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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28. 2023

2023-08-28

1. 8월이 워낙 정신없었던 탓에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일정을 대폭 줄여 네 편만 관람했다. 개막작인 <쇼잉 업>, 토요일에 본 <헬로 댕크니스>와 <어느 날 피나가 말하길...>, 일요일에 본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쇼잉 업>의 리뷰는 따로 적었고, 나머지 관람작의 짧은 리뷰를 여기에 적어본다.

<헬로 댕크니스> 소다 저크 2022

'샘플링'은 모든 창작의 기초가 된 것만 같다. 물론 시청각적 요소들을 본래 맥락에서 떼어와 재맥락화하는 방식은 오랜 시간 실험되어 왔지만, 지금 시점에서 말해지는 '샘플링'은 20세기 중반 전자음악에서 출발하여 1973년 힙합의 탄생과 함께 거대한 영향력을 갖추게 된다. 샘플링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가져온다. 비디오 시대의 비디오 에세이 작업들 또한 존재하지만, 소프트웨어의 발전과 인터넷이라는 확장된 저장소의 등장은 더욱 무차별적인, 더욱 세밀한 샘플링을 가능케 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부터 유튜브에 올라온 아기의 웃음소리까지, 모든 소리는 잠재적인 악기로 간주되었다. 비디오 에세이의 영역에서는, 모든 이미지는 잠재적인 영화적 대상이 된다. <헬로 댕크니스>는 그러한 작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문제는 그것이 전통적인 비디오 에세이의 영역이 아니라 밈의 논리에 가깝다는 점이다. <헬로 댕크니스>는 2016년부터 2021년까지, 트럼프의 당선부터 조 바이든의 취임까지의 미국 정치를 다룬다. 이 시기는 여러가지로 평가되지만, 인터넷 밈이 본격적으로 정치적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시기다. 민주당 대선 후보는 물론 할리우드와 실리콘 밸리의 유명인사들을 둘러싼 음모론들은 인터넷 밈을 통해 창작되고 유통되었다. 개구리 페페와 같은 사례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그것은 이미지의 원본이 지닌 맥락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무언가다. 단지 원본 혹은 원본의 어느 찰나가 지닌 분위기를 재빠르게 갈취해 빠르게 유통시키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후가공이 사후적으로 맥락을 만들어나간다. 원본에 대한 폭력적인 재맥락화라는 지점에서, 대상을 샘플링하는 방식은 칸예 웨스트의 음악이건 포챈(4chan)의 밈이건 원론적으로 다르지 않다. <헬로 댕크니스>는 그 방식을 빌려와 해당 시기의 미국 정치를 패러디하고 조롱한다. 이 영화에서 <유령 마을> 속 젊은 톰 행크스는 버니브로가 되고, <웨인스 월드>의 웨인은 대안우파 유튜버가 되며, 여러 작품 속의 제시 아이젠버그는 마크 주커버그였다가 페이스북이 생산해낸 좀비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인터넷 밈들이 여러 영화나 TV쇼 캐릭터들의 얼굴에 국기나 기업 로고 등 특정 대상을 덧붙여 밈으로 만들어내는 것처럼, 이 영화는 곳곳의 간판, 머그컵, 티셔츠 등에 가공을 더한다. 영화가 조롱하는 대상은 2016~2021년 사이의 진흙탕, 피자게이트부터 코로나19와 관련한 음모론까지 무수한 사건들이다. 맥락이 변경된 이미지들은 영화 바깥으로 범람하여 '대안 현실'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트럼피의 것이든, 버니브로의 것이든, 힐러리 스탠의 것이든 말이다. (물론 영화를 보고 있자면 소다 저크는 버니 샌더스에게 유독 관대해 보이긴 한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샘플링 영화, 밈적 논리를 통해 작동하는 영화를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헬로 댕크니스>는 과장된 패러디를 통한 예술-정치적 실천에 가깝지만, 이 영화는 몬티 파이튼이나 SNL보단 오히려 <쿵 퓨리> 같은 작품과 형식적 유사성을 보인다. 장르영화의 명명법을 빌려와 밈스플로테이션(memexploitation)이라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날 피나가 말하길...> 샹탈 아커만 1983

