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13. 2022

어정쩡한 코스요리

<더 메뉴> 마크 미로드 2022

*스포일러 포함


 ‘호손’이라는 외딴섬에 위치한 레스토랑, 셰프 슬로윅(랄프 파인즈)은 1,250달러를 내고 그곳을 찾은 12명의 손님에게 최고의 메뉴를 대접하려 한다. 타일러(니콜라스 홀트)와 마고(안야 테일러 조이) 커플 또한 운 좋게 그곳을 찾는다. 하지만 슬로윅이 준비한 코스 요리가 시작되자 어딘가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앙투라지>, <왕좌의 게임> 등의 연출에 참여했고, HBO의 <석세션>을 성공시킨 마크 미로드가 오랜만에 내놓은 영화 신작이다. 본래 알렉산더 페인이 연출을 맡으려 했으나 무산되었고, 소위 ‘할리우드 블랙리스트’라 불리는 리스트에 각본이 올라가 있다가 2022년에야 극장에 걸리게 되었다. 

 <더 메뉴>가 겨냥하는 것은 명확하다. 호손을 찾은 이들 중 마고만이 밑바닥 출신이다. 그 밖의 인물들은 퇴물 배우와 그의 애인,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업가들, 여러 레스토랑을 폐업시킨 음식 비평가와 편집자, 음식보단 성욕을 탐내는 부자 등이다. 슬로윅의 광팬인 타일러는 마치 마술사의 비밀을 캐내려는 관객처럼 행동한다. 이 영화는 밑바닥 인생에서 탈출에 성공해 정상급 셰프가 된 슬로윅이 자신의 요리와, 메뉴와, 레스토랑과, 삶 자체를 비웃은 이들에게 건네는 복수이자,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하대했던 부하 요리사들에게 보내는 사죄다. 하지만 이 구도는 꽤나 일찍 무너진다.

 슬로윅의 코스 중 두 번째 메인디쉬는 “빵 없는 곁들임”이다. 말 그대로 빵 없이 소스 등만 먹는 것이다. 슬로윅은 서비스에 앞서 빵은 12,000년의 역사 동안 빈민들의 음식이라거나, 당신들은 ‘보통(common)’사람들이 아니니 보통사람의 음식인 빵은 빼고 준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 순간 슬로윅의 복수 겸 사죄는 어그러진다. 계급성이 메뉴 안에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더 메뉴>의 영화적 참조점은 아무래도 부뉴엘일 것이다. 12명이 ‘최후의 만찬’을 한다는 설정, 계급과 예술의 문제, <비리디아나> 등을 떠올리게끔 하는 ‘창녀’ 캐릭터 등등. 부뉴엘은 계급의 문제를 영화 자체의 문제와 동일선상에서 다뤘다. 시선과 권력의 문제, 종교와 공동체의 문제, 검열과 전복의 문제, 신성과 유희의 문제… <더 메뉴>는 그런 것에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관심이 없다고 하기보다는, 그런 것에 적절한 관심을 보일 방도를 모르는 것만 같다. 계급이나 권력의 문제와 관계없는 어떤 문제들 – 가령 퇴물 영화배우는 그가 출연한 후진 영화를 슬로윅이 소중한 주말에 보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초대되었다 – 은 이 영화의 지향점을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단순히 슬로윅이 미친 사람인 것일까? 그 스스로 음식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노라 집착했기 때문에 익숙하게 보아온 머저리 예술가가 되어버린 것일까? 

 무엇보다 이 ‘최후의 만찬’은 온전히 슬로윅의 권력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영화는 호손의 요리사와 직원들이 지닌 충성심, 혹은 그들이 이 최후의 만찬에 관여한 바를 늘어놓으며 어떤 정당성을 부여하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실소조차 만들어내지 못하는 실패한 블랙코미디일 뿐이다. 치즈버거를 만들며 처음으로 미소를 띠는 슬로윅의 얼굴은 그 자체가 영화 스스로의 실패, 마치 ‘땀 흘리는 노동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며 노동자를 탄압하는 자수성가한 자본가의 막말을 목격하는 것만 같은 당혹스러움이 그 정점에 놓여 있다. 그러한 지점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음식이 치즈버거와 스모어라는 지점은, 지극히 대중적이며 자극적일 뿐인 두 음식에 관해 다른 견해를 피력하는 슬로윅의 입을 빌어 스스로의 약점을 드러낸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른 시대에 잘못 당도한 듯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