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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Sep 21. 2023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후기

<수카바티> 나바루, 선호빈 2023

한때 대기업 LG가 스폰서였던 안양 LG 치타스는 K리그 최고의 팀이었다. 안양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서포터즈 'RED'를 조직한다. 그들의 상징은 붉은 홍염, 잠수사들이 사용하는 조명탄을 경기장에서 사용해 붉은 불꽃으로 관중석을 물들였다. K리그 각 팀의 서포터즈들이 모여 '붉은 악마'로 하나 된 2002 월드컵이 지나간 2004년, LG는 텅 빈 서울 상암월드컵 경기장으로 팀을 이전한다. RED의 반발에도 팀은 서울로 떠났다. RED는 흩어졌고, 아직 안양에 남은 이들만이 새로운 프로축구팀을 소원했다. 오랜 시간의 시민운동 끝에 2013년 시민구단 FC안양이 창단되고, RED는 이제 보라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을 응원한다. <수카바티>는 안양 시민인 감독 나바루가 우연히 RED의 응원현장을 목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들의 서포터즈 활동은 축구 경기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매혹적이다. 가난한 시민구단 FC안양은 2부리그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RED는 연고지 팀을 응원한다. 프로스포츠, 특히 83년 시작된 K리그가 아무리 우민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일지라도, 연고지 기반의 프로스포츠는 지역문화의 중심이 된다. 비록 K리그가 KBO처럼 '메이저'한 장르는 아닐지라도, <수카바티>가 담아낸 매혹의 순간들, 혹은 훌리건스러운 폭력적 투쟁으로 번진 응원의 순간들은 그 이미지만으로도 매혹적이다. 다만 영화 초반 나바루 감독을 쫓아가던 영화는 곧바로 최지은, 최캔디 등의 RED 서포터즈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으로 이어졌다가, 영화 말미에서야 나바루 감독의 목소리가 다시금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반복되는 장면들, 영화 전체에 걸쳐 갑자기 사라졌다가 재등장하는 느낌의 나바루와 같은 지점은, 영화가 아직 덜 정리된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노리코 세츠코 2> 우주인 2023

하라 세츠코는 6번에 걸쳐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출연했다. 오즈가 연출한 40여편의 영화 중 6편에만 출연했다는 것이 새삼 놀라울 정도로, 하라 세츠코의 얼굴(과 신체)는 류 치슈와 함께 오즈 영화를 규정하는 이미지였다. 한 차례 오즈에 관한 비디오 에세이 <Ozu Ozu>를 발표했었던 우주인은 올해 두 편의 <노리코 세츠코>를 발표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공개된 <노리코 세츠코>는 싱글채널 작품이었으며(이 작품은 보지 못했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된 <노리코 세츠코 2>는 2채널로 제작되었다. 싱글채널 작품과 달리 2채널 작품의 한켠에서는 오즈 영화 속의 기차 이미지 중 몇 가지가 루핑된다. 반대편에서는 미혼이었던 노리코(오즈 영화 속 하라 세츠코의 배역명)가 아이를 양육하는 시기에 이르기까지의 장면을, 오즈의 영화에서 발췌하여 재구성한다. 영화 속 여성의 일상적 모습을 원래 맥락에서 떼어와 새로이 배열한다는 지점에서, <잔느 딜망>을 활용했던 우주인의 전작 <밤낮>이 떠오르기도 한다. 다만 <밤낮>이 한 편의 영화에 담긴 여성의 (가사)노동과 (성)노동을 무수히 분할하여 영화의 '데드타임'으로 치부되는 행위를 과감하게 재해석했다면, <노리코 세츠코>는 여러 편의 영화에서 발췌된 이미지들로 '노리코'라는 가상 인물의 새로운 내러티브를 부여해본다. 이는 오즈의 영화에 대한 어떤 편견, 정적인 대화들로만 구성되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아이디어가 가리고 있는 풍성한 움직임을 되살리는 것이자, 세츠코의 얼굴과 몸을 경유해 오즈의 영화를 새로이 되짚어보는 것이다. 한 가지 의문은 짧은 기간 사이 같은 소재와 재료의 싱글채널, 2채널 작업이 연이어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함께 상영된 <영화: 모델 2> 또한 비슷한 과정으로 DMZ영화제에서 상영되었기에, 어떠한 연유로 2채널 작업이 진행되었는지 질문하지 못한 게 아쉽다.

