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는 을지로-광화문-서촌 코스로 전시들을 보고 왔다. 을지로 미라주에서 하는 리단 개인전도 보려고 했는데 화요일은 쉬는 날이었다... 을지로 에브리아트에서 본 유창창, 주지오 2인전 [TWIN PEAKS]는 실망스러웠다. 전시서문에서는 데이빗 린치의 드라마 <트윈 픽스>가 우울함과 명랑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에 주목했다고 적혀 있었다. 전시 제목과 포스터에 드라마의 제목과 이미지를 내세웠음에도 이 정도의 인용에 그친다는 점은, 일차적으로는 <트윈 픽스>와 드라마의 팬으로서, 이차적으로는 모티프와 전시 사이의 불일치를 확인함으로서 실망감만을 안겨주었다. 차라리 저 서문에 알맞은 모티프는 팀 버튼의 초기작들이 아니었을까? <비틀쥬스>의 죽음의 춤이나 <크리스마스 악몽>의 부기우기 같은 것 말이다.
2. 일민미술관에서 진행중인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 전시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작품은 최진욱의 <형광등>이었는데, 화면 오른쪽 상단에 밝은 형광등을 그린 뒤 그림의 나머지 부분을 검은색으로 두텁게 뒤덮어버렸다. "두텁게"라고는 하지만 붓길 사이로 검은색 뒤편에 있었을 형상들이 얼핏 눈에 들어온다. 이 작품은 통상적으로 '리얼리즘'이라고 했을 때 예상되는 것들, 이를테면 사진으로 찍듯이 시야의 어느 단면을 그려낸 작품이나, 민중미술 계열의 '리얼리즘'과도 다른 무언가다. 최진욱의 여러 흑백 <자화상> 작업 속 유일한 컬러로 꽃 등이 강조되었던 것, 시선을 주목시키며 해당 순간의 포착을 끌어내는 방식과 다르게, <형광등>은 내 눈앞에 있는 것을 모조리 지워버린다. "주류 리얼리즘 미술 외부에서 마치 신경의 작용처럼 ‘히스테릭’하게 회화가 세계에 반응하는 방식을 탐구해 온 작가"라는 전시서문의 문장처럼, <형광등>은 세계에 관한 구상회화의 발작적 반응 중 하나다. "현대미술이 재현보다 재현의 부정이나 불능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어떤 회화는 예술 작품과 대상, 작가와 세계가 시각적 진실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으로 사실 혹은 현실에 응답하려 한다."라는 전시서문의 다른 문장은, 현실 자체의 변형과 왜곡, 불화와 불응, 무차별적인 재현으로 인해 무엇도 재현되지 못하는 곤란함에 처한 지금의 시선에 관한 회화의 대응을 고스란히 표현한다. 영화, 애니메이션, 디지털카메라, 게임,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등 리얼과 반-리얼 사이에서 진동하는 현실을 눈앞에 둔 작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지금의 리얼리즘을 드러낸다. '히스테리아'라는 제목의 이 전시는, 리얼리즘은 표현방식이라기보단 감각의 문제임을, 각자의 방식으로 동시대의 리얼리티를 상대하고 있는 회화들을 통해 역설한다.
