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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Oct 10. 2023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후기

<뮤직> 앙겔라 샤넬렉 2023

전작 <나는 집에 있었지만...>도 그랬지만, <뮤직> 또한 극도로 대사와 카메라의 이동을 절제하고 롱테이크를 기본 삼아 제작되었다. 그리스를 배경으로 이오네라는 남성(과 그와 얽히는 몇몇 인물)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은 죽음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영화의 첫 다섯 쇼트는 이렇다. 안개 낀 산에 천둥이 치고, 비 오는 산을 기어 내려가며 절규하고, 그 가파른 산을 다시 기어 올라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라오는 앰뷸런스를 보여준 뒤, 산을 기어오르던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담아낸다. 각각 고정된 카메라의 롱테이크로 담아낸 다섯 쇼트는 <뮤직>의 테마를 압축해서 드러내는 것 같다. 안개나 연기와 같은 장치가 불명확함을 증대함으로써 숏의 객관성을 낮춘다는 미하일 얌폴스키의 말처럼, 샤넬렉의 카메라는 건조하게 인물들을 바라봄에도 숏에 객관성을 중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샤넬렉은 자꾸만 바다나 강에 들어가는 사람들, 하지만 정작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물이 아니라 땅이나 자동차와 충돌함으로써 죽어간다는 미묘한 아이러니를 통해, 죽음이라는 이름의 불길함을 숏 내부에 도입하려 한다. <뮤직>은 샤넬렉의 이전 영화들처럼 어딘가 스트로브-위예의 촬영방식을 연상시키지만, 동시에 스트로브-위예가 달성하려던 것과는 충분히 동떨어진 영화다. 이 픽션에서 저 픽션으로의 '번역'이 아니라 여하튼 살아가게 되는 삶을 영화로 '번역'해보려는 시도가 <뮤직>에 담겨 있다. 다만 샤넬렉의 작품을 통틀어 가장 인위적이고 강박적인 형식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일상을 관조하는 객관성과 죽음의 불길함이라는 주관성을 끊임없이 경합시키며 독특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메뉴의 즐거움 - 트와그로 가족> 프레데릭 와이즈먼 2023

직업이나 지역 등으로 묶인 공동체를 담아내던 와이즈먼의 카메라가 이번에는 프랑스의 셰프 가족을 담아냈다. 3대 째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트와그로 가족을 담아낸 <메뉴의 즐거움>은, 픽션이었던 전작 <부부>보다 더욱 이질감이 드는 작품이다. 물론 이번 영화 또한 와이즈먼의 영화가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하나의 유기체적인 공동체로 담아내려 한다. 시장에서 재료를 고르고, 메뉴를 개발하고, 예약한 손님들의 정보를 확인하고, 치열하게 조리하며, 조식부터 디너까지의 서비스를 담아낸다. 다만 영화의 제목이 '레스토랑'이 아니며 부제에서 '트와그로 가족'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메뉴의 즐거움>은 생각 이상으로 트와그로 가족, 특히 오너 셰프인 미셸 트와그로에게 집중한다. 와이즈먼은 영화제 상영 전 인사영상에서 인삿말 대신 주목해야 할 장면으로 미셸이 일본 유학 경험을 말하는 장면과 성을 구입해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이유에 관해 말하는 장면을 꼽았다. 그래서일까, <메뉴의 즐거움>은 미셸을 중심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듯 레스토랑 곳곳을 돌아다닌다. 영화에 담긴 레스토랑의 풍경은 FX채널 드라마 <더 베어>나 브래들리 쿠퍼 주연의 <더 셰프>에서처럼 고성과 욕설이 오가는 공간이 아니다. 각자 치열하게 요리하고, 스탭의 실수에 관해 미셸이 조언을 건네는 장면은 일견 따스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이 영화에서 와이즈먼의 전작들에서 느꼈던 방식의 치열함, 즉 하나의 공동체가 공동체로서 존속하기 위해 요구되는 치열함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시티 홀>의 시카고 시청이나 <뉴욕 라이브러리에서>의 뉴욕 공립도서관, <인 잭슨 하이츠>나 <버클리에서>, <인디애나 몬로비아>의 지역 공동체는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구성원 사이에 오가는 토론을 비롯한 각종 활동들로 만들어나가야 했다.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을 다룬 <라 당스>나 아트섹슈얼쇼 클럽 '크레이지 호스'를 다룬 <크레이지 호스>의 경우처럼 하나의 결과물을 위해 움직이는 공동체를 다룬 적은 있지만, 스포트라이트가 한 인물 혹은 한 이름에 쏠린 경우는 없었다. 두 영화는 공연이라는 결과물을 위해, 다시 말해 해당 공동체 혹은 공간의 존재이유인 공연을 위해 움직이는 이들의 치열함이 있었다. 물론 <메뉴의 즐거움> 속 레스토랑도 마찬가지이지만, 다소 미셸 트와그로에 집중된 영화의 구성은 이 공동체가 한 개인 혹은 한 가문에 의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처럼 그려낸다. 그러한 지점에서 와이즈먼의 많은 작품들이 어떤 경합과 설득의 과정을 담아냈다면, <메뉴의 즐거움>은 오롯이 하나의 과정, 식재료가 음식이 되어 손님 앞에 내어지는 과정을 오너 셰프의 어깨 너머로 관찰했을 뿐인 영화로 다가온다. 물론 그 과정을 지켜보는 4시간이 흥미진진하지만.

