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Oct 15. 2023

이야기꾼의 두려움

<플라워 킬링 문> 마틴 스코세이지 2023

*스포일러 포함     


 데이비드 그랜의 논픽션 『플라워 문』을 원작으로 삼은 스코세이지의 새 장편 극영화 <플라워 킬링 문>은 19세기말 석유가 발견되며 큰 부를 얻게 된 아메리카 원주민 오세이지족과 오일 머니를 노리고 그곳에 몰려든 백인 사이의 이야기다. 참전 후 미국으로 돌아온 어니스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지역 유지이자 삼촌인 빌(로버트 드 니로)의 도움을 받아 오세이지족의 마을에서 택시기사로 일하기 시작한다. 어니스트는 손님으로 만난 오세이지족 여성 몰리(릴리 글래드스톤)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한편 석유가 채굴되는 땅을 보유했거나 수익권을 지닌 오세이지족이 원인모르 병으로 죽거나 살해당하는 사건이 이어지며, 마을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오세이지족의 역사를 압축해 보여주며 시작된다. 미주리, 켄터키, 텍사스 등을 거쳐 오클라호마에 정착한 오세이지족의 역사는, 석유를 발견한 그들이 점차 부유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몽타주로 이어진다. 민족의 놀이를 즐기던 이들은 골프 등 백인들의 오락을 즐기게 되고, 백인들을 노동자로 받아들이며 점차 그들의 생활양식과 동화된다. 백인과 결혼하는 오세이지족도 적잖이 등장하며, 어떤 이들은 그러한 뒤섞임에 반감을 갖기도 한다. 몰리를 비롯한 몇몇 오세이지족 인물들은 당뇨병을 앓는데, 이는 당을 대량으로 섭취하는 미국 백인의 음식을 접하게 된 것이 원인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물론 이는 영화의 배경을 설명해 줄 뿐이다. 영화의 중심은 오세이지족이 소유한 석유와 그로 인한 수익을 앗아가려는 백인들의 이야기다. 빌은 대외적으로는 오세이지의 친구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조카 어니스트와 그의 동생 바이런(스콧 셰퍼드) 등을 앞세워 다양한 불법행위를 은밀하게 저지른다. 물론 이 ‘불법행위’란 병이나 자살로 위장해 오세이지족을 하나씩 죽이고, 그들이 지닌 오일 머니는 물론 보험금까지 차지하려는 계략이다. 206분의 러닝타임 대부분은 빌이 설계한 범죄가 전개되는 과정이다. 어니스트는 의도치 않게 여기에 동참하게 된다. 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은 진실이지만, 돈에 관한 어니스트의 욕망은 그 사랑을 앞지르게 된다. 단지 몰리의 가족이 지닌 석유 수익권으로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 혹은 그들이 죽었을 때 수익권을 안정적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상황을 꾸미는 것을 넘어, 그들을 적극적으로 살해하기에 이른다. 영화 초반 별다른 맥락 없이 제시되는 오세이지족들의 죽음을 다룬 장면들은 빌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가는 어니스트의 미래를 예견한다.      

 사실 돈에의 욕망으로 추동되는 빌의 계략을 어니스트 등이 실행에 옮기는 과정은 크게 인상적이지 않다. 오히려 스코세이지의 무수한 범죄영화들, <좋은 친구들>, <카지도>, <갱스 오브 뉴욕>, <아이리시맨>에 이르는 갱스터 영화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 묘사된 금융사기에 이르는 무수한 범죄 전략이 전개되던 방식을 떠올리게 되며, 그 안에서의 갈등과 배반이 묘사되는 방식 또한 기시감을 준다. 디카프리오와 드 니로라는 스코세이지의 오랜 페르소나가 동반출연하는 것만으로도 이 기시감은 완성된다. 영화 후반부 FBI 수사관 톰 화이트(제시플레먼스)가 등장하며 FBI의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이야기하는 등의 장면 또한 (실화를 바탕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느낌을 준다. 단순히 이야기의 측면에서 그렇다기보다는, 스코세이지를 필두로 한 무수한 영화들에서 보아온 방식이기에 더욱 평이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10분은 다소 단조롭게 느껴진 앞선 3시간을 뒤집는다. 빌에 관한 재판이 진행되고 증인으로 나선 어니스트는 방청석에 몰리가 앉아있음에도 자신의 모든 죄를 증언한다. 재판 이후 몰리를 독대한 어니스트는 진실만을 말했다고 하지만, 한 가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당뇨병을 앓던 몰리의 인슐린 주사에, 빌의 사주를 받은 의사가 전달한 진정제(라고는 하지만 천천히 독살하는 약물)를 넣었음을 고백하지 못했다. 그리고 갑자기 내레이션이 들려온다. 통상적으로 실화에 기반한 영화 마지막에 삽입되는, 후일담을 담은 자막의 내용처럼 느껴지는 내레이션이다. 영화는 갑자기 어느 무대로 공간을 옮긴다. 여러 악기를 비롯해 다양한 사운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장비들이 갖추어져 있고, 몇 명의 내레이터가 대본을 든 채 맡은 역할에 따라 내레이션을 읽는다. 무엇보다 스코세이지가 무대에 등장해 내레이션의 마지막 파트를 직접 읽는다. 앞선 영화 전체는 갑작스레 무대낭독극으로 변화한다. 스코세이지의 등장은 앞선 영화의 모든