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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02. 2023

인센티브라는 덫

<다음 소희> 정주리 2022

*스포일러 포함


 2017년 1월 전주 아중저수지에서 시신이 발견된다. 고교 졸업을 앞둔 학생이었으며, 현장실습으로 통신사 콜센터에서 계약 해지 방어팀에서 일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사망자는 계약서에 명시된 임금인 160만 5천원을 온전히 받지도 못한 채 폭언, 성희롱, 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척이나 슬프게도, 그의 죽음 이후에도 콜센터의 근무환경이 개선되었다거나 특성화고 현장실습 환경이 개선되는 등의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죽음을 전후하여 구의역 김 군의 죽음을, 제주도의 공장에서 일하던 고등학생의 죽음을, 여수에서 잠수작업을 하다 사망한 고등학생의 죽음을 목격하고서도 이렇다 할 변화는 목격되지 못했다. 이들이 받던 임금은 ‘현장실습’을 이유로 최처임금에도 도달하지 못했고, 산재처리 또한 받지 못했다. 가정폭력을 다뤘던 <도희야> 이후 8년 만에 돌아온 정주리의 신작 <다음 소희>가 다루는 이야기가 이것이다. 비정규직으로도 범주화되지 못하는 고교생 노동자들의 죽음.

 주인공 소희(김시은)는 춤을 좋아하던 고등학생이다. 특성화고 애견학과에 다니던 소희는 담임의 추천으로 모 통신사의 콜센터에서 일하게 된다. 전공과 전혀 관계없는 곳에서 일하게 된 그는 격무에 시달린다. 욕설이 섞인 폭언은 물론이고, 성희롱성 발언을 일삼는 고객들을 상대로 계약 해지를 ‘방어’하는 것이 그의 업무다. 업무에 충실하면서도 실습생으로만 채워진 콜센터 노동자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팀장 준호(심희섭)가 도움을 주지만 역부족이다. 이러한 폭언에 시달리는 것은 소희뿐만이 아니다. 한 차례 실습을 나갔다가 견디지 못해 학교로 돌아온 소희의 친구 준희(정회린)는 취업률을 이유로 자퇴를 강요받았다. 그가 택한 길은 여캠 BJ가 되는 것이었고, 그는 시청자들의 폭언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살아간다. <다음 소희>의 절반은 그러한 생활을 보여준다. 하청업체인 소희의 회사는 본사의 압박을 받고, 그들은 실습생이라는 이유로 주어지지 못할 인센티브를 미끼로 실습생들에게 과로를 강요한다. 소희가 다니던 학교는 취업률이라는 이름의 정량평가 속에서 살아남아야 학교가 살아남을 수 있기에 학생들을 과로와 폭언, 폭력이 기다리는 회사로 밀어 넣는다. 소희, 그리고 특성화고를 나온 소희의 친구들만이 등장하는 영화의 절반은 그러한 과정을 보여준다. 인센티브, 정량평가, 능력주의, 생존과 같은 말들로 모든 것을 합리화하는 시공간. 영화의 절반은 소희의 자살로 막을 내린다.

 영화의 나머지 절반은 소희의 자살 사건을 맡게 된 형사 유진(배두나)의 이야기다. 지방서로 잠시 좌천된 그는 항상 피곤한 얼굴로 사건을 대한다. 하지만 단순 자살 사건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사건을, 그는 파고든다. 이는 그가 이전의 소희와 알던 사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소희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들, 소희가 실습생으로 살아남기 위해 써야 했던 이중계약서와 그 밖의 사건들을 통해, 유진은 소희가 죽음을 택한 이유를 찾아 나선다. 이 과정에서 소희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소희에 앞서 자살한 준호 팀장을 대체해 부임한 새 팀장도, 하청업체의 중역과 본사의 인물도, 소희를 그곳으로 보낸 담임과 학교의 교감도, 학교를 책임져야 하는 교육청 장학사도 마찬가지다. 이들 모두는 경쟁사회의 노예로서 살아간다. 그들은 언제나 팀의 동료와, 회사의 다른 팀과, 본사의 다른 하청업체와, 옆반과, 다른 학교와, 다른 지역의 교육청과 경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노동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여기서 무의미하다는 것은 기본금에 인센티브를 얹어주는 임금체계 속에서, 이들의 경쟁-노동은 자신의 노동에 상응하는 정당한 임금을 받기 위한 (홉스적 의미에서의) 자연상태에 놓이게 된다. 모두의 적은 모두이며, 적대의 목표는 인센티브라는 이름의 임금이다.


 <다음 소희>는 이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주려는 야망으로 가득 찬 영화는 아니다. 소희가 주인공인 전반부와 유진이 주인공인 후반부로 양분된 이 영화의 스타일은 그간 한국의 사회파 영화들이 취해 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끔찍한 상황에 놓인 피해자를 보여주고, 사후에 그것을 파해치는 열혈 캐릭터를 배치하는 방식. 그 과정에서 관객이 목도하는 것은 무수한 정면 숏이다. 주로 소희와 소희의 주변인을 향하는 <다음 소희>의 정면 숏들은 어딘가 독특하다. 1.85:1의 화면비에서 펼쳐지는 이 정면 숏은 영화보단 다른 곳에서 보던 것만 같다. <다음 소희>는 그 답을 스스로 제시한다. 유진이 목격하게 되는 준희의 온라인 방송들이다. 무한경쟁만이 있는 생태계의 이미지. 소희가 바라보는 세계는 준희가 이미 진입한 세계와 다르지 않다. 다만 문제는 소희가 상대하는 세계는 준희의 것과 다른, 자신의 100%로 책임질 수도, 책임이 소득으로 돌아오는 세계도 아니라는 점이다. 어디까지나 실습생 신분의 소희는 자신의 노동을 책임질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 상황을 알아보는 것은 소희에 앞서 자살한 준호 팀장과 유진뿐이다.

 유진을 따라 소희가 경험한 세계를 탐색하는 영화의 후반부는 이 상황을 아래서 위로 향하는 방향으로 해부한다. 물론 이 과정은 예리하지만 피상적이다. 취업률 운운하는 교감에게 날리는 펀치는, 소희가 새로 온 팀장에게 날린 펀치처럼, 분명 통쾌하지만 잠시뿐이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장학사에게는 펀치를 날리지 못했기 때문일까, 어쨌든 <다음 소희>는 어떤 통쾌함을 관객에게 전달할 생각은 없다. 다만 소희가 경험했던 압박의 시공간을 유진을 경유하여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며, 그 구조의 껍데기라도 관객에게 와닿게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일정부분 성공했다. 성인기에 온전히 도달하기도 전에 죽음이 아른거리는 풍경을 목도해야 하는 청소년 노동자와 그러한 청소년을 뒤늦게 뒤쫓는 성인의 이야기, 영화 바깥의 이야기들을 끝없이 떠올리게 하며 머릿속을 뒤섞어 놓는 영화라는 점에서, <다음 소희>는 자신의 역할을 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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