<클로즈 유어 아이즈> 빅토르 에리세 2023

빅토르 에리세가 31년만에 내놓은 새 장편영화. 극 중 극 <작별의 눈빛>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영화 촬영 중 실종된 배우 훌리오를 찾는 과정을 담아낸다. 1990년에 제작중단된 영화에서 갑작스레 2012년의 마드리드로 점프하는 영화는 <작별의 눈빛>의 감독이자 소설가인 미겔을 쫓는다. '미제사건'이라는 TV쇼의 요청으로 사라진 훌리오에 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 그는 옛 동료와 친구, 훌리오의 딸 등을 만난다. 촬영이 중된된 영화를 다룬다는 점에서, 후반부를 완성하지 못한 에리세의 <남쪽>을 떠올릴 관객도 많을 것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지극히 사적이며 또 가장 감동적인"이라는 부산영화제 프로그램노트의 표현처럼 다가온다. 에리세가 장편영화를 만들지 않던 시기 영화는 필름에서 디지털로 헤게모니가 넘어갔다.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고 관람하는 환경 모두가 변화했다. '영화에 관한 영화'로서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그 시기에 관한 회고담처럼 다가오는 부분이 있다. 물론 여기서 그쳤다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노감독의 평범한 회고담에 그쳤을 것이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은 실종된 훌리오에 있다. 그는 미남 스타로 불리며 여러 역할을 맡아왔다. 다양한 배역을 맡아온 훌리오는 그 속에서 자신을 분산시킨다. 그의 딸 아나는 "아빠의 얼굴은 낯선 사람 같았지만, 통화하던 목소리는 아빠임을 알 수 있었다"라는 내용의 대사를 말한다. 훌리오의 얼굴은 훌리오를 지칭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가 아닌 다른 존재였으며, 그의 주변인에게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얼굴이 아니라 다른 것(이를테면 목소리나 소지품)이었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미겔의 페르소나와도 같았던 동료이자 친구 훌리오를 영화 자체에 대한 페르소나로 지목한다. 에리세는 훌리오가 경함한 기억상실과 방향상실을 현재의 영화라고 판단한 것만 같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시네마 천국>을 연상시키는 오래된 극장에서 진행된다. <시네마 천국>이 검열로 잘려나간 영화를 보며 형성된 어떤 공동체, 그리고 목격하지 못했던 장면들의 모음을 되돌려주며 시네마의 힘을 믿는 영화였다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그러한 영화의 마술적인 힘을 믿는 영화는 아니다. 다만 영화는 여전히 그럴 힘을 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다. 다소 상투적이고 올드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인데다가, 오프닝에 나온<작별의 눈빛>의 수려한 완성도와 영화 마지막에야 등장하는 <작별의 눈빛>의 빈곤함이 대비되서 다소 김빠진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겠다. 다만 그것이 중요할까? "드레이어 이후에 사라진 영화의 기적"이라는 것을 21세기에 재차 믿어보고자 하는 미겔의 얼굴은, 마치 신앙을 믿는 무신론자의 얼굴 같다.

