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월 초에는 서울국제환경영화제에 다녀왔다. 오프라인 상영으로 셋, 온라인 상영으로 두 편을 봤다. 스탠리 크레이머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 <그날이 오면>은 냉전 끝에 북반구가 방사능으로 뒤덮힌 세계를 다룬다. 물론 지금의 장르화된 포스트 아포칼립스와는 다르지만, 핵전쟁 이후를 다룬다는 점에서 유사한 정서를 찾을 수 있다. 핵전쟁이 벌어진 곳은 북반구(유럽, 아시아, 북아메리카)지만, 살아남은 이들이 있는 호주로 방사능이 몰려오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들은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우연히 북미 쪽에서 들려오는 모스 부호 신호를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모든 종류의 희망을 앗아간다. 희망이 사라진 세계에 남은 것은 의지 뿐이다. 죽을 것이기에, 헛되이 죽고 싶지는 않는 의지. 영화는 침몰하는 타이타익처럼 점점 기울어진다. 카메라는 점점 사선으로 공간을 담아낸다. 석유가 부족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레이싱은 활력 넘치는 스포츠가 아니라 죽음충동이 아른거리는 데스레이스나 다름없다.
2. 특별상영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초기 다큐멘터리 3편 <오염은 어디로 갔는가?>,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 <또 하나의 교육>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최근의 고레에다에 큰 반감을 갖고 있지만 <원더풀 라이프>나 <아무도 모른다> 같은 작품들을 여전히 추억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의 다큐멘터리들은 데뷔작 <환상의 빛>부터 <어느 가족>이나 <브로커> 같은 최근의 졸작들까지 이어지는 그의 테마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후지TV의 NONFIX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제작된 세 작품 중 <오염은 어디로 갔는가?>는 익숙한 TV 다큐멘터리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뒤의 두 편은 러닝타임 50분 내외의 TV 다큐멘터리, 혹은 저널리즘 다큐멘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모범을 보여준다. 엘리트 관료 야마노구치와 성노동자 여성 노부코, 복지 행정가와 복지 수혜자라는 상반된 입장의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자살했다.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는 2차대전 종전 즈음 태어나 유년시기 전쟁고아가 된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을 쫓아가며, 일본의 복지제도 형성과 쇠퇴를 담아낸다. 고레에다는 단단히 땋은 매듭처럼 야마노구치와 노부코, 그리고 일본 복지사(史)를 엮어낸다. 야마노구치의 죽음을 취재했을 때의 기록을 담은 고레에다의 저서 『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를 지금 읽고 있는데, 서문에서 방송국 소속 기자도 저널리스트도 아닌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는 것과 상반된, 탐사 저널리즘과 공적 에세이 사이의 흥미로운 교집합을 보여준다. 이는 책과 다큐멘터리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말이다. 일본 시골 지역에서 대안적 교육을 진행하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소를 키우는 이야기를 담은 <또 하나의 교육>에서는 고레에다의 성실함을 엿볼 수 있다.
3. 샹탈 애커만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게 참 오랜만이었다. 환경영화제 20주년 기획전으로 상영된 <동쪽>은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폴란드, 러시아, 라투아니아 등 구소련 지역을 담아낸다. 문자 그대로, 이 영화는 그저 그곳을 카메라에 담아낼 뿐이다. 정지된 카메라로 거리를 응시하고, 기차역이나 도로를 느릿한 트래킹 숏으로 담아낸다. 카메라가 한 공간에 오래 머물러 있기에, 그곳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눈길을 보낸다. 그들은 카메라를 직접 바라봄으로써 스크린 앞에 앉아있는 관객들을 바라본다. 스크린 속 사람들의 시선과 극장 관객들의 시선이 마주하는 순간, 카메라가 머물렀던 그 공간의 시간은 스크린을 매개로 상영관 안에 재현된다. 공간, 사람, 그리고 시간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카메라의 능력이 이 영화에서 완벽하게 발휘되고 있다.
