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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08. 2022

제46회 서울독립영화제 후기

<늦더위> 서한솔 2022

 <종착역>의 공동연출자 중 한 명이었던 서한솔의 첫 단독연출작. 8년 넘게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32살 동주가, 일이 안 풀리자 도망치듯 여행을 떠나 과거의 인연과 우연한 만남들을 거친다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전작의 네 주인공이 '세상의 끝'이라는 추상적인 장소를 찾아 1호선을 타고 여행을 떠났다면, 본작의 동주는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정처없이 떠돈다. 본가의 부모님과는 사이가 소원하고, 군대 시절 후임은 외제차를 끄는 직장인이 되어 있으며, 초면에 MBTI를 공유하며 금새 친해지는 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한다. 아르바이트 하던 곳에서 정규직을 제안함에도 "공부를 해야해서요"라 대답하는 동주에게 '취업'이라는 것 자체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하다. 오히려 오랜 시간 무언가를 준비해 왔기에 체화된 '준비'의 태도가 그를 감싸고 있다. 그는 취업을 할 준비도, 오랜만에 부모를 만날 준비도, 결혼한다는 전 애인을 진심으로 축하해줄 준비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마음을 열 준비도, 새로운 사람과 친밀해질 준비도 되어 있지 못 하다. 도망치듯이 떠난 여행은 무엇에도 준비되지 못한 자신을 재차 마주하는 것이다. 공무원시험이 마무리된 시기인 늦여름에 길을 떠난 동주의 여정은 그가 아르바이트하던 곳에서 반복해서 말하던 "마무리"를 위한 것일까?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듯한 영화의 마지막에서 동주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만 같다. 변한 게 있다면, 일터에서나 하던 화분을 사와 식물을 가꿀 준비하는 일을 집에서도 하기 시작했다는 것 뿐. 비록 동주의 여정이 <종착역>의 네 소녀만큼 활기차고 개성있진 못하지만, 그렇기에 그의 답답한 여정이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 조상아/조연 2021

 이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은 '모르는 사람의 가까운 죽음'을 경험했다. 여전히 그 죽음들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만난 이 영화는 그 중 세 개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무수한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의 자살, 2014년의 세월호 참사. 세 줄기의 죽음(들)을 중심에 둔 채, 영화는 거대한 타이포그래피로 죽은 이가 되거나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에 참석한 누군가가 된다. 세 개의 죽음과 연관된 이미지 외에도 9.11 테러, 80년 광주, 90년대 반독재운동 등 여러 투쟁과 참사의 이미지와 함께, 김기영의 <화녀 82>, 레드벨벳의 뮤직비디오,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포스터 등 죽음충동이 깃들어 있는 대중문화 속 이미지를 끌어온다. 원치 않는 죽음과, 죽고 싶은 마음과, 죽음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영화 내내 충돌한다. 이러한 구성이 해당 사건과 죽음(들)에 관해 윤리적인지는 모르겠다. 사건을 담은 무수한 CCTV와 생중계 푸티지를 지켜보고 있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다만 토해내듯 스크린 위에 흩뿌려지는 글자들이 이 영화를 만든 마음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박영길씨와의 차 한 잔> 유우일 2022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한 노부부가 카페에 들어온다. 커피를 마시며 남편 영길의 은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내 정희는 무역업에 종사하기에 배로 일본을 자주 왕래하는 영길이 어딘가 이상함을 감지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어딘가 이상한 방향으로, 영길이 숨기던 비밀에 관한 것으로 이어진다. 단출한 구성이지만, 깔끔한 구성의 흑백 화면, 고전 한국영화의 대사 더빙을 연상시키는 사운드 등이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영화으 90%가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알 수 없는 것에 관한 매혹과 공포"라는 러브크래프트적인 주제의식을 꽤나 인상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물론 이 영화에는 신화적 존재도, 어떤 괴물도, 크툴루도, 심지어 바다조차도 나오지 않는다. 재현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게끔 만드는 힘을 지닌 장르영화라는 점에서, 그것을 16분 동안 압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박영길씨와의 차 한 잔>은 주목할만한 장르영화다.

