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 롭 마셜 2023
2010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시작된 디즈니의 라이브-액션 프로젝트는 계속 이어진다. 매 영화가 나올 때마다 벌어지는 불필요하며 소모적인 논쟁들은 각각의 영화를 온전히 평가하는 것을 방해한다. <인어공주>를 혹평하는 의견은 여러모로 정치적 올바름을 표방하며 30여 년 전의 이야기를 ‘업데이트’한 것 자체에 대한 반감으로 받아들여지고, 호평하는 의견은 영화의 만듦새와 관계없이 영화가 표방하는 외적인 가치만을 좇는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어공주>는 <라이온 킹>이나 <정글 북>, <피노키오>, <미녀와 야수>만큼이나 실패한 영화다. 디즈니의 앞선 라이브-액션 영화 대부분은 디즈니의 과거 애니메이션을 직접적인 원작으로 삼으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CGI를 통해 ‘실사화’된 비인간 캐릭터들의 비주얼은 원작의 생동감, 애니메이션의 리듬, 개성 등 기존의 모든 장점을 제거해 버린다. <인어공주>는 이러한 단점을 고스란히 반복한다.
물론 영화가 표방하는 가치에는 반대할 수 없다. <미녀와 야수>의 벨이 그랬던 것처럼, <인어공주>의 에리얼(할리 베일리) 또한 원작 애니메이션보다 주체적인 캐릭터가 되었다. 다양한 인종의 캐스팅과 다양한 문화의 반영과 같은 요소들도 비백인 인종의 비중이 늘어나는 미국의 현재를 반영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디즈니의 이러한 행보는 다른 방식의 문화제국주의, 월트 디즈니가 꿈꾸던 백인 기독교인 부르주아의 ‘교훈 설파’ 전략과 크게 동떨어져 있지 않다) 다만 그러한 현실적 가치의 반영이 의미 있는 것과 영화의 완성도는 별개다. <인어공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글 북>과 <라이온 킹>이 그랬던 것과 동일하게, ‘실사화’라는 개념의 오용에 있다. 실사를 방불케 하는 CGI 애니메이션의 사용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캐릭터화된, 의인화된 비인간 캐릭터들이 매력적일 수 없다는 점이다. 애니메이션이기에 일정 부분 허용되었던 이미지적 변형, 이를테면 열대어인 플라운더(제이콥 트램블레이)와 게인 세바스찬(다비드 디그스)에게 입술이 달려있다는 점 같은 것들이 실사화의 과정에서 기괴한 이미지로 변화한다. 바다새인 스커틀(아콰피나)이 바닷속에서 장시간 활동하는 모습처럼 ‘실사’의 모습으로 벌어지기엔 어색하다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는 장면도 즐비하다. 영화의 대표곡인 “Under The Sea” 뮤지컬 시퀀스는 <라이온 킹>의 뮤지컬 시퀀스보다 어색하다. 왈츠를 추는 실사풍의 열대어와 불가사리를 보고 있자면, 의인화가 벗겨진 애니메이션의 비인간 캐릭터들이 얼마나 어색한 존재들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인어공주> 속 바다가 바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면 바다 위에서 바다를 비추는 장면은 바다처럼 보이는 반면, 바닷속에서의 장면들은 그곳이 물속처럼 보이지 않는다. 바다 바깥과 바닷속의 조도가 다른 장면이 여럿 등장하는 것은 물론, 수조에 물을 담아두거나 실제로 물을 뿌리며 진행된 수면 위의 장면과 달리 오로지 그린스크린 앞에서 촬영된 바닷속 장면 사이의 간극은 이미지적으로 극복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의 탈로칸 왕국 묘사가 그랬던 것처럼 사실성에 방점을 찍은 조명과 채도는 종종 캐릭터의 얼굴마저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 어두움을 활용하는 것과 어둡기만 한 것은 다른 것이며, 동시에 그저 어둡기만 한 것과 어두워 보이는 화면 연출은 또 다른 것이다. <인어공주>는 그중 부정적인 방식만을 취한다. 에리얼이 모은 수집품들은 종종 물속이 아니라 지상에 있는 것처럼 바닥에 떨어지고, 물속의 사물들이 부딪히는 소리는 (물론 수중에서 음성대화와 노래가 들린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긴 하지만) ‘실사’의 물리학과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인다. 수중 장면에서 부력에 의해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CGI로 대체되었지만, 몇몇 장면에서 인어 캐릭터들이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전혀 젖어있지 않은 그들의 머리카락과 수염 등을 보고 있자면 이 영화는 인어들의 세계를 실사로 만드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 애니메이션의 ‘실사화’라는 욕망은 지난 십여 년간 디즈니를 지배하고 있지만, 여전히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디즈니의 라이브-액션 영화 중 나름대로의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 <말레피센트>와 <크루엘라> 정도였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려보자. 이 영화들의 주인공은 오로라 공주와 달마시안이 아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와 <101마리 달마시안>을 원작으로 삼긴 하지만, 시점을 바꾸고 악당을 주인공 삼아 이야기를 각색한다. 이 시도가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사화라는 명목으로 과거의 이야기를 적당히 업데이트하여 재생산하는 것보다는 긍정적이다. 디즈니가 인어공주를, 피터 팬을, 백설공주와 피노키오, 신데렐라와 정글의 동물들을 실사화하고 싶다면, 그것은 스스로 만들었던 애니메이션을 원작 삼는 실사화가 아니어야 한다. 디즈니는 유럽과 영미권의 동화, 설화, 민담, 전설을 끌어와 미국적 가치를 설파하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왔다. 그것을 실사화를 통해 현재화하고 싶다면, 디즈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원작 자체에 관한 본격적인 재해석이다. 저메키스의 <피노키오>가 처참히 실패한 것에 반해 원작 자체를 재해석한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가 성공적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즈니의 야망의 알맞은 프로젝트는 1989년의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안데르센의 동화를 원작으로 삼는 <인어공주>다. 지금의 라이브-액션 프로젝트는 디즈니 스스로 과거의 유산 말고는 남은 자산이 없다는 자백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