<영화: 모델 2>  모토코+하상철 2023

영화는 에드워드 머이브리지와 에티엔 쥘 마레와 같은 무빙이미지의 '아버지'들부터 지가 베르토프와 브루스 코너 등의 작가를 호명하며 시작된다. 라이브필름퍼포먼스를 녹화해 편집한 이 작품은 머이브리지의 '연속사진'들을 왼쪽 화면에, 인터넷 등지에서 길어올린 죽음의 이미지들을 오른쪽 화면에 병치한다. 영화는 움직임 자체에 대한 매혹으로 출발했으며, 동시에 움직이던 것이 정지하는 사태, 즉 죽음에 대한 매혹은 전자와 함께 존재해왔다. 더 나아가 시각적 재현의 역사에서 최종적인 정지상태로서의 죽음에 관한 매혹은 언제나 존재했다고 생각해도 (관점에 따라) 무방할지도 모르겠다. 바쟁이 이야기한 완전하고 최종적인 보존(시각적 재현)인 '미라 콤플렉스'라는 비유에서 '미라'에 주목해보자. 영화는 정지의 순간을 재현하고 보존할 수 있는 매체이며, <영화: 모델 2>는 움직임과 정지라는 두 가지 매혹을 동시에 제공함으로써 영화라는 예술적, 매체적 장치를 (재)사유하고자 한다. 흥미로운 것은 서울국제실험영화제에서 <영화>라는 제목의 싱글채널 작업으로 상영되었던 영화가 2채널로 재제작되었다는 지점인데, 전자와 다르게 이번 상영에서는 머이브리지의 더 많은 사진이 추가된다. 말과 새 등 동물의 사진 뿐 아니라 인간의 움직임을 기록한 머이브리지의 연속사진이 대거 추가되었다. 다만 동물 이미지들이 본래의 화면비를 유지하는 것과 달리, 세로로 길게 촬영된 인간 연속사진은 화면비가 조정되어 납작하게 눌려 있다. 때문에 이 작품 속 머이브리지의 인간 이미지들은 마치 <프릭스>의 '프릭'들처럼 이상하게 뒤틀린 신체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왜 이러한 선택을 했을까? 이 인간 이미지들은 어째서 변형되었어야 했을까? 변형된 신체 이미지와 병치되는 죽음 이미지들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은, 싱글채널 버전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불쾌감을 불러온다. 원래도 실제 죽음의 순간들이 기록된 이미지들(교통사고, 테러단체의 참수 장면, 전쟁 장면 등)이 수록되어 있었지만, <영화: 모델 2>가 병치시키는 이미지들은 그것을 더욱 강력한 불쾌감으로, 스너프를 볼 때와 유사한 감각으로 이끌어간다. 다시 말해 이 영화가 지시하는 영화에 관한 사유에 앞서 이 이미지들의 존재 자체에 대한 윤리적 사유가 선행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 모델 2>가 목표한 것은 다소간 뒤로 밀려난다.

