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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09. 2023

다정함의 쓸모?

<이니셰린의 밴시> 마틴 맥도나 2022

 아일랜드 내전이 막바지로 향하던 중인 1923년의 4월, 작은 섬 이니셰린에 사는 한량 파우릭(콜린 파렐)은 매일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수다 떨던 콜름(브랜든 글리슨)의 난데없는 절교 선언에 당황한다. 여동생 시오반(케리 콘돈) 역시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는 상황, 파우릭은 계속 콜름과 마을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려 하지만 답을 구하는 데 실패한다. 콜름은 “너는 지루한 사람”이라는 말만 반복하며, 계속 말을 걸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버리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한다. 마틴 맥도나 감독과 두 주연 배우가 <킬러들의 도시> 이후 10여 년 만에 재회한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는 감독이 써두었던 극본을 원작으로 삼는 작품이다. 극작가로 활동할 당시엔 아일랜드 배경의 작품을 여럿 만들었지만,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삼는 영화 연출작은 처음이다.

 마틴 맥도나가 훌륭한 각본가라는 사실을 의심할 사람은 많지 않다. <킬러들의 도시>에서 아이러니를 만들어내던 방식이라던가, <쓰리 빌보드>에서 여러 인물과 언쟁을 벌이는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대사를 보고 있자면 마틴 맥도나가 어떤 부분에서 탁월한 이인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장점은 신작 <이니셰린의 밴시>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매일 오전 가축을 산책시키고 우유를 상점에 납품하지만 오후 2시가 되면 언제나 펍으로 향하는 한량 파우릭이 갑자기 절교를 선언한 콜름의 모습에 당황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상황을 수소문하고 다니는 초반부를 보자. 파우릭은 자신이 콜름과 다툰 적이 없음에도, “싸운 것 아니냐”는 펍 주인장의 말에 스스로를 의심한다. 몇 사람의 말을 더 거친 이후엔 “우리 지금 싸우고 있는 것 같아”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마틴 맥도나는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드러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다. 콜름이 절교를 선언한 이유는 영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추측할 수는 있지만 콜름 자신의 입으로는 절대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갑자기 무료한 일상에 회의감을 느끼고 죽은 후에도 남을 뭔가를 만들고 싶어졌다는 말은, 콜름 자신의 계획일 뿐 절교에 관한 해명은 되지 못한다.

 이유 없는 절교, 그것을 밀고 나가기 위한 방식으로 선택된 자해, 파우릭의 다정함을 인정하면서도 무용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 등 <이니셰린의 밴시>는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자신의 곡 제목을 ‘이니셰린의 밴시’로 지었지만, 이니셰린에는 밴시가 없다는 물음에 “소리 내지 않는 밴시일지도 모르지”라는 콜름의 대답은 스스로의 행동에 아이러니가 있음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지점에서 <이니셰린의 밴시>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정 반대에 놓인다. 전자가 다정함만으로는 갈등이 해결될 수 없음을, 더 나아가 어떤 이상한 갈등상태에서는 다정함(niceness)은 완벽하게 쓸모없는 것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면, 후자의 작품은 다정함(kindness)이 무려 세계(들)를 구하는 유일한 수단이라 주장한다. 물론 두 작품은 아주 다른 톤을 지니고 있다. 전자가 두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아일랜드 내전에 관해 발화하려 한다면, 후자는 멀티버스라는 거창한 소재를 동원해 모녀관계를 말하고자 한다. 

 두 작품이 다루는 ‘다정함’의 층위는 다르다. 다만 <이니셰린의 밴시>의 경우 그것을 거절하거나 거부하는 방법이 자해를 넘어 서로 폭력적 행위를 주고받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콜름은 손가락을 잘라 파우릭의 집에 던지고, 하필 그것을 삼킨 파우릭의 당나귀 제니는 질식해 죽는다. 파우릭은 그 대가로 콜름에게 집을 불태우겠다 선언하고 실행에 옮긴다. 이유를 명확히 하지 않은 절교는 이상한 방식으로 분출된다. 영화는 달력을 보여주거나, 아일랜드 본토에서 벌어지는 포격 소리를 들려준다거나, 콜름의 대사를 통해 수 차례 내전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등 여러 방식으로 아일랜드 내전의 이야기를 두 주인공의 갈등과 결부시킨다. 물론 내전이 두 사람의 갈등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틴 맥도나는 두 사람의 갈등을 아일랜드 내전을 독특한 방식으로 은유한 것임을 숨기지 않는다. 갑작스레 분열되어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갑작스레 절교를 선언하고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치닫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와 닮았다. 


 다만 <이니셰린의 밴시> 스스로가 두 인물의 이야기를 넘어선 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듯한 몇몇 순간들은 당황스럽게 다가온다. 이를테면 이니셰린의 전경과 함께 바다 너머에 있는 본토를 보여주는 몇몇 인서트 숏들은, 얼핏 평온하기 짝이 없는 풍경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아이러니를 강조하기 위한 기능을 담당하는 것과 동시에, 이 이야기가 이니셰린이라는 섬을 넘어선 큰 이야기임을 주장한다. 이 ‘친절한’ 순간들은 은유가 직유로 변화하며 다소 힘이 빠지는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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