번역제와는 약간 다르게, 원제 "One Day Pina Asked..."를 직역하면 "어느 날 피나가 물어보길..."에 가깝다. 피나 바우쉬와 그의 무용단이 5주 가량 진행한 유럽 투어를 담은 이 영화 속에서, 피나는 무용수들에게 수차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인가요?".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는 무엇인가요?"와 같은 질문들. 이 질문들은 그들의 공연이 단순히 이끄는 피나가 만들어낸 안무와 무용극이 무용수들에 의해 훈련되고 공연되는 일방향적인 공정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피나의 질문에 자신이 본 수어 노래를 따라하는 무용수, 몇 개의 단어로 피나가 질문한 것에 관한 답을 내놓는 무용수 등, 10여개국에서 모인 무용수들은 각자의 삶과 경험을 피나와 공유한다. 때문에 아커만의 카메라에 담긴 공연 속 무용수들은 발레와 같은 무용극들의 익명화된 몸과는 다르다. 마치 좁은 홈을 통해 움직이는 대상을 보는 주프락시스코프처럼, 좁게 열린 문만으로 움직이는 무용수들을 담아낸 영화의 첫 장면은 아커만이 피나와 무용수들의 세계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 지 가늠해보는 것만 같다. 아커만은 <잔느 딜망>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몸짓을, 수 차례 반복되는 리허설과 공연을 통해 반복되는 몸짓을 기록한다. 이는 피나에 관한 연대기적 서술이나 무용공연에 관한 교양적인 해설이 아니다. <동쪽>이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동구권 인민들의 정동을 담아낸 것처럼, <미국 이야기> 속 실패담이 이민자의 어느 순간을 포착해내는 것처럼, <어느 날 피나가 말하길...>은 무용단의 유럽 투어 과정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피나의 질문을 통해 풍부하게 열린 세계로 관객을 안내한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로라 포이트러스 2022

영화는 낸 골딘의 생애를 두 가지 축으로 분리해 씨실과 날실처럼 엮어간다, 라고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대체로 이야기하고 있다. 여섯 챕터로 나누어진 영화는 실제로 그렇게 느껴진다. 하나의 축은 낸 골딘이 설립한 처방전중재조직 P.A.I.N.(Prescription Addiction Intervention Now)이 옥시코딘을 팔던 퍼듀 사,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새큘러 가족과 벌이는 투쟁이다. 다른 하나는 11살 때 겪은 친언니의 자살부터 70년대말~80년대의 뉴욕 언더그라운드 활동, 그리고 80년대말~90년대 Act Up 등과 함께한 에이즈 관련 활동 등이 연대기 순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두 가지 활동은 낸 골딘이라는 키워드로, 마약, 성, 질병, 우울증, 폭력, 연대, 공동체 등을 사진에 담아온 그의 예술적 삶을 담아낸다. 낸 골딘은 자신과 주변인들을 찍은 사진을 슬라이드쇼의 형태로 공개해왔다. 영화 속에서 낸 골딘이 직접 증언하는 것처럼, 슬라이드쇼는 사진, 음악, 그리고 (사진에 담긴 이들을 포함하는) 관객들의 대화와 소음 등으로 구성된다. 영화는 "성적 종속의 발라드(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를 비롯한 낸 골딘의 슬라이드쇼를 포함한다. 아니, 이 슬라이드쇼는 앞서 이야기한 두 축을 포괄한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인물의 서로 다른 두 시간대를 교차하며 한 인물의 상을 그려내는 익숙한 다큐멘터리의 문법보다는 슬라이드쇼를 중심으로 낸 골딘의 생애 속 순간들을 새로이 배치해보는 형식에 가깝다. 영화에서 슬라이드쇼가 나오는 장면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터뷰(이 인터뷰 '장면'은 따로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슬라이드쇼와 함께 음성으로만 등장한다)와 영화의 음악 슈퍼바이저로 참여하기도 한 낸 골딘의 선곡은, 과거 그의 슬라이드쇼 전시의 형식을 스크린에 옮겨 보려 한다. 때문에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위대한 작가의 전기도, 그가 경험하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의 기록도 아니라, 그가 오랜 시간 지속해온 작업 자체의 영화화이자 빼곡하게 덧붙여진 각주다. 