<가가랜드> 텅위한 2023

중국에는 '가가댄스'가 있다. 디스코와 유사한 리듬의 음악을 틀어두고 길거리에서 추는 막춤이다. 온라인 생중계를 통해 팬을 확보한 가가댄서들이 있고, 이들은 중국 특유의 통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발흥한 인터넷 서브컬처를 통해 자신만의 미세저항을 실천한다. 그들의 춤은 공원과 도로를 당의 목적과 다른 방식으로 향유한다. 다만 <가가랜드>는 그러한 과정을 픽션으로 소화해낸다. 텅위한 감독은 실제 가가댄서로 활동하는 '붉은머리'를 섭외해, 그를 '가가랜드'라는 가상의 지역에서 활동하는 '분홍머리'라는 댄서로 픽션화한다. 섭외된 배우인지 활동하는 가가댄서인지 모를 다른 이들이 분홍머리의 크루원, 분홍머리 크루와 삼국지 구도로 대결하는 다른 크루로 등장한다. 공장을 탈출한 KD가 분홍머리 크루의 일원이 되어 가가댄스의 세계에 빠져들고 그 속에서 희로애락을 경함한다는 익숙한 내러티브가 영화를 채운다. 온라인 생방송 특유의 정신없는 그래픽, 필터, 자막이 화면을 뒤덮는다. 국내에 몇 차례 소개되었던 중국 다큐멘터리스트 주셩저의 영화 <프레젠트. 페펙트.>에서처럼 인터넷 방송을 통해 노동의 고루함을 달래보려는 인민의 이야기를 담는 작품일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가가랜드>는 그것을 픽션으로 제시한다. 인터넷 방송 특유의 과장된 '쪼'가 이미지와 사운드, 이야기 모두를 가득 채운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붉은머리와 가가댄스에 관한, 익숙한 다큐멘터리적 설명을 덧붙이는 영화는 '가가댄스'와 그 문화가 무엇인지 보여주기는 하지만 설명하는 데는 실패한다. 다만 그 산만함만을 충실히 재현할 뿐이다.

<망명자> 김현경 2023

감독의 부모님은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다. 딸의 죽음과 감독의 미국 이민을 겪으며 감독의 어머니는 저장강박 증세를 보인다. 감독은 그것을 피란민 시절 길거리에서 주워온 물건들로 생활했던 시기의 습관이 트라우마로 인해 다시 발현된 것이라 여긴다. 그는 미국에서 탈북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 중 베트남의 북한 영사관에서 일하던 권씨를 만나게 된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감독은 더욱 강력하게 부모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느 6월 25일에 아버지와 통화하던 감독은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쳤던 아버지에게 "6월 25일이 돌아오면 어떤 기분이에요?"라고 질문한다. 아버지는 "서글프다"라고 대답한다. 감독은 자신의 부모님이 여전히 서글픔의 나라를 살아간다고 말한다. 영화의 제목은 <망명자>이지만, 영화는 '망명자'인 권씨나 다른 탈북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부모님에게로 되돌아간다. 부모님이 있는 한국을 벗어나 미국에 온 감독은 자신이 서글픔의 나라에서 망명한 것처럼 살아간다. 권씨가 북에 두고 온 가족에게 느끼는 죄책감을 토로하는 것처럼, 여전히 전쟁의 공포를 현재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부모님을 두고 미국에 온 자신 또한 미묘한 죄책감을 느낀다. <망명자>는 그러한 죄책감의 기록이자, 죄책감 속에서 마지막까지 부모님을 모시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감독의 사적인 기록들로 채워진 <망명자>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폭력의 트라우마들가 발현되는 형태를 그려낸다. 지금을 살아있는 이들이 통일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아버지의 말처럼, 통일, 더 나아가 평화 자체는 요원해 보인다. 우리는 평화가 도래할 가능성을 점차 잃어간다. 우리는 '평화롭지 않음'으로부터 망명할 수 있을까? 혹은, 그러한 망명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애국소녀> 남아름 2023