<두 여인> 장선희 2022

 90년대 중반의 어느 날, 나이를 속인 채 신문배달로 용돈벌이를 하는 초등학생과 잃어버린 딸을 찾는 전단지를 붙이는 중년 여성이 우연히 만난다. 아이스크림을 나눠먹으며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롱테이크로 이어진다. 러닝타임의 거의 대부분을 슈퍼 앞에 앉아 대화 나누는 장면으로 꾸린 이 영화는 출산과 육아로 인해 자신을 잃어버린 두 여인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제 홈페이지에 적힌 연출의도 - "제목 ‘두 여인’ 중 한 여인은 대화에서만 등장하는 소녀의 엄마를 나타냅니다." - 에서 느껴지는 것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봉련 배우가 연기한 첫 번째 여인은 육아로 인해 자신을 잃어버렸다 결국 딸을 잃어버렸다.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두 번째 여인은 스스로를 챙기지 못한 채 생계를 위해 일하고, 오히려 초등학생 딸이 그를 챙기려 한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들은 두 여인과 두 딸의 책임이 아님에도, 두 주인공의 대화 사이사이에선 그들을 탓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단순한 구성 속에서 보이지 않는 '다른 여인'을 상상하게끔 하는 이봉련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가정동> 허지윤 2022

 오래된 동네인 가정동에 살며 청라 신도시의 고기집에서 일하는 상운은 동네 담벼락에 놓인 화이트보드에 누군가 써둔 시에서 하루의 위안을 얻는다. 그는 매일 같이 귀가길에 시를 읽고 시 값으로 담배 한 값을 놓는다. 그 시를 쓰는 것은 신도시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어느 노동자다. 상운은 어느 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상운은 자신을 숨긴 채 일한다. 자신의 상황이 어디 말하기에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어떤 정상적인 것을 요구당하는 것마냥 그는 자신의 처지에 관해 거짓말을 한다. 이는 그와 함께 일하며 같은 동네에 사는 이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자신을 숨기는 이유는 없다. 그것의 유일한 이유라곤, 어쩌면 신도시의 풍경 앞에서 무언가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랄까. 몇 차례 등장하는 상운의 귀가길 버스에서는 새로 지어지는 신도시의 이름이 들려온다. 카메라는 가정동 너머 새로이 올라가는 아파트의 모습을 비춘다. 건설노동자이자 거리의 시인이 죽은 그곳은 가정동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가 쓴 시가 가져다 준 일상의 위안을, 이 영화는 숏 하나하나에 눌러담으려 한다. 그 시도가 썩 마음에 든다.

<행진대오의 죽은 원혼들> 안지환 2022

 화자는 자신이 참여했던 대규모 집회에서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본다. 그는 집회에서 봤던 의문의 개를 기억한다. 개의 사진을 찍었다고 생각하지만, 격렬한 집회 도중 카메라가 부서지고 필름은 타버렸다. 이 영화는 그러한 기억들을 그러모은다. 금속노조 소속으로 오랜 시간 투쟁해온 이들의 핸드폰에 저장된, 이제는 세상을 떠난 동지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픽셀 애니메이션으로 2005년 부산에서 있었던 대규모 투쟁을 떠올린다. 길 잃은 개를 찍은 이미지를 들여다보며 기록되지 못한 기억을 떠올려보려 한다. 집회 행진대오의 사람들이 들고 나왔던 동지들의 영정사진, 꽃상여, 관.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지만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다.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공적인 기록으로 남지 못한 원혼들을 이 영화는 다시금 소환하고자 한다. 안지환 감독은 연출의도에 "싸우고 있는 이들과 싸우다 먼저 간 이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어줍잖은 헌사"를 쓴다고 적어두었다. 행진의 기록과 행진의 기록이 아닌 것들이 결합하여 함께 행진했던 원혼들의 기억을 끌어오기. 나의 기억 말고는 기록되지 못한 그들에 관한 부채감이, 21분 짜리 영상 헌사에 묻어난다.