2. 한글화 및 PS4 이식판으로 출시된 <레드 데드 리뎀션> 엔딩을 봤다. 메인 스토리만 달렸더니 10시간 정도 걸렸다. 아무래도 2편을 200시간 이상 즐긴 이후여서 그랬을까, 익숙한 이야기의 후일담을 알아가는 것 정도만의 의미만 있었다. 2010년 PS3로 출시되었던 본작은 여러 이유로 속편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 놓인다. 이를테면 요리 시스템이 없기에 사냥은 결과물을 판매하는 것 외에 큰 의미가 없다. 랜덤 인카운터가 존재하긴 하지만 돈을 모으거나 대단한 아이템을 얻어야 한다는 욕구를 크게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곳곳에 흩뿌려진 요소들을 찾아야 해금되는 의상과 같은 요소는 게임의 모든 도전과제를 달성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건드리지 않게 된다. '디테일 갓겜'으로 칭송받는 2편과 일대일로 비교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겠지만, 지금 시점에서야 이 게임을 접한 입장에서는 세계가 비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사실 말이 절벽으로 잘 떨어지지 않는다는 소소한 부분에서부터 적지 않은 아쉬움이 있었다. <레데리2>를 오랜 시간 즐겼던 것은 게임이 묘사하는 19세기 말의 미국이 하나의 생태계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연히 구해준 낯선 이와 마을에서 재회하고, 어느 정도 도시의 꼴을 갖춘 곳부터 야만적인 음모론이 도사리는 동굴까지 다양한 곳을 모험하며, 더 좋은 가죽을 얻기 위해 신중하게 사냥하던 순간들. 게임 속 세계가 생태계나 세계를 100% 구현할 수는 없겠지만, <레데리2>는 그에 가장 근접한 시도 중 하나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레데리2>가 <퍼스트 카우>나 <슬로우 웨스트> 같은 최근의 수정주의 서부극과 유사하다면, <레데리1>은 시원한 액션이 중심인 <장고> 같은 영화에 가깝다. 죄책감을 지닌 무법자의 싸움, 무수한 사람들을 살상하면서도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의 사나이, <레데리1>의 서부는 익숙한 쾌감이 극대화된 장소에 머문다. 


3. 오랜만에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오리지널 작품들을 몰아 보고 있다. 지난 달 공개된 <멋진 징조들 2>는 아무래도 아쉬웠다. 아마게돈이라는 중심축이 전작에서 이미 해소되었기 때문에, 시즌2가 제시하는 새로운 갈등이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아지라파엘과 크롤리의 과거들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유사-닥터 후로만 다가온다. 시즌1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닥터 후> 레퍼런스를 끌어왔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느 순간 과거의 사건과 인물을 가상의 인물과 대면시키고, 가상의 인물이 과거에 개입하는 TV드라마들이 <닥터 후>의 유사품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CW버스의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 같은 작품이 특히 그럴테고. 드라마 <더 보이즈>와 세계관을 공유하는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더 보이즈: 디아볼리컬>은 한없이 무난했다. 각기 다른 작가가 참여한 탓에 서로 상이한 스타일을 보는 것이 얼핏 <러브, 데스 + 로봇>을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디아볼리컬>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더욱 큰 한계를 끌어앉고 출발한다. 히어로가 되지 못하고 어정쩡한 능력을 가진 아이들의 복수극(<부모를 죽이는 열받은 영웅들>), 루니툰 스타일의 무성극(<레이저 아기의 외출>), 홈랜더와 블랙 누아르의 과거를 보여주는 <1+1=2> 정도는 즐겁게 봤지만, 대부분은 어정쩡한 유사-블랙미러이거나 인상적이지 못한 이야기와 스타일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즐겁게 봤다는 에피소드들은 작가의 전작(<릭 앤 모티>)나 스타일(루니툰), 원작 등에서 기인한 즐거움이 컸던 것이지만. 무엇보다 <선희와 존>이라는, 윤여정과 대니얼 덕 킴이 주인공을 맡고 앤디 샘버그가 각본을 쓴 에피소드는 최악이었다. 엔드크레딧에서 흘러나오는 아리랑은 자연스럽게 2007년의 트라우마를 불러 일으킨다. 한편 <인빈시블>의 외전인 <인빈시블: 아톰 이브>는 나름대로 즐거웠다. 오히려 이 작품이 <디아볼리컬>에 속해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더 보이즈>와 <인빈시블>은 여러모로 비교되는 작품이지만, 단편 애니메이션이라는 속성 때문에 두 작품이 더욱 비교되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본 작품은 <신 가면라이더>,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에 이어 다시 한번 안노 히데아키의 신작이 국내에서는 아마존 프라임으로만 공개되었다. 안노가 각본에만 참여했던 <신 울트라맨>만큼 처참하지는 않았지만, 작품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과욕과 애니메이션처럼 촬영된 구도와 편집된 컷들을 보고 있자면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원작이 되는 오리지널 <가면라이더>나 만화판을 보지 못했기에 자세하게 평을 남기기는 애매하지만, <신 고지라>와 <신 울트라맨>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출발했던 것과 반대로 <신 가면라이더>는 이야기의 어느 순간을 잘라내 총집편의 형식으로 선보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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