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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pr 21. 2023

<러스티 브라운>과 <지영>

1. 주변의 추천(특히 윤아랑 평론가와 아니 작가의 강력한 추천)으로 두 만화를 읽었다. 크리스 웨어의 <러스티 브라운>과 지영의 <지영>은 외적으로 전혀 다른 작품이다. <러스티 브라운>은 2001년부터 웨어의 독립적인 연속간행 만화 시리즈 Acme Novelty Library에서 연재되었고 2019년 책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이 책은 러스티 브라운과 초키의 하루를 담은 에피소드와 등장인물 소개에서 다룬 7명의 인물 중 세 명(W. C. 브라운, 조던 린트, 조애나 콜)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으며, 나머지 네 인물의 각 에피소드가 여전히 연재 중이다. (언젠가 책으로 묶여 나오겠지?) <지영>은 '지영'이라는 이름의 작가가 웹 플랫폼인 포스타입을 통해 연재한 만화 중 현재 남아있는 작품을 모두 모은 것이다. 두 작품은 형식적으로나 매체적으로나 정 반대에 놓여 있다. 묵직하고 거대하며 익숙한 만화책/그래픽노블의 읽기 방식에서 일정 부분 벗어나 있는 <러스티 브라운>과, 웹 연재만화를 출간물에 맞게 편집했기에 웹툰 단행본의 방식에 가까운 방식으로 제작되고 읽히는 <지영>의 독서 행위도 상당히 차이가 있다. <러스티 브라운>을 읽을 때는 책상에 앉아 도저히 양손으로 들고 읽을 수 없는 크기와 무게의 책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면, <지영>은 대부분의 독서와 비슷하게 침대에 누워서 책을 들고 읽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나는 두 책의 방식, 특히 작가가 자신을 작품에서 드러내는 방식에서 기묘한 유사성을 느꼈다.

2. <러스티 브라운>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이 책은 하나의 큰 줄기를 가진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슈퍼걸 피규어에 집착하며 음침한 망상을 하는 소년 러스티 브라운의 하루가 그려지고, 그와 같은 학교로 전학오게 된 초키와 앨리스 남매의 이야기가 러스티의 이야기 아래 작은 스트랩을 구성하며 동시에 이어진다. 어느 순간 두 타임라인은 하나로 합쳐진다. 35mm 필름의 이미지 부분과 사운드트랙 부분의 구성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이 구성은 윤아랑의 소개글 제목처럼 "어떤 웅성거림"의 시각화로 다가온다. 영화의 영역에서 이미자와 사운드가 서로 상보적 관계에 있고 그것을 교란하는 시도가 종종 등장해왔던 것처럼, <러스티 브라운> 초반부의 이 시도는 서로 다른 두 이야기가 1975년 네브래스카의 작은 마을 오마하의 하루 속에서 웅성대며 서로를 침범하고 연결됨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크리스 웨어 자신도 인물소개의 7명 중 한 명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인물은 웨어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는 인물일 수는 없다. 웨어는 1967년 태어나 네브래스카 오마하에서 나고 자랐다. 책에 등장하는 미술교사 웨어보다는 러스티가 실제 작가의 경험과 가까워 보인다. 때문에 미술교사 웨어는 작가 크리스 웨어의 성격과 외모와 유사할지라도 그는 아니다. 다만 미술교사 웨어는 러스티를 온전히 (작가에서 분리된) 픽션의 인물로 구성하기 위한 수단이자, <러스티 브라운>이라는 만화의 구성의도를 만화의 내적 구성 안에서 서술하고자 하는 인물처럼 다가온다. 그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가 떠올리는 문장들은 다른 인물들처럼 말풍선 안에 배정된 것이 아니다. 그의 속마음 문장들은 말풍선 없이 그림 위에 올려져 있다. 이는 차라리 책의 맨 처음, 공간소개 그림 다음에 등장하는 눈송이에 관한 문장들의 지위에 가까워 보인다. 그가 두 번째로 등장하는 미술수업 장면에서 눈송이에 관한 이야기(물론 눈송이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하는 인물이 웨어뿐만은 아니다)를 꺼내는 모습에서 웨어라는 캐릭터의 지위는 독특해진다. 미술작가 웨어는 전형적인 '불리' 캐릭터인 조던 무리의 대마를 빌려 피우고 수업 중 학생의 치마 속을 훔쳐보는 음침한 인물이다. 크리스 웨어는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닌 인물을 만화에 등장시키며 러스티 브라운과 자신을 분리하면서도 자신을 작품 안에 기입한다. 웨어는 강박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칸을 분절하고 극 중 극을 삽입하고, 각 인물의 에피소드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네브래스카의 실패자들을 그려낸다. 웨어는 그 속에서 자신 또한 네브래스카의 실패자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다른 실패자들과 공유되는 '실패의 가족친화성'을 <러스티 브라운> 내내 펼쳐낸다. 