남아름의 단편 <핑크페미>는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는 '영페미' 어머니를 둔, 핑크색을 좋아하는 딸의 이야기였다. <핑크페미>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페미니스트들이 선배 페미니스트 세대와 어떻게 맞닿을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맞닿지 못하는지를 이야기했다. 남아름의 첫 장편 <애국소녀>의 주인공은 어머니와 아버지다. 86세대이자 대학 시절 학생기자와 운동권의 관계로 만난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하게 되었다. 행정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아버지는 행정을 수행하는 공무원으로서 민주화를 실현하고자 행정고시를 보고 공무원이 된다. 쌍둥이 딸을 출산한 어머니는 경력단절과 육아를 경험한 뒤 자신을 찾기 위해 여성단체 활동가가 된다. '민주화운동'과 '운동권', 86세대는 이름 하에 함께하던 두 사람은 반대되는 길을 걷는다. 그러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남아름 감독이 20세가 되던 해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다. 당시 아버지는 해수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는 2016년의 되자 촛불시위와 탄핵정국으로 이어진다. 아버지는 그때 청와대에서 일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감독의 쌍둥이 동생과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2018년 미투운동이 시작되고 감독은 학내 성평등위원회에서 활동한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페미니스트로서 활동하는 감독은 여성단체 활동가인 어머니와 함께 광장으로 나선다. 아버지는 광장 길 건너의 정부청사에서 일한다. 이 아이러니를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애국소녀>는 세월호 참사-페미니즘 리부트-탄핵-미투운동이라는 일련의 정치적 국면을 겪은 90년대생들이 어떠한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지, 혹은 어떤 정치주체로 살게 되었는지를 질문한다. 운동권 세대인 감독의 부모님이 보여주는 아이러니는 그것이 극대화된 사례다. 영화가 상영된 DMZ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이강현 감독 추모전의 일환으로 <파산의 기記述>이 함께 상영되었다는 점이 새삼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강현은 <파산의 기술>에서 87년 민주화운동을 추억하는 이들의 행사를 다분히 부정적으로, '부역자들'이라는 자막을 통해 그려낸다. 제도적 민주주의는 달성되었지만 시민의식 차원에서의 민주주의는 달성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승리의 기억은 어떤 안일함을, 노태우의 당선, 독재자의 사면, 신자유주의의 광범위한 도입 등을 불러왔다. <애국소녀>는 승리의 기억을 취해본 적 없는 세대로 하여금, 아니, 탄핵이 유일한 (그리고 불충분한) 승리의 기억일 뿐인 세대로 하여금 우리의 정치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다만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영화의 감독도, 감독과 동갑의 관객인 나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마주한 것은 황량한 광장과 오염된 공론장이다. 이전 세대가 남긴 투쟁의 잔해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투쟁을 찾아갈 동력을 잃어버린다. <애국소녀>는 그 쓸쓸한 감각을, 자신의 부모를 거울 삼아 담아낸다. 단순히 '나'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나의 양쪽에 서 있어 나를 거울 속 환영으로 무수히 분절하는 거울 말이다.