<상실의 집> 전진규 2022

 감독은 자신이 사회복무요원으로 요양원에서 복무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요양원의 어르신들은 사회복무요원인 자신과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록키>를 보고, 기미가요를 부르며, 참전했던 전쟁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들은 여전히 냉전의 시간을 살아간다. 요양원에 입소한 어르신들이 머리를 미는, 하지만 머리카락 대신 과거에 속박된 이미지들이 깎여 내려가는 장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절대 깎여내려갈 수 없는 그들의 과거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깎인 머리 때문에 일종의 동일화가 되어버린 요양원의 어르신들은 여전히 같은 시간에 속박되어 있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은 그러한 상태를 강렬하고 명확하게 보여준다.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에 가까운 감독의 무덤덤한 목소리와 이야기는 <상실의 집>에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을 덧씌운다. 기록되지 않은 기억을 되살린다는 지점에서, 강희진의 <메이•제주•데이>나 김윤정의 <선율>처럼 카메라로 직접 기록할 수 없는 현장을 애니메이션으로 되살린 흥미로운 작품 중 하나다.

<양림동 소녀> 임영희, 오재형 2022

 <피아노 프리즘>의 오재형 감독이 어머니 임영희 씨와 함께 만든 작품. 진도에서 태어나 광주로 유학온 뒤 양림동에서 한평생 살아온 임영희 씨가 자신의 삶을 기록한 그림책을, 두 사람의 대화를 내레이션 삼아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하였다. 영화는 진도에서 유학을 왔기 때문에 겪은 일들, 성인이 되어 보낸 80년 5월의 광주, 뇌졸증 후유증으로 장애인이 된 노년의 시간까지를 담아낸다. 익숙한 생애 구술사의 방법을 취하고 있지만, <피아노 프리즘>에서 들었던 오재형 감독의 피아노 연주와 임영희 씨의 몽글몽글한 그림체가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살아온 시간'이라는 말보다는 '살아낸 시간'이라는 말이 조금 더 적절해 보이는, <양림동 소녀>가 담아내고 있는 이야기는 '개인사'라는 얼핏 사사롭다 느낄 수 있는 단어가 품은 확장성을 보여준다.

<새벽 두시에 불을 붙여> 유종석 2022

 1995년의 실화를 각색한 작품. 화원여자기술학원의 폭력적이고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다섯 명의 인물이 방화를 통해 그곳을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폐쇄적인 환경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거대한 불로 번지게 되는 이야기를, 얼핏 레드벨벳과 같은 케이팝 걸그룹 뮤직비디오가 연상되는 이미지를 통해 담아낸다. 하지만 내레이션이 결합된 이 영화의 방식은 실화가 지닌 힘을 반감시킨다. 이미지의 힘이 강렬함은 실제 사건이 지닌 사회적 함의를 영화 바깥으로 밀어낸다. 극 중 인물들이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긴 하지만, 빠른 속도의 편집과 대사처리는 그것들을 빠르게 이야기 바깥으로 몰아 붙인다. 

