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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06. 2023

욕심을 고백하는 영화

<바빌론> 데이미언 셔젤 2022

*스포일러 포함


 러닝타임의 1/3 지점에서 나오는 한 장면에서 시작해보자. 1927년을 알리는 자막이 등장하고, 무성영화 스타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가 화장실에 들어온다. 영화 프로듀서로 보이는 인물이 유성영화의 시대가 왔음을 알린다. “사람들이 영화에 소리가 나오는 걸 원할거라고 생각해요?”라는 잭의 대사와 함께 변기 칸에서 푸짐한 배변 소리가 들려온다. 상대방은 “왜 안 그러겠어?”라 대꾸한다. 데이미언 셔젤의 커리어가 <위플래시>와 <라라랜드>로 출발했음을 떠올려보면 이 장면은 기이하다. 마치 영화에 소리가 들어오는 것을 더러운 것이 영화에 속하게 된다는 것처럼, 영화가 배설행위처럼 천박하고 비위생적인 것이 된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물론 <바빌론>은 무성영화가 아니다. 셔젤의 오랜 파트너인 저스틴 허위츠가 이번에도 음악감독으로 참여하였고,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30분가량의 파티 시퀀스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 배설 장면들이다. 무성영화계의 스타들이 가득한 파티에 동원된 코끼리가 카메라를 향해 싸지르는 대변, 파티에 입장한 카메라가 보여주는 골든샤워, 코끼리가 저택을 헤집고 다니는 와중에도 섹스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 관객에게 뿌려지는 가짜 정액, 거물 제작자의 면상에 구토하는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 무성영화의 ‘프릭(freak)’들과 스너프로 넘실거리는 숨겨진 지하공간을 “LA의 똥구멍”이라 명명하는 마약상 맥케이(토비 맥과이어) 등등. 이 영화는 똥에서 시작해 구토와 똥구멍을 거치는 여정이다. 그 과정을 거치는 이는 어린 시절 LA로 넘어온 멕시코인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다. 영화 일이 하고 싶던 그는 무작정 거물 제작자의 하인이 되고, 파티에서 잭의 눈에 들어 영화촬영장에 입성하게 된다. 무비스타가 되고 싶었던 넬리 또한 이 파티를 통해 할리우드에 입성한다. 

 영화의 타이틀은 파티 시퀀스가 끝나고 나서야 등장한다. 이 파티는 바빌론을 타락과 죄악의 도시로 묘사했던 성서 속 모습과도 같다. 뒤이어 등장하는 촬영장 시퀀스, 허허벌판에서 수 편의 크고 작은 영화가 동시에 촬영되는 시끌벅적한 모습은 파티의 연장선처럼 느껴진다. 거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곳이지만 체계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영화에서의 죽음은 실제 죽음이 아니라 좋다”던 매니의 대사가 무색하게, 그는 한 스태프가 소품용 창에 찔려 죽은 모습을 목격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곳에서 제작되는 두 개의 영화, 넬리가 출연한 소규모 영화와 잭이 출연하고 매니가 얼떨결에 뛰어들게 된 대규모 전쟁영화가 마침내 영화로 성립되는 순간으로 무마된다. 다시 말해 이들은 영화라는 ‘바빌론’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는 이들이다. 누군가의 부상과 죽음, 신인과 중견 배우 사이의 알력 다툼, 계획 바깥의 난장판 속에서 부서진 카메라들, 세트가 불타버리는 화재는 모두 없던 것으로 치부된다. ‘시네마천국’ 그 이면에 있던 죄악은 영화의 완성과 함께 망각된다.

 이미 한 시간이 지나갔지만, <바빌론>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1927년 유성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할리우드에 퍼지는 장면부터다. 글의 첫 문단에서 묘사한 그 장면 말이다. 이미 더러움 속에 있던, 고급예술이 되지 못한, 천박한 보드빌 연극의 후예인 무성영화가 유성영화의 등장을 혐오하는 듯하다. 하지만 매니, 넬리, 잭은 모두 유성영화에 적응해야 한다. 잭은 툴툴대면서도 할리우드 중견 배우들이 모인 뮤지컬 장면을 찍고, 넬리는 한 씬을 십 수 번 반복하며 적응되지 않는 유성영화 촬영과 대결한다. <바빌론>의 두 번째 한 시간은 유성영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무성영화 스타들의 이야기다. 잭은 자신의 진지한 발성연기를 보고 폭소를 터트리는 관객들을 목격하고, 넬리는 목소리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현장에서 배제되기 시작한다. 이들의 모습은 저택에 틀어박혀 카드나 치던 <선셋 대로>의 글로리아 스완슨과 버스터 키튼(이들은 <바빌론>에서 대사로 언급된다), 혹은 무성에서 유성으로의 이행기에 등장한 새로운 스타의 이야기였던 <사랑은 비를 타고>(잭이 폭소하는 관객을 목격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오마주다)를 떠올리게끔 한다. 