<니트 아일랜드> 에키엠 바르비에, 길렘 코스, 캉탱 렐구아크 2023

세 명의 다큐멘터리스트가 게임 [DayZ]에 접속한다. 좀비 포스트-아포칼립스를 배경 삼는 이 게임은 온라인을 기반으로 복수의 사람이 동시에 접속해 활동한다. 250 제곱 키로미터 규모의 맵은 복수의 공동체와 홀로 활동하는 개인들을 가능케 한다. 각각 인터뷰어, 테크니션, 카메라맨의 역할을 맡은 세 사람은 이들을 인터뷰한다. <니트 아일랜드>는 게임의 세계 속에서 촬영된 시네마-베리테 다큐멘터리다. 이들은 게임 속에서 또 다른 생활을 이어가는 이들을, 마치 민속지를 기록하는 것처럼 담아낸다. 어떤 이들은 재미로 폭력을 휘두르기 위해 게임을 한다. 어떤 이들은 반복되는 일상의 도피처로 게임을 택한다. 어떤 이들은 아이가 잠든 시간 동안의 데이트 장소로 게임을 활용한다. 이들은 게임 속에서 제2의 삶을 살아간다. 인육을 신에게 바치는 사이비 목사가 되기도, 글리치를 사용해 맵의 빈 틈을 돌아다니는 탐험가가 되기도, 살육을 즐기는 갱단이 되기도 한다. 물론 <니트 아일랜드>가 담아낸 게임 속 공동체들이 크게 흥미롭지는 않다. 게임의 안과 밖에 존재하는 공동체를 담은 다큐멘터리(가장 최근의 사례는 <내언니전지현과 나>일 것이다)는 여럿 있었다. <니트 아일랜드>의 흥미로운 지점이라면, 게임-공동체의 내부인이 아니라 완전히 외부인의 입장에서 게임 내 공동체에 접근했다는 지점이다. 마지막 몇 개의 숏을 제외하면 모든 장면이 게임 내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기존 방법론이 게임이 제공하는 가상 세계에서도 가능함을 실험해본다. 이들에게 [DayZ]는 장 루슈의 길거리와 같다. 물론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느껴지는 유리된 감각이라던가 우울감을 고백하는, 게임을 다룬 영화의 클리셰적인 장면도 등장하지만, 이 영화가 펜데믹으로 인한 락다운 기간 촬영되었음을 생각하면 그러한 반응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작품과 같이 게임을 원래 목적과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는 작업들의 공통점들이다. 앞서 언급한 <내언니전지현과 나>와 이 영화, 그리고 [배틀그라운드]를 인류학적 리서치의 장소로 활용한 퍼포먼스 [에란겔: 다크 투어>를 함께 떠올려보자. 세 작품이 다룬 게임은 PVP가 가능하며, [DayZ]와 [배틀그라운드]는 게임의 규칙상 그것이 강제된다. 하지만 작품 속 플레이어들은 그것을 일정 부분 거부한다. 대신 이들은 게임 곳곳을 함께 탐험하고, 산책하고, 춤을 춘다. 춤을 춘다는 점은 무엇보다 흥미롭다. 이들 작품이 다루는 게임은 [오버워치]나 [포트나이트]처럼 춤동작이 구현되어 있지 않음에도, 이들은 게임 내 가능한 동작들을 활용해 춤을 춘다. 집단적 동질감의 표현일까? 혹은 게임 내에서 즐길 콘텐츠를 모두 소진했기에 고안한 새로운 유희방식일까? 어느 해석이던, 그러한 공통점을 발견하는 순간이 즐거운 물음을 이어가게 한다.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 장 뤽 고다르 2023

작년 조력자살로 세상을 떠난 장 뤽 고다르의 (공식적인) 마지막 작품. 생로랑의 후원을 받아 제작된 작품으로, 찰스 플리스니어의 소설 [가짜 여권(Faux Passeports)]의 영화화를 시도하던 과정에서의 생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용된 텍스트, 메모, 회화, 영화, 사진, 포스터 등 다양한 시각적 재료를 콜라주해오된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이 작품은 제목처럼 '예고편'이라기보단 '스토리보드'처럼 다가온다. 다시 말해 콜라주된 이미지들이 영화로 만들어지기 이전의 단계의 몽타주로 남은 것만 같은 모양새다. 20분의 러닝타임 중 초반 5분 동안 사운드 없이 스토리보드 이미지들만을 보여주던 영화는 고다르의 음성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는 여느 영화에서처럼 자신의 음성으로 이 영화의 몽타주를 이야기한다. 그가 내뱉는 문장과 단어들은 이미지에 덧붙여진 또 다른 단어-이미지로서, 콜라주 및 몽타주된 것들 사이에 개입하는 또 다른 항으로서 작동한다. 영화의 영어제목에는 '가짜전쟁(phony war)'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가짜전쟁은 1939년 9월~1940년 5월 사이,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영국의 선전포고 이후에 있었던 대치상태를 일컫는다. 이 시기 각국의 군대는 전선을 형성했지만,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전투 없는 전쟁, 그러니까 '가짜전쟁'. 예고편조차 되지 못한 이미지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을테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하지만 지금의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마치 가짜전쟁처럼) 영화의 전(前)존재이자 영화 자체이며, 영화라는 관념이 스크린 위에 관류하는 순간이다. 