<괴인> 이정홍 2022

 목수 기홍은 얼마 전 피아노 학원 인테리어 공사를 마무리했다. 과천의 공기 좋은 교외 주택에 세들어 사는 그는 집주인 부부 정환, 현정과 종종 어울린다. 그러던 중 자신의 스타렉스 천장이 내려앉은 것을 발견하고, 블랙박스를 돌려보던 중 노란 머리의 누군가가 그 위로 떨어졌었다는걸 알게 된다. 기홍은 정환과 범인을 찾아 나선다. 이 이야기만 놓고 보더라도 <괴인>은 정말로 이상한 영화다. 전형적인 강약약강 스타일의 기홍은 영화 속에서도, 영화 바깥의 관객에게도 쉽게 호감을 살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늦여름부터 겨울까지 그가 살아간 몇 달의 시간을 담아낸 이 영화는 기홍을 단순히 관찰하고 있는 것 같지만은 않다. 영화를 끝까지 본 이후에도 관객은 기홍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의 스타렉스 위로 뛰어내렸던 하나라는 의문의 인물이 누구인지도, 기홍의 집주인 부부가 기홍에게 유달리 친밀감을 표시하는 이유도, 기홍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영화는 그저 기홍의 하루하루를 쫓아갈 뿐이다. 그가 정환이나 현정과 이야기할 때 서로가 존댓말과 반말, 종종 욕설을 섞어 내뱉을 때의 긴장감, 기홍이 가족과 친구를 포함한 주변 인물들과 갖는 기묘한 거리감, 난데없이 스크린을 점령하는 스마트폰 화면 속 어색한 대화들. 둔하고 느릿한 기홍의 움직임과 말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긴장감을 육화한 것만 같다. 어색함, 가식적인, 사회생활, 진솔함 같은 말들로 포장되곤 하는 나와 타인 사이의 거리감이 영화 내내 진동한다. <괴인>을 보고 나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혹은 이 이야기에 어떤 교훈이나 주제의식이 있는가. 이러한 접근은 <괴인>을 뭔지 모를 졸작으로 여기게끔 할 뿐이다. 그저 이 영화의 기묘한 리듬에 시야를 내주고 잠시간 영화에 끌려가다보면 긴장감으로 가득한 짧지 않은 러닝타임이 지나간다. 허망한 순간에 끝나며 긴장의 끊을 탁 놓게 되어버리는 영화의 마지막마저 인상적이다.

<장기자랑> 이소현 2022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지난 활동을 기록한 이소현 감독의 새 다큐멘터리. 영화는 2015년 극단의 결성부터 2020년 안산 단원고에서 무대를 올리기까지의 시간을 담아낸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감동만으로 가득한, 혹은 슬픔을 딛고 꿋꿋히 일어선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시간을 담아내기만 하지 않는다. 물론 감동과 웃음이 가득한 영화이지만, 영화의 중심은 세월호에 탔던 단원고 학생들에게 모티프를 얻은 연극 '장기자랑'을 준비하며 갈등을 반복하는 극단 노란리본 멤버들의 이야기다. 이 갈등은 사회적 참사 유가족의 모습을 다룬 다른 다큐멘터리들보단, 차라리 연극이나 영화를 준비하며 서로 반목하는 예술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여배우들>이나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 같은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다 보니 연극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경험이 쌓일 수록 연극 자체에 대한 욕망이 발생하며 벌어지는 여러 갈등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시작한 연극은 어느새 삶의 일부이자 예술적 욕망으로 자라난다. <장기자랑>은 그러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아낸다. 장민경의 <세월>처럼, 혹은 <더블 레이어드 타운>이나 하마구치 류스케와 사카이 코의 <파도의 소리> 연작처럼, 참사 이후의 유가족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이 하나 둘 등장하며 참사를 다른 각도에서 목격할 수 있게 해주는 영화였다. 

<기행> 이하람 2022

 이하람 감독은 이 영화의 연출, 각본, 미술, 세트, 음악, 촬영, 조명, VFX 등 연기를 제외한 모든 분야를 담당했다. 장편영화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1인 제작 시스템으로 인해, 이 영화의 첫인상은 꽤나 당황스럽다. 어두운 화면에 분간이 잘 되지 않는 이미지가 이어지고, 눈 먼 할머니와 말 못 하는 소년, 탈영병이 등장한다. 탈영병이 먹을 것을 훔쳐먹자, 소년은 자신 앞에 나타난 처녀귀신과 함께 지옥으로 향한다. 소년과 처녀귀신의 대화는 모두 자막으로만 처리된다. 이하람 감독은 지옥을 거쳐 천국으로 향하는 소년과 처녀귀신의 여정을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았다 말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올린 것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센과 가오나시의 여정과 조금 더 유사한 인상을 받았다. 지옥을 등장시킨 영화는 규모를 따지지 않고 종종 만나볼 수 있지만, <기행>은 애니메이션, 미니어처, 세트 등을 홀로 만들어내며 독특한 이미지를 구현해낸다. 솔직하리만큼 스스로의 조악함을 노출시키는 촬영, 미술, 편집, VFX는 도리어 하나의 스타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행> 이후의 이하람 감독이 어떤 것을 만들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기행>이 보여준 어떤 뚝심과 솔직함이 그의 차기작을 기대하게끔 한다.

