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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y 15. 2023

지워진 존재

<토리와 로키타> 다르덴 형제 2022

*스포일러 포함

    

 <토리와 로키타>의 마지막 장면은, 다르덴 형제와 종종 비교되곤 하는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연상시킨다. 이는 꽤나 자연스러운 연상이다. 주인공의 장례식으로 끝나는 두 영화는 결국 유럽 사회의 실패를 증거한다. 두 작품은 벨기에와 영국 각각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투쟁들을 다룬다. 전자의 주인공은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넘어온 난민이며, 로키타(졸리 음분두)와 토리(파블로 실스)는 남매를 연기하며 체류증을 받고자 고군분투한다. 후자의 주인공은 나이 든 목수 다니엘로 심장병으로 인해 노동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실업급여를 받고자 고군분투한다. 두 영화 속 인물들의 분투는 최종적으로 실패한다. 제도는 이들을 포용하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선별과 배제를 목적으로 기능한다. 그 속에서 이들은 비슷한 처지의 타인과 연대하지만, 이 연대는 그들의 존재를 증명해주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두 영화 모두 제도를 타겟으로 삼는 듯하지만 그것을 묘사하기 꺼린다는 점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끊임없이 제도에서 튕겨져나오는, 마우스 조작법도 모르는 노인이 전산화된 제도 앞에서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상황을 담는다. 하지만 영화에 중점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그저 냉담할 뿐인 공무원-노동자 뿐이다. 이 영화는 말단 노동자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얼굴을 제도의 표면으로 내세우고, 그것만으로 제도를 묘사하려 한다. <토리와 로키타>는 그것의 묘사에도 크게 관심이 없는 것만 같다. 학대 피해자였던 토리는 그 사실을 인정받아 체류증을 얻었다. 하지만 로키타는 자신이 토리의 누나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체류증을 받을 수 있다. 로키타의 인터뷰 장면으로 시작한 영화는 그의 처지를 간결하게 보여준다. 두 사람으 시설에서 생활하며 밀입국 브로커와 고향에 보낼 돈을 벌기 위해 대마초를 판다. 대마초를 재배하고 유통시키며 수입을 내는 현지인 일당은 따로 있지만, 토리와 로키타는 마약 유통이라는 범죄행위의 표면으로서, 언제든지 다른 난민으로 교체 가능한 존재다. 영화는 체류증에 연관된 두 주인공의 서로 다른 처지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현재를 소개하는 배경에 머문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두 사람을 모두 포용할 수 없는 제도에 관한 것이라기보단, 합법적 제도 속에 속해야 한다는 전제를 두고 그 위에서 생존을 위해 불법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려낸다. 이러한 영화의 방향은 결국 체류증을 받지 못하는 상황, 체류증을 받기 위해 인터뷰에서 자신의 과거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을 이차적인 문제로 격하시킨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제도를 지적하면서 말단 노동자를 내세움으로써 나이브한 제도 비판에 머문 것과 유사하게, <토리와 로키타>는 비판의 화살을 제도에서 마약상 일당으로 옮긴다.      

 물론 그러한 비판 또한 유효한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토리와 로키타>에서 비판의 대상을 슬그머니 옮기는 것, 밀입국과 체류증을 빌미로 우정으로 맺어진 남매에게 불법 노동을 사실상 강요하는 브로커와 마약상 일당을 겨냥하는 것은, 결국 핵심을 벗어나는 일이다. 다르덴의 영화는 움직이는 인물들의 동선과 몸짓을 통해 비판의 방향을 드러내왔다. <내일을 위한 시간> 속 산드라의 동선과 표정은 비인도적인 사측의 강요를 어떻게든 돌파하려는 강인한 여성의 초상이었고, 우연히 부모가 된 <더 차일드> 속 방랑자 커플의 모습은 빈곤 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관한 윤리를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다르덴의 카메라는 그들의 모습을 핸드헬드와 자연광 속에서 담아냈다. 마치 그들의 존재는 그들의 몸짓만으로 증명된다는 듯한 태도로 그들을 담아왔다. 그들의 영화에서 처음으로 외부적 존재, 즉 난민이 등장한 <언노운 걸>부터 그 태도는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언노운 걸>의 난민 소녀는 인터폰 화면을 통해 짧게 존재를 드러낸 뒤 영화 전반에 걸쳐 부재한다. <소년 아메드>는 일종의 과대표된 존재로 아메드를 담아낸다. <토리와 로키타>는? 다르덴의 영화에 비-벨기에인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래 처음으로, 두 주인공은 카메라를 통해 관객의 눈앞에 현현하며 자신의 존재함을 증명한다. 다만 그뿐이다. 그들의 몸짓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묘사해내지만, 영화는 그 이면의 추상적인 것들을 묘사해내지 못한다. 카메라는 그들의 ‘존재’는 증명해주지만, 그 존재를 적극적으로 추상화하여 지워내는 압력을 찍어내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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