<폴른 리브스> 아키 카우리스마키 2023

2017년 <희망의 건너편>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던 카우리스마키의 신작. 스스로를 상남자(tough guy)라 말하는 남자 홀라파와 슈퍼마켓에서 일하던 여성 안사의 로맨스를 다룬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가 그렇듯 인물들의 노동은 거리를 걷거나 맥주를 마시는 것과 같은 일상적 행위로 그려진다. 두 주인공은 여러 이유로 일자리를 잃는데, 알콜중독인 홀라파는 낡은 컴프레셔 호스가 터지는 산업재해를 입지만 술에 취한 상태였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안사는 기한이 지난 식료품을 버리는 대신 노숙인에게 주고 자신도 챙긴 상황을 지적받자 대들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물론 <폴른 리브스>에서 노동은 영화의 기저에 놓인 것이지 주된 소재는 아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은 가라오케이며 데이트 장소는 짐 자무쉬의 <데드 돈 다이>가 상영되는 낡은 극장이다. 두 사람의 거처에 놓인 라디오에서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소식이 끝없이 흘러나온다. 흥미롭게도 카우리스마키는 전쟁 보도를 통해 영화의 배경이 현재임을, 더 나아가 슬쩍 등장하는 달력에 표기된 '2024'라는 숫자로 <폴른 리브스>가 공개된 것 보다 1년 뒤의 시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음을 슬쩍 알려준다. 하지만 영화 속 사람들은 스마트폰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인터넷은 인터넷 카페에서 과하게 비싼 요금을 내고 사용하는 것이며, 그것 없이는 구인구직 사이트를 둘러볼 수도 없다. 물론 그의 전작들에서도 80년대에 멈춰버린 것만 같은 이미지를 발견할 수는 있다. 다만 <폴른 리브스>가 은연중에 드러내는 동시대적, 혹은 미래적 시간감각은 그 이미지들을 이상하게 뒤틀어 놓는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들이 어떤 방식(신성화하든 천대시하든)으로든 노동을 타자화하는 영화들의 반대편에 서 있던 것과는 다르게, 전쟁과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 등이 대사로 발화될 때 전쟁은 전쟁 자체가 아니라 한 차례 여과된 형태의 전쟁으로 인식된다. 전쟁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파괴 및 죽음임과 동시에 외부를 향해 전개되는 여론전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라디오 방송이 됐건 경제적 여파가 됐건 간에 전쟁을 왜곡하여 전달한다. 때문에 <폴른 리브스> 전반에 깔려 있는, 2024년 헬싱키의 기묘한 모습 위에서 진행되는 두 주인공의 사랑은 많은 것이 자아낸 소외 속에서 서로를 발견한 두 사람이 조응하는 모습이다.