<두 사람> 반박지은 2022

 한국의 대중매체에서는 유독 나이 든 레즈비언의 재현이 없다. 반박지은 감독의 다큐멘터리 <두 사람>은 한국이 아닌 독일에서 살아가는 노년의 레즈비언 커플을 담아낸다. 영화는 감독이 사진전에서 우연히 마주한 김인선-이수현 커플의 사진을 목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사진에 매료된 감독은 두 사람을 찾아 그들의 일상을 기록한다. 파독 간호사였던 두 사람은 재독여신도회 수련회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렇게 36년의 시간이 흘렀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이하기 이전까지의 두 사람의 일상을 담아낸 이 영화에는 이렇다 할 내용이 없다. 인선이 강연 등을 위해 잠시 한국을 찾은 동안 수현이 베를린에서 홀로 지내던 시간 정도가 이 영화의 가장 큰 사건이다.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하고, 집회 자유발언대에 서고, 일하고, 요리하고, 식사를 하고, 함께 춤을 추고, 바다를 찾아 시간을 보낸다. 영화는 그 시간들을 차곡차곡 담아낸다. 인선의 70세 생일과 두 사람의 춤으로 끝나는 영화는 그들 사이의 누적된 시간의 깊이를 담아낼 수 없음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만 같다. 과거의 사진 등 여러 자료를 통해 그들이 독일로 오게 된 과정, 독일에서 만나게 된 과정, 연애하던 시간 등을 보여주지만, '70대 한국인 레즈비언 커플'이라는 그간 마주하기 어려웠던 지표적 이미지는 이미 그러한 시간을 초과하여 존재한다. 레스보스의 윤김명우 사장을 담아냈던 권아람의 <홈그라운드>와 함께, 좀처럼 다뤄지지 않는 한국인 노년 레즈비언의 모습을 기록한 소중한 작품 중 하나.

<생츄어리> 왕민철 2022

 '동물원'이라는 공간의 양가적인 가치에 관한 영화였던 전작 <동물, 원>에서 곧장 이어지는 속편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이번 영화는 전작과 같이 청주동물원을 배경으로,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의 활동과 동물원를 생츄어리처럼 운영하고자 하는 노력을 담아낸다. 야생동물구조센터는 인간이 만들어 둔 구조물이나 덫으로 인해 상해를 입은 동물을 치료하여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곳이다. 하지만 많은 동물들은 야생으로의 복귀를 하지 못하고 안락사 당하게 된다. 한편으로 전국 각지에서 사육되는 곰을 구출하여 청주동물원에 마련된, 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생츄어리'로 곰을 옮겨오려는 노력이 계속 이어진다. 전작이 '종보호'라는 관점에서 동물을 전시함과 동시에 보존 및 보호하는 동물원이라는 모순적 공간에 집중했다면, 본작은 그러한 동물원에서 전개되는 동물복지와 윤리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부상당한 야생동물, 혹은 동물원의 동물들이 치료를 받아 다시 야생으로 돌아가거나 고통스럽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판단하는 주체는 결국 수의사와 사육사다. 동물과 정확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등장하지 않는 한, 동물의 안락사라는 문제에 있어 우리는 영원히 답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자연, 수많은 인공물로 가득한 세계에서 야생동물과 우리의 동물은 고통받고 있다. 수의사, 사육사, 구조센터의 활동가들은 매일 같이 답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 선택해야 한다. 국내에는 아직 '생츄어리'라고 부를 수 있는 환경이 없다. 청주동물원의 시도는 결국 사람들 앞에 동물이 전시되어야 한다는 전작의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는 구조센터의 방사장 또한 마찬가지다. 인공적인 것의 개입으로 시작된 딜레마는 인간의 고민이 깊어질 수록 더 많은 모순에 당도한다. <생츄어리>는 치열하게 고민을 나누고 있는 이들이 영화의 관객에게 그 고민을 조금이나마 나누자고 손을 내민다.