 <바빌론>의 마지막 한 시간은 더 이상 할리우드에 속하지 않게 된, 과거의 스타들의 현재의 유령으로 변모하는 과정이다. 자신을 과거의 인물이라 악평한 저널리스트를 찾아간 잭은 자신이 “지금은 쓸모없지만 영원히 남을 과거의 유령”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살한다. 매니는 도박 빚에 곤란해하던 넬리를 도와주고 오랜 시간 하지 못했던 사랑 고백까지 하지만, 그는 결국 빚쟁이 마약상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매니는 넬리를 위해 동료와 마약상 맥케이의 소굴인 “LA의 똥구멍”까지 도달하지만, 그곳에서 목격하는 것은 ‘천박한’ 무성영화의 이면에 놓인 프릭쇼, 포르노, 스너프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매니가 목격하는 것은 더 이상 스크린을 점유할 수 없게 된 바빌론의 타락한 단면이다. 스크린을 향해 배설되지 못한, “LA의 똥구멍” 속에 머물러 있는 영화의 천박한 단면이 여기에 저장되어 있다. 매니가 이곳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친 매니가 결국 넬리와 재회하지 못했으며, 넬리의 부고는 테크니컬러의 등장을 알리는 기사에 밀려 작게 소개될 뿐이다. 

 1952년에서 시작되는 영화의 에필로그, 도망치듯 떠나 뉴욕에서 살던 매니는 가족과 함께 LA로 여행 온다. 가족을 호텔로 보내고 홀로 극장을 찾은 그가 보게 되는 영화는 <사랑은 비를 타고>다. 무성영화 배우가 어색한 유성영화 연기를 하는 장면에서 다른 관객들은 폭소하지만, 그 시기를 살아온 매니는 눈물을 흘리며 오열한다. 오열하는 그의 모습과 함께, 영화의 역사를 담은 몽타주가 등장한다. 머이브리지의 주프락시스코프와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으로 시작해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2>와 <아바타> 등으로 이어지는 ‘영화사’적인 이미지들의 몽타주가 이어진다. 이 몽타주는 극 중 배경인 1952년 이후의 영화들, 무려 <아바타>까지 포괄한다. 얼핏 <시네마천국>의 마지막 키스 몽타주가 떠오르지만, 이 몽타주는 넬리의 첫 영화과 인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쇼트들과 뒤섞이며 ‘영화’와 ‘사랑’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몽타주해내려 한다. 

 결국 <바빌론>은 할리우드라는 이름의 탐욕과 죄악의 도시가 배설하듯 선보이던 것들, 천박한 예술이기에 모두를 위한 것이었던 영화가 맞이한 첫 번째 거대한 변화의 순간을 경유하여 영화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영화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전환되는 시점의 이야기다. 영화 속 유령으로 불멸할 배우들은 모두 죽었다. <바빌론>은 영화의 가장 큰 모티프인 <사랑을 비를 타고>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선보이는 비극이다. 하지만 셔젤은 자신이 애정하는 영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지 않는다. 왜 퇴락해 가는 무성영화 배우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는가? 그가 애정하는 영화의 범주는 무엇인가? ‘활동사진’부터 ‘CG영화’까지 무수한 이미지를 동원하는 마지막의 몽타주는 만 레이의 초현실주의 영화나 마야 데렌 등의 실험영화, 윈저 맥케이의 애니메이션 등 또한 인용하지만 다큐멘터리 영화는 등장하지 않는다. 맥락 없이 흩뿌려져 있는 듯한 ‘영화사적’ 이미지들은 셔젤이 생각하는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도, 그의 확고한 취향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바빌론>은 시각매체인 영화가 시청각매체로 전환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몽타주에서는 셔젤이 영화를 어떠한 매체로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야심 가득한 엔딩은 <바빌론> 자체를 뒤흔든다. <바빌론>은 어떠한 영화인가? 영화라는 매체에 관한 것인가? 영화사에 관한 것인가? 태생부터 천박한 예술이었던 영화를 그 자체로 사랑하기 위한 영화인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에 사용된 1.33:1 화면비의 파라마운트 로고로 시작한 영화는 곧장 영화가 담아낸 시기 이후인 1953년에 출시된 시네마스코프 화면비로 넘어간다. 단순히 화면비가 별로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셔젤이 <라라랜드>에서는 시네마스코프의 옛 로고를 도입부에 삽입했고, <퍼스트 맨>에서는 당시 홈비디오였던 8mm 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IMAX로 블로우업해 삽입했던, 영화를 구성하는 매체에 무지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려보자. 그는 극 중 언급되는 카메라 기종인 ‘Bell & Howell 2709’ 카메라를 실제로 사용해 <바빌론>의 영화 속 영화를 찍었다. 1912년에 개발된 카메라를 2022년에 사용하고 있지만, 영화의 첫 장면부터 영화 속 시대엔 없던 화면비와 CG 코끼리를 마주하게 된다. <바빌론>에 동원된 영화-기술들을 보고 있자면, 원하는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영화 속 인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셔젤은 무엇이 되고 싶었던 걸까? 영화(의 역사)를 목격하며 눈물 흘리는 시네필인가, 원하는 장면을 얻기 위해선 촬영장에서 발생한 죽음도 무시하는 (스파이크 존즈가 카메오로 연기한) 감독 같은 독재자인가? <바빌론>이 세 시간 동안 보여주는 천박한 예술로서의 영화는 “(브로드웨이 연극은) 10만 명이면 많이 본 것이지만 영화는 그것의 100배는 된다”는 잭의 대사로 함축된다. 하지만 셔젤은 자신이 폭소하는 관객들과 같은 영화를 보며 오열하는 감독임을 자백한다. 그는 자신이 애정해 온 영화에 대한 영화들, 이 영화가 끌어오는 무수한 작품들을 넘어설 수 없음을 실토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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