<영화의 사도들> 다라그 아멜리아, 게르트루데 말리자나, 제시 제라르 음팡고, 세시 음레 2022

탄자니아에는 영화산업이 자리잡지 못했다. 물론 영화가 제작되고 영화관이 존재하지만, 할리우드를 비롯한 해외의 영화가 정식으로 수입/배급되거나 자국영화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면 탄자니아 사람들은 어떻게 영화를 보는가? <영화의 사도들>은 해적판 DVD를 판매하는 사람, 그러한 DVD를 상영하는 '방'을 운영하는 사람, 그리고 외국어로 된 작품을 '번역'해주는 DJ를 담아낸다. '해적질'이니 불법이며 나쁜 행위 아니냐고? 물론 영화산업의 시스템이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곳이라면 그러한 논리는 타당하다. 하지만 탄자니아는 그렇지 못하다. DVD라는 물리매체를 통해 탈법적으로 유통되는 영화들은 영화가 상영될 물리적인 조건을 필요로하고, 이는 영화관이 아닌 다른 장소, '영화방'이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요구한다. 영화를 번역하는 DJ들은 그러한 공간에서, 마치 과거의 변사처럼 영화를 해설한다. 물론 이 번역은 영화의 내용에 대한 (의도적인) 오역과 의역을 포함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문화를, 전 지구적 대중문화산업이 만들어낸 모종의 계급적 하위문화를 형성한다. 이는 한편으로 탄자니아의 자국 영화를 재발견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DJ의 해설이 덧입혀서 새로운 관객 앞에서 상영된 <만가미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영화의 사도들>는 단 16분만에 그 모든 풍성함을 기록한다.

<에이아이 리얼리즘: 2022년 1월의 비극> 알마굴 멘리바예바 2022

2022년 카자스흐탄에서 가스가격 급등에 반발하는 시위가 벌어진다. 1991년 카자스흐탄 독립 이래 가장 큰 규모였던 이 시위는 정부의 유혈진압과 러시아의 CSTO(집단안보조약기구)군 파병으로 인해 끝난다. 스마트폰 시대에 이 과정은 모두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사건을 다룬 방식으로 담아낸다. 시위 참여자들의 스마트폰과 카메라로 촬영되었을 이미지들을 직접 사용하는 대신, 시위 참여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프롬프트를 만들어 생성형 AI를 사용해 제작된 이미지를 사용한다. 작품의 모든 이미지는 그러한 방식으로 생성되었다. 생성형 AI를 사용한 작업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지만 많은 경우 저작권과 초상권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이 작품은? AI는 특정 개인으로 호명되기 어려운 군중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생성형 AI는 프롬프트를 따라 온라인 상의 이미지들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생산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에 사용된 이미지들은 사건의 단순한 재현을 넘어 사건에 관한 빅데이터를 이미지화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러한 지점에서 이 작품은 당시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창출한다. 