<강가에서> 모흐센 마흐말바프 2023

이란의 영화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현재 망명자의 신분으로 유럽에 머무르고 있다. 강가에 앉아 사색하는 그의 뒷모습으로 시작한 영화는 인격화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대화로 이어진다. <칸다하르>, <싸이클리스트> 등 마흐발마프 자신의 영화 뿐 아니라 <내가 여자가 된 날>, <오후 5시>, <아프간 리스트> 등 자신의 가족이 만든 영화 속 장면들을 인용하며 한 민족이었으나 서로 다른 국가로 분리된지 오랜 시간이 흐른 두 국가의 역사를 반추해본다. 한 가족의 구성원이 만든 영화들만으로 두 국가의 역사를 짚어낼 수 있다는 경외감은 잠시 스쳐지나가는 감상일 뿐이다. 영화는 창세기의 구절을 변형해 "신은 7일만에 세상을 창조했지만, 아프가니스탄은 6일만에 멸망했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영화는 그 6일을 하루하루 이야기해나간다. 영화는 소련의 침공, 소련의 침공을 막겠다고 넘어온 미군, 탈레반의 등장 등,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를 50분의 러닝타임 동안 이야기한다. 마흐발마프 가족의 영화는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의 현재를 담아내고, 그것을 비판해왔다. 그들은 전쟁과 폭력, 허울뿐인 혁명, 소련/미국/유럽 등의 침공, 차별받는 소수자에 관한 이야기들을 영화에 담아왔다. 그들은 영화로 인해 이란에서 범죄자가 되었지만 국제적인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영화는 그들의 고향을 바꾸지는 못했다. 현실은 언제나 예술을 초과하며, 영화는 현실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현실을 바꿔놓지는 못했다. 2021년 미군 철수와 동시에 탈레반은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왔다. 2022년 이란의 히잡혁명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 놓는데는 성공했지만 문자 그대로의 혁명은 되지 못했다. 마흐발마프가 이란을 떠난 것은 2005년이다. <강가에서>는 18년의 시간 동안 무엇이 변했는지, 자신의 작업은 무엇이었는지 반추해본다. 마흐발마프의 영화는 이란을, 아프가니스탄을 바꾸었나, 혹은 바꿀 수 있었나? 그의 카메라에 담긴 것은 그곳의 과거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현재이며 그 이후이기도 하다. 무력감을 자아내는 비극 앞에서 마흐말바프는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강가에서>는 자신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며, 동시에 비극이 자아낸 무력감을 뚫는 힘이 솟아나길 기원하는 기도다.

<아프간 리스트> 하나 마흐말바프 2023

2021년 8월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의 철수가 시작되었다. 인근 국가들로 본거지를 옮겼던 탈레반은 다시금 수도 카불을 점령하기 위해 돌아왔다. 미군의 완전한 철수, 탈레반의 완전한 재집권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감독을 포함한 마흐말바프 가문의 사람들은 탈레반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술인들을 탈출시키고자 노력한다. 그들은 런던에 머무르고 있기에 물리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다만 마흐말바프 가족은 자신들이 영화를 통해 쌓아온 명예와 네트워크를 죽음의 위협에 놓인 예술인들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한다. 하지만 800명에 달하는 예술인과 그들의 가족을 모두 구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군은 물론 프랑스군 등은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흐말바프 가족에게 우선적으로 구출해야 하는 이들의 리스트를 작성해서 보내라 말한다. 누군가 누군가의 생존을 결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 앞에 닥친 상황은 그것을 강제한다. 그들의 집은 카불을 탈출하려는 예술인들에 관한 지원본부가 된다. 그들은 끊임없이 리스트를 쓰고, 고치고, 현지의 예술인과 통화하며 상황을 파악하려 한다. 카불의 사람들은 현장을 기록하고 자신의 위치를 공유하기 위해 텔레그램으로 사진과 영상을 보내온다. 영화는 런던과 카불이라는, 서로 멀찍이 떨어진 두 공간 사이를 연결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으로 가득하다. 서로 다른 곳에 있다는 물리적 조건은 아이러니한 상황들, 이를테면 급박하게 연락을 돌리는 모흐센 마흐말바프와 그의 아들이 있는 방 바깥의 거실에서는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는 어린 아들과 놀아줘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미군 철수와 탈레반 재집권으로부터 2년이 지난 시점, 마흐말바프 가족이 작성한 800여 명의 리스트 중 370여 명 정도만이 그곳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함께 상영된, 하나 마흐말바프의 아버지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영화 <강가에서>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의 역사와 자신의 영화에 대한 성찰이었다면, <아프간 리스트>는 당장 눈앞에 닥친 비극 속에서 무엇을 해야했으며 할 수 있었는지에 관한 영화다.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라두 주데 2023