3. 보안여관에서 진행되는 전가빈 개인전 [Anyting or Nothing]은 크로마키를 소재로 삼는다. 다만 그린스크린이나 블루스크린이 동원된 영상작업이나 스크린 자체는 이 전시에 없다. 마구잡이로 거칠게 시멘트를 부어 놓은 듯한 거친 좌대 위에, 철골이 드러난 시멘트로 만들어진 두 사람과 한 동물이 있다. 이들은 머리에 공룡 형태의 금박 조형물을 뒤집어 쓰고 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BTS를 본 사람이라면 기억할만한, 회색이나 녹색, 혹은 파란색 쫄쫄이를 뒤집어 쓴 채 다른 배우와 연기하는 배우나 퍼펫마스터들을 본 적 있을 것이다. 가장 최근에는 디즈니의 <인어공주> 속 거북이를 연기하는 이들의 영상이 나름대로 바이럴을 타기도 했으니. 그러한 BTS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다. "어떻게 저 상황에서 연기하지?"와 "비인간적이다"라는 반응. 전가빈의 작업은 그러한 상태를 그대로 끌어온다. 조명의 빛을 반사하며 모든 시선을 가로채는 금박 공룡 조형물 밑에는 부셔져가는 인간의 현상이 있다. 영화에서 비-인간 캐릭터를 재현하는 공정은 꽤나 비인간적이다. CG는 처음부터 그려지는 무언가가 아니다. 전체가 CG로 이뤄진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조차도 퍼포먼스 캡쳐를 적극 도입하는 상황에서, CG는 자유로운 이미지 재현으로의 완전한 해방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의 억압이다. 60~70년대 슈트액터는 영화의 당당한 주연진으로서 충분한 크레딧을 얻었지만, CG 시대의 모션캡쳐 배우들은 그렇지 못하다. 앤디 서키스를 제외한 모션캡쳐 전문 배우라던가 퍼펫마스터의 이름을 아는가?
4. 웨이브에서 HBO 드라마들이 내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미뤄두었던 <왓치맨>을 봤다. 원작 이후의 시간을 다루는 일종의 시퀄인 이 작품을 보며 떠올린건 의외로 도널드 글로버의 <애틀란타> 시즌3~4였다. <왓치맨>은 1921년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KKK단이 벌인 인종 대학살에서 시작된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는, 미닛맨의 시작이 된 후디드 저스티스의 기원을 인종 대학살의 생존자로 다시 쓰고 있다. 실제 있었던 사건인 털사 인종 대학살을 극에 끌어오며, <왓치맨>은 일종의 음모론적 대체역사물로서 기능한다. 이를테면 정지돈의 소설이 무수한 참고문헌을 통해 픽션에서 논픽션의 요소를 끌어들이며 픽션을 현실의 변형으로 가져올 때(관련하여 정지돈이 인터뷰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어떤 인터뷰인지 까먹었다...)처럼, <왓치맨>과 <애틀랜타>는 있었던 사건을 픽션의 재료로 가져와 음모론과 뒤섞어 더욱 세밀하고 정교하게 현실의 인종차별에 관한 논평을 전달한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가 음모론적인 서사를 통해 할리우드와 팝컬처를 엮어 고찰했던 것처럼(관련해서는 김경수 평론가의 글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134이 흥미롭다), 두 드라마는 음모론을 실존하는 인종, 계급, 문화적 요소들과 엮어낸다. 무엇보다 <왓치맨>이 정교한 지점은, 이미 그래픽노블의 정전의 반열에 오른 앨런 무어의 원작을 대담하게 재해석하는 것에 있다. 원작의 후속편을 자처하지만, 이 드라마는 단순한 뒷이야기라기보단 적극적인 재해석의 결과다. 원작을 재현하는 대신 그것을 전후로 한 사건들을 재구성하며 원작의 서사와 메세지를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메세지를 발신한다. 음모론은 그러한 포맷에 가장 적절한 매체다. 트럼프와 그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 이를테면 앤드류 테이트 같은 '렉카'들부터 론 디산티스 같은 차기 공화당 대권주자에 이르는 이들이 지지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음모론 서사다. <왓치맨>은 그에 대한 정교한 카운터 펀치다. 더 나아가, 부시 행정부의 '대량학살무기' 타령이나 레이건의 '강한 미국' 같은 보다 원작에 맞닿아 있는 소재와도 충분히 결합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선보인다. 잭 스나이더의 영화화가 원작의 충실하고 리얼한 재현에 집중했다면, 드라마 <왓치맨>은 원작의 충실하면서도 그것을 과감하게 재해석한, 그야말로 원작의 삶을 연장하는 번역의 사례에 가깝다.
5. 대학원에 합격했다. 으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