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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12. 2022

다른 시대에 잘못 당도한 듯한

<화이트 노이즈> 노아 바움백 2022

 레이건 시기 미국의 한 중소도시, 대학에서 히틀러를 연구하는 교수 잭 글래드니(아담 드라이버)는 운동 강사인 아내 바벳(그레타 거윅), 각자의 전 배우자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 둘 사이에서 낳은 아이와 살아간다. 잭은 앨비스 프레슬리를 연구하는 동료 머레이(돈 치들)의 부탁으로 그가 연구 프로그램을 받을 수 있게 돕는다. 잭과 바벳의 아이들은 TV와 라디오를 비롯한 일방향적 미디어를 통해 얻은 지식들에 열광한다. 그러던 중 마을 인근에서 유독물질을 실은 기차와 유조차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유독물질은 폭발과 함께 거대한 구름을 만들고, 마을 사람들은 대피하게 된다. 이 사건은 잭으로 하여금 ‘죽음’이라는 인간 보편의 질문을 던지게 한다. 돈 드릴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노아 바움백의 신작 <화이트 노이즈>는 ‘생과 사’라는 보편적인 질문을 매일 감내하고 살아가는 미국의 중산층 (지식인) 가정의 이야기다. 

 <화이트 노이즈>의 인물들은 얼핏 살아 움직이는 것 같지가 않다. 가식과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칼리지 온 더 힐’의 교수들을 보자. 잭과 머레이를 비롯한 이들의 강의는 강의보단 퍼포먼스처럼 느껴진다. 이 퍼포먼스는 강의실뿐 아니라 그들의 일상에서도 이어진다. 대형마트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규정된 삶의 리듬을 (재)확인하고 미묘한 충족감을 느끼는 장소이며, 모두가 지식인 같아 보이는 잭의 집에서 벌어지는 대화는 각자가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하는 무대에 가깝다. 할리우드 영화 속 자동차 충돌 장면들을 보여주며 “이 장면들에서 폭력성을 제외한다면 순수한 낙관주의만이 남는다”라고 강연하는 머레이를 보여주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그와 잭을 비롯한 영화의 주인공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무언가 결여된 세계를 보고 있다. 그들의 연구는 항상 낙관으로 향해 있으며, 70년대 히피의 외양을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그들이 눈앞에서 재현되는 폭력과 죽음을 외면하고서 낙관만을 외치고 있는 상황 자체에 관한 힌트를 던진다. 그리고 이들 앞에 실체가 있는 재난과 폭력과 죽음이 다가왔을 때, 그들은 이를 회피하거나, 도망치거나, 말을 잃는다. 재난 이후에서야 죽음과 삶에 관해 고민하는 잭과 재난 이전부터 그에 대해 고민하던 바벳의 대비는 (무려 히틀러를 연구하던) 잭의 인식론을 보여준다.

 다만 <화이트 노이즈>가 흥미로운 것은 여기까지다. 1985년에 출간된 돈 드릴로의 소설은 그 당시를 향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는 레이건 시대의 이야기다. 트럼프와 팬데믹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가 레이건 시대의 재림과도 같은 징후(큐아넌의 등장, 세계적인 우경화, <돈 룩 업>, 하드바디 캐릭터의 귀환 등)를 맞이하고 있다 하더라도, 80년대의 인물들과 2020년대의 인물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다르다. 잭의 아이들은 TV에 나온 비행기 추락 장면 보도를 놓치지 않고 지켜본다. 그들에겐 폭력과 파괴의 스펙터클이 시트콤보다 재밌다. 아이들은 TV와 라디오, 백과사전 등에서 습득한 지식으로 세계를 판단한다. 그들은 잭, 바벳, 머레이보다 빠르게 뉴스를 접하고 정보를 수집하여 주변에 전파한다. 물론 정확한 정보이지 않은 경우가 많기에, 그것들은 의도치 않은 가짜뉴스가 된다. 그리고 더욱 당연하게도, 이러한 상황은 2022년에 곧장 적용되지 않는다.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전제하였을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정보부족으로 인한 가짜뉴스라기보단 정보’오염’으로 인한 것이다. 여전히 레이건 시대를 배경으로 한 바움백의 영화는 이상한 방식으로 시대착오적이다. 마치 1985년의 영화가 2022년에 불시착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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