라두 주데는 상영 전 인사영상에서 이 영화가 '노동착취'를 다룬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주인공 안젤라는 하루 종일 일한다. 피곤한 모습으로 잠에서 깨어난 안젤라는 챕터A 내내 운전하며 곳곳을 돌아다닌다. 영상 프로덕션의 어시스턴트인 그의 업무는 새로 맡게 된 산업재해 예방 영상에 출연할 산재 피해자들을 인터뷰하는 것이다. 흑백 16mm 필름 화면으로 촬영된 안젤라의 노동은 당장 클럽에 가도 어색하지 않을 그의 옷차림으로 상쇄되는 면이 있지만, 무수한 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일이다. 졸음운전을 할 것 같다는 안젤라의 말에 상사는 독한 커피나 레드불을 마시라고 할 뿐이다. 그 사이 안젤라는 아버지의 무덤과 관련된 법적 분쟁을 겪어야 하고, 10분이라도 애인을 만나야 하기도 한다. 노동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그가 필터를 통해 '보비처'라는 이름의 남성이 되어 과장되고 폭력적인 언사를 쏟아붓는 틱톡 영상을 찍는 것이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그런 영상을 찍고 있음을 알고 있기도 하다. 안젤라 스스로 "과장을 통핸 비판"이라 말하는, 보비처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벌어지는 발언들은 앤드류 테이트로 대표되는 대안우파부터 푸틴까지 무수한 현재적 문제들을 건드린다. 한편으로 영화는 1981년 제작된 루마니아 로맨스 영화 <Angela Moves On>의 장면들을 안젤라의 하루와 겹쳐 놓는다. 해당 영화의 주인공 이름 또한 안젤라라는 여성이며, 택시운전사로 일하던 중 만난 헝가리인 남성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81년의 루마니아와 2022년의 루마니아는 이 영화 속에서 뒤섞인다. EU 최빈국이라는 불명예 속에서 외국 기업에 착취당하는 안젤라를 비롯한 2022년 루마니아의 사람들과 달리, <Angela Moves On>에 담긴 1981년의 루마니아 사람들은 (미묘한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지만) 평온해보인다. 1989년의 혁명으로 차우셰스쿠가 축출되었지만 루마니아의 경제는 폭락했다. 영화 후반부, 1차선 고속도로에서 매년 수백명이 죽으며 사고가 난 자리에 십자가를 세워둔다는 안젤라의 말 직후에 잠시 등장하는 무수한 십자가의 이미지는 지금의 루마니아를 보여주는 이미지들이다. 물론 이 영화가 무겁고 진지한 영화는 아니다. 전작 <배드 럭 뱅잉>이 팬데믹 시기의 루마니아를 풍자했던 것처럼,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또한 무수한 아이러니와 블랙코미디, 풍자를 빼곡히 담아낸다. 흑백 필름 이미지부터 1981년도의 영화, 틱톡 필터가 입혀진 화면과 줌 화상회의 화면까지, 라두 주데는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루마니아의 현재를 산만하게 펼쳐낸다. 산만함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속에 놓인 사람은 물론 보는 사람까지 정신없게 만드는 산만함은 '제정신으로' 지금을 살아내는 게 불가능함을 시사한다. 챕터B에 해당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안젤라를 통해 섭외된 산재 피해자가 출연한 홍보영상의 촬영장이다. 30여 분의 롱테이크로 촬영된 이 장면은 영화가 앞선 2시간 가량 쌓아온 "과장을 통한 비판"의 모음집이다. 피해자의 엄마를 연기하는 배우 라즐로 미스케(László Miske)는 <Angela Moves On>에서 안젤라를 연기했던 배우인데,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에서는 자신이 연기했던 배역의 미래를 연기하는 것처럼 출연한다. 그것은 1981년 영화에 담긴 루마니아가 어떻게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관한, 광대 같은 연출자 라두 주데가 건네는 비극적인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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