<담나티오 메모리아이: 기록말살의 역사> 툰스카 빤시티보라꿀 2023

영화의 제목 'Damnatio memoriae'는 '기록말살형'을 의미하는 라틴어다. 문자 그대로 형벌 대상의 모든 기록을 말살하여 그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러한 기록말살의 역사를 아카이브 속 이미지들을 통해 재구성한다. 영화의 대상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벌어진 독재와 학살의 기록들이다. 영화는 한국은 물론 중국, 대만, 일본, 태국, 미얀마 등지에서 벌어진 국가폭력의 기록들을 끌어낸다.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이나 교육과정에서 삭제된 폭력의 역사들은 점차 존재하지 않는 사건으로, 기록이 말살된 사건들로 여겨진다. 영화는 그러한 '기록말살의 역사'에 반기를 든다. 다소 산만하게 펼쳐지는 역사의 편린들, 폭력과 죽음의 아카이브는 그것들이 단일한 원인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어떤 패턴을 보여주고 있음을 넌지시 폭로한다. 다만 이 영화의 흥미로움은 거기까지인데, 결국 이 영화의 전략 또한 선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기록말살형을 당한 사건들과 현재 중국의 우주개발의 욕망을 병치하는 방식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기보단 동아시아 곳곳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유사성만을 보여줄 뿐이다. 대만가수 등려군(鄧麗君)이 동아시아 전체에서 인기를 얻으며 끼친 영향력에 관해 다루는 영화의 초중반부에서처럼 어떤 매락하게 사건들이 배치될 때에만, 영화가 길어올린 이미지들은 일관성을 갖고 배열된다. 하지만 영화 러닝타임의 대부분은 세심한 배열보단 나열에 그친다는 인상을 준다.

<인류의 상승 3> 에두아르도 윌리암스 2023

전작 <인류의 상승>(어째서인지 2편은 없다)에서 스마트폰으로 발생한 네트워크를 통해 아르헨티나, 모잠비크, 필리핀의 청년들을 엮어내었던 것의 연장선상에서, 이번 영화는 페루, 스리랑카, 대만의 청년들을 담아낸다. 흥미로운 것은 VR 작업에 사용되는 360도 카메라를 2D 극장상영용 작품에 도입하는 지점이다. 360도 카메라는 복수의 렌즈를 통해 촬영된 이미지를 디지털로 합성하여 360도의 화각을 확보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화면의 왜곡과 소실점을 만들어낸다. 디지털 합성의 과정에서 서로 다른 렌즈로 촬영된 이미지들 사이의 틈새가 발생하기도 한다. 화면은 왜곡되다 못해 실제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에 이른다. 카메라와의 거리에 따라 실제로는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이들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것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한 지점에서 파트타임스위트의 VR작업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를 떠올렸다. VR이라는 가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실재를 왜곡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누빔점들을 이 작품은 하나의 재료로 동원한다. <인류의 상승 3> 또한 그러한 누빔점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사람이나 사물이 누빔점 속으로 사라지기도 하고, 화면 왜곡으로 인해 멀찍이 떨어지거나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기도 한다. 360도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왜곡의 지점들은 이곳과 저곳을 잇는 포털이면서도 만남을 지연시킨다. 세계에 관한 왜곡된 혹은 비선형적인 지각, 그러한 지각이 만들어내는 리듬이 영화에 담긴다. 

<열 개의 우물> 김미례 2023

영화는 70년대 말~90년대 인천 만석동과 십정동의 공장, 공부방 등에서 활동하던 이들을 기록한다. 공장 노동자이자 바닷가에서 할 수 있는 여러 잡일을 해오며 생존하던 이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해 부당해고에 맞서거나 공부방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조직해 빈민운동에 뛰어든다. 만석동 등지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서울과 경기도 곳곳에서 흘러들어온 철거민이 모여사는 십정(十井)동에 새로운 공부방을 만든다. 이곳은 단순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보육하는 공간을 넘어 빈민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등이 교차하는 장소로서 기능해왔다. 현재에도 이어지는 공부방을 만들었던 이들은 현재 각자의 위치에서 또 다른 활동을 이어간다. 누군가는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책방을 운영하고, 누군가는 국회의원이 되어었으며, 도시에 환멸을 느낀 이는 농촌으로 내려가 농민운동에 뛰어든다. 각자 택한 삶의 경로는 달라졌지만, 같은 장소에 모여 활동했던 기억은 그들이 활동하고 투쟁하는 내적 근거가 된다. 다만 인천 만석동과 십정동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와 농촌에서 농민운동을 전개하는 이야기가 두 개의 축을 구성하는데, 그 때문에 느슨하게 연결된 두 개의 영화가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하나로 붙는다는 인상을 준다. 조금 더 이른 시점에 두 축을 연결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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