3. "조건만남"이라는 제목을 가진 <지영>의 첫 장은 "지영이는 지영이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담긴 컷으로 끝난다. 이는 당연한 이야기이다. 성노동자이자 익명의 트위터리안이며 웹 만화가였던 작가의 '지영'이라는 이름은 분명한 개인을 지칭함과 동시에 완전히 익명적인 이름이다. 스스로도 가장 흔한 여자 이름 목록에서 가져왔다고 작품 속에서 밝히는 이 이름은 <지영>의 이야기가 지영의 경험담인지, 동료들에게 들었던 이야기인지, 완전한 창작인지 구별할 수 없는 방향으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작가 자신이면서 작가 자신이 아닌 지영의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경험된 것일까? 이는 만화에 담긴 이야기의 신뢰성을 판단하고자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화 속에서 지영은 각 장의 소제목을 따라 조건만남, 모던바, 키스방, 호스트바 등 다양한 종류의 성노동 현장에서 일했고, "엠생양아치"인 정호라는 인물과 연애를 했으며, 호빠에 가거나 남창을 부르는 등 성구매자이기도 했다. 성판매자, 성구매자, "엠생", 정신질환자, 지영을 지칭할 수 있는 여러 이름들은 '지영'이라는 한 인물의 정체성을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눈에 담을 수 없는 복잡한 총체로서의 '지영'을 제시한다. "키스방" 챕터의 마지막에서 다뤄지는 것처럼 성노동의 현장과 성노동자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지만 계속하여 없는 존재로 다뤄진다. 문을 나서는 순간 그들은 다른 존재가 되고, 작은 간판의 존재와 온라인에 흩뿌려진 광고들만이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지영>은 그렇게 지워지는 세계에 관한 만화다. 이 세계는, 마치 '지영'이라는 지칭이 그러한 것처럼, 특정한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것임과 동시에 한없이 추상적인 상상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기도 한다. 독자는 지영이라는 인물을 따라 그 세계의 단면을 목격한다. 그 세계는 종종 낭만적인 연애의 추억이나 고양이를 쓰다듬던 기억이기도, 화자가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는 계기이기도, 폭력과 폭력과 폭력만 존재하는 것 같은 공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세계는 지영이 돈을 벌고 사람을 만나며 생활하는 곳이다. 지영은 그 세계 내의 존재자로서 그 세계를 경험한다. 특정한 개인을 지칭함과 동시에 익명적인 이름인 '지영'은 그러한 이중적인 존재로서만 이 세계를 경험하고 그려낼 수 있다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때문에 지영 작가가 지영이라는 인물을 그린 만화 <지영>은 그러한 세계를 그려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전략이 된다. 포스타입에 업로드된 개별 단편의 맥락에서는 이 전략이 성립되지 않았을지라도, 이것이 하나의 책으로 읽힐 때에는 그러하다.


4. <러스티 브라운>과 <지영>의 작가들은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닌 인물을 작품 속에 기입한다. 이러한 방식은 하나의 책으로 출판된 픽션의 맥락에서 작가를 분리함과 동시에 작가의 분신을 작품 안에 존재시킨다. 자아(혹은 작가 자체)의 이중화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전략은 두 편의 픽션이 자전성을 가짐과 동시에 그것이 작가의 실제 경험이냐는 문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는 두 작품이 가진 서로 다른 픽션의 전락, <러스티 브라운>의 경우라면 각 인물의 맥락에서 경험된 상황의 서술, <지영>이라면 '지영'이라는 익명적 개인의 경험과 같은 것들이 가상과 진술 사이에서 벌이는 줄타기에 가깝다. 때문에 두 작품이 갖는 어떤 유사성, 이를테면 <러스티 브라운>이 강박적일 정도로 정교하게 그려내는 실패자들의 삶과 거칠게 그려진 <지영> 속 지영의 삶이 갖는 '사회'라는 구성체 속에서 비가시화되는 '실패된 삶'의 유사성은 작품 속에 기입된 작가의 작가가 아닌 이미지를 통해 구현된다. 그러한 연유로, 덧붙여 두 작품을 비슷한 시기에 연달아 읽게 되었다는 이유로, 나는 두 작품을 겹쳐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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