌어들이기에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작품 자체의 장르적 완성도만을 생각했을 때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비록 전체관람가로 개봉하였지만, 만취한 제페토가 소나무를 베고 피노키오를 만드는 장면은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연상시키고, 마을과 훈련소 등이 폭격당하는 장면 등의 폭력성, 델 토로의 전작들을 연상시키는 푸른 요정의 캐릭터 디자인 등은 이 영화가 델 토로의 필모그래피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음을 알게 해준다. 무엇보다 <크림슨 피크>, <셰이프 오브 워터>, <나이트메어 앨리>라는 어정쩡한 영화 세 편을 내놓은 뒤 오랜만에 그의 장기가 십분 발휘된 영화라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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