<수라> 황윤 2022

 영화의 제목인 '수라'는 군산에 위치한 갯벌의 이름이다. 황윤 감독은 2006년 새만금 간척사업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중이었으나, 정부의 무리한 사업 중 사망자가 발생하자 상실감에 촬영을 접는다. 이후 군산으로 이사 온 감독은 여전히 매달 새만금의 자연을 기록하는 시민조사단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 영화는 시민조사단 멤버인 오동필과 감독 자신을 중심으로, 2003년부터 시작되 시민조사단의 활동을 담아낸다. <수라>의 시놉십스를 적어보자면 액티비즘과 성찰적 다큐멘터리 사이에 놓인 영화처럼 다가온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아무도 이득을 본 사람이 없다는 외침부터 간척지 위에 건설하려는 군산 신공항이 사실상 군산 미군기지 확장에 가깝다는 이야기 등을 담아내는 것, 감독이 자신의 내레이션으로 새만금에 관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상을 말하고 있다는 것 등을 생각해보면 그러하다. 하지만 영화 자체의 이미지적인 인상은 생태 다큐멘터리 내지는 자연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오동필과 황윤은 영화 속에서 수차례 갯벌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오동필은 간척사업 이전 도요새들의 군무를 본 것을 두고 "아름다운 것을 본 죄" 때문에 계속 조사단을 하는 것 같다 말하기까지 한다. 실제로 영화는 오랜 기간 촬영되었기에 가능한 다양한 새들의 이미지들, 간척사업으로 갯벌에서 염습지가 된 수라갯벌(조사단은 '갯벌'이라 계속 불러야 다시 갯벌이 살아날 것이라 믿기에 더이상 갯벌의 모습이 아님에도 갯벌이라 부른다)의 풍광 등은 BBC의 <살아있는 지구>나 넷플릭스의 <우리의 지구>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영상에 가깝다. 황윤이 오동필의 아들인 오승윤과 쑥새의 노래를 녹음하기 위해 일출 시간부터 염습지를 찾는 영화의 첫 장면은, "아름다운 것을 본 죄"와 같은 오동필의 말을 고스란히 납득하게끔 한다. 사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줌으로써 생태주의나 환경주의를 납득시키려는 시도 대부분은 그 이미지만 남을 뿐 대체로 실패한다. 하지만 <수라>는 그 '아름다움'으로 기어이 관객을 납득시킨다. 이는 <수라>가 지닌 액티비즘적, 수행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 황윤이 2006년의 실패와 상실감을 고백하는 것, 부안과 군산의 어민들이 간척사업 이후 살아가는 모습, 오랜 시간 새만금을 관찰한 황윤과 오동필이 갖는 심경의 변화 등은 '아름다운' 수라갯벌의 이미지와 함께 영화에 담겨 있다. 황윤과 오동필이 매료된 수라갯벌의 아름다움은 관객을 그 현장에 오게끔 하는, 관객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일종의 촉매제에 가깝다. <수라>는 자신이 목격하고 담아낸 이미지에 관한 자신감으로 가득하다. 자신이 매료된 그곳을 지키기 위해 그 이미지로 관객을 매료시키고자 하는, 다시 실패하는 것의 위험을 감수하고 그 이미지를 관객 앞에 보여주는 마음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관객 앞에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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