4. 이번 주에는 광주여행을 다녀왔다. 전주영화제에서 <킴스 비디오>를 본 뒤 A선생님과 대화하던 중, ACC에서 진행중인 [원초적 비디오 본색]을 꼭 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전시 소식을 들을 때부터 궁금했던 전시였지만, 이번에서야 시간이 나 찾게 되었다. 압도적인 분량의 비디오 컬렉션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았지만, 2만 5천편에 달하는 컬렉션을 어떻게 전시로 만들었을지가 더 궁금했다. 전시 앞부분에 놓인 “비지오꼬뮌들의 연대기“는 80~90년대 남한 곳곳에 있던 비디오테크들을 조명한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에서 무수한 영화들을 관람하고 나름대로의 영화제를 열기도 하며 비평지를 생산하기도 했던 당시의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서울대의 얄라셩이나 씨네꼼, 문화학교 서울 같은 유명한 단체들은 물론, 광주를 거점으로 활동한 여러 단체들의 활동을 기록물로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공간을 넘어가면 무수한 비디오 컬렉션이 관객을 기다린다. 국가/장르/감독 정도의 구분을 가지고 분류된 비디오 중 몇몇은 관객이 직접 비디오데크에 넣고 재생해볼 수 있다. 전시에 사용된 LG의 비디오/DVD 겸용 플레이어가 아직 집에 있는 제품인데, 초등학교 이후 처음 사용해본 것이라 반가웠다. 아무래도 큐레이팅보단 컬렉션의 공개에 초점이 맞춰진 전시라 전시방식에서 크게 흥미를 돋구는 부분은 없었다. 단지 방대한 분량이 흥미로웠다. 지금이야 더 많은 영화를 더 좋은 화질로 구해 볼 수 있지만, 물리매체로의 복제를 통해서만 영화를 볼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때문에 영화 공동체의 형성은 당연한 귀결로 다가온다. 복제가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필연적으로 열화가 수반되는 방식이고, 플레이어와 TV가 요구된다. 희귀한 영화가 담긴 비디오를 여럿이 모여 보는 것은 당시의 매체적 상황이 만들어낸 당연한 결론이다. 개인화된 영화경험이 주요하게 자리잡은 시점에야 영화들을 찾아보기 시작한 나로서는 당시의 관람경험이 무엇이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일까, 관람“문화”라는 것(상영중 핸드폰 안 보기 같은 에티켓 얘기가 아니다)이 형성되기 어려운 시기를 살아온 사람으로써, 전시를 보며 앞선 새대가 (어떤 면에서) 부러웠을 따름이다. 무언가 만들어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던 시기랄까. 물론 그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고 있지만. 뭐가 무너지고 있는지는, 다들 알겠지만.
5. 겸사겸사 광주 비엔날레를 찾았다. 의외로(?) 처음 비엔날레를 찾은 것이다. 사실 학부 때 갈 기회가 있긴 했는데, 학부 행사로 단체관람이 진행된다는 정보는 자율전공학부생인 나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어쨌든 그렇게 찾은 비엔날레는 실망스러웠다.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라는 테마는 "전환과 회복의 가능성을 가진 물을 은유이자 원동력, 방법으로 삼고 이를 통해 지구를 저항, 공존, 연대와 돌봄의 장소로 상상해 보고자"한다며 도덕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서문으로 시작된다. 전시 내내 관객은 토속적인 것, 오리엔탈리즘의 반발로서의 원시주의, 5.18 민주화운동을 중심으로 삼은 연대의 기록, 인종차별에 반발하고 기후위기에 맞서자는 주장을 목격한다. 전시를 보는 내내 떠올린 것은 지금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진행중인 [영화의 기후: 섬, 행성, 포스트콘택트존]다. 이쪽을 관람한 것은 아니지만, 전시보단 스크리닝 프로그램이기에 라인업만으로 구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둘 모두 단 하나의 테마로 엮기엔 너무 광범위하기에 '물'이나 '기후' 같은 추상적 단어로 무수한 이슈를 포개어보려 한다. ‘엉킴(entanglement)’이라는 개념은 두 전시 모두의 핵심일 것이다. 두 전시를 위해 소환된 무수한 작품들은 엉킴을 유발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인상을만을 준다. 비엔날레의 경우 각각의 작품, 각각의 섹션이 지닌 매끈한 기획들은 엉킴을 유발하여 새로운 사유를 유발한다기보단 그것들이 '뒤엉켜' 있다는 인상만을 전달한다. 아니, 그러한 인상을 전달하기에 비엔날레의 전시장은 너무나도 매끄러운 공간으로 설계되어 있다. 이번 비엔날레가 내세운 주제는 그 공간을 타고 그저 물처럼 흘러가버린다. 물론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작품들은 있다. 아마존에서 촬영된 에밀리아 스카눌리터의 영상작업과 아서 자파의 영상-사운드 작업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6. 광주에서 돌아오는 날(6/9) 우연히 시간이 맞아 광주독립영화관 GIFT를 찾았다. [VOTE, VIDEO! 비디오에 투표하라]라는 제목으로 진행되는 5.18 광주민중항쟁 연속영화제의 일환으로,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을 상영하고 공개구술 아카이브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기차 일정상 공개구술 행사는 보지 못했다. 이 작품은 1987년 5월에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가 만든 비디오테이프로, 위르겐 힌츠페터를 비롯한 해외 기자들이 촬영해 해외 방송국에서 방영된 5.18 기록물, 전두환과 박정희 등 한국의 군부독재를 상징하는 이들을 해설하는 영상, 5.18 이후의 투쟁 등을 담아낸다. 오랜 기간 복제와 상영을 거친 비디오를 디지털화 하여 상영하였기에 열악한 화질과 음질을 보여주었고, 종종 테이프가 늘어져 영상이 왜곡되는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앞서 관람한 [원초적 비디오 본색] 전시의 첫 공간은 [비디오꼬뮌들의 연대기]라는 제목으로, 전국 곳곳과 광주에 있었던 비디오테크들, 합법과 불법의 경계 사이에서 이어진 언더그라운드 영화제와 상영회, 비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가능했던 이미지의 배포 등을 다루어낸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의 물질적으로 왜곡된 화면은 그것이 유통되었던 과정을, 여지껏 파손되지 않고 보존된 시간 자체를 보존한다. 그것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값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