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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y 27. 2023

잠정적 세계의 교환

<말없는 소녀> 콤 바이레드 2021

 1981년 아일랜드의 작은 시골 마을, 코오트(캐서린 클린치)는 가정형편으로 인해 여름방학 동안 친척 에블린(캐리 크로울리)과 션(앤드류 베넷)의 집에 가게 된다. 젖소를 기르는 한적한 시골집에서, 말수가 적은 소심한 소녀 코오트는 점차 마음을 열게 된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를 원작으로 삼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진다. 최근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제작되는 어린이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들, 이를테면 루카스 돈트의 <클로즈>나 샬롯 웰스의 <애프터 썬> 같은 영화들이 얼핏 떠오른다. <말없는 소녀>는 그러한 영화들과 다른 노선을 취한다. 인물의 어린 시절에 벌어진 특정한 사건, 특히 트라우마적이거나 폭력적인 사건을 등장시키거나 암시하며 그로 인한 변화를 목격해 내려는 듯한 영화들과 다르게, 이 영화는 그러한 사건들에서 일정 부분 벗어나 있다.      

 물론 <말없는 소녀>의 코오트가 처한 상황이 안온하고 평온한 상태라는 것은 아니다. 이미 다섯 명의 자녀를 둔 집안에서 또다시 임신한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무관심하고, 위압적인 아버지는 경마와 술에 빠져 있다. 영화는 코오트가 직접적인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을 뿐, 그가 놓인 폭력적인 상황을 충분히 보여준다. 다만 그 상황은 코오트가 먼 친척 집에 보내지며 영화의 잠정적인 영역으로 옮겨지고, 방학 동안 지연될 뿐이다. 영화의 제목처럼 코오트는 말이 별로 없다. 교과서를 읽는 학교 수업에서도 말을 더듬고, 가족이나 친구와 긴 대화를 나누지도 못한다. 영어를 쓰는 코오트의 아버지와 아일랜드어를 쓰는 나머지 등장인물 사이의 간극은 코오트가 처한 언어적 난감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일랜드는 영어와 아일랜드어를 모두 공용어로 사용하기에, 언어가 다르다는 점이 코오트를 ‘말 없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에 등장하는 언어의 다름은 코오트가 온전히 자신의 말을 하지 못하는 환경의 난감함을 곧이곧대로 보여준다. 영어에 비해 악센트가 강해 다소 무뚝뚝하게 들리는 에블린과 션의 아일랜드어는, 코오트의 상황을 들어주고 들여다 봐주지 못하는 아버지와 학교 선생 등의 영어 화자와 다른 인상으로 다가온다.      

 코오트를 말하게 하는 것은 언어적 발화보단 제스처다. 비좁은 집에서 다수의 가족과 함께 살아가던 코오트는 집이나 교실 대신 눈에 띄지 않는 풀숲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반면 에블린과 션의 집은 오로지 세 사람뿐이다. 종종 부부의 친구나 주변인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세 사람의 식사장면은 그들이 그들만의 루틴을 찾아가는 상황을 보여준다. 코오트를 씻겨주고 머리를 빗겨주는 에블린은 그에게 없었던 어머니의 모습을, 함께 소젖을 짜고 농장을 청소하며 친밀해지는 션은 아버지의 모습을 각각 보여준다. 대화를 통해 가까워지기 이전에, 두 어른은 ‘어른’으로서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준다. 영화 중반 즈음 등장하는 두 사람의 과거는 코오트와 부부 사이의 관계에 하나의 겹을 더한다. 코오트에 대한 부부의 호의가 비록 두 사람의 죄책감에서 시작된 것일지라도, 그들의 따뜻한 손길은 코오트에게 그간 열리지 않았던 세계를 열어준다. 비록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세계가 다시 닫힐 수 있음을 보여주지만 말이다. 코오트의 방학이 본가의 폭력적 상황을 영화 바깥의 잠정적 영역으로 미뤄두는 것이었다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코오트의 방학 동안 열린 새로운 세계를 다시금 잠정적 영역으로 옮긴다. 비록 코오트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전에 없던 세계가 그의 주변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새로운 희망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말없는 소녀>는 인물을 조여 오는 사건의 나열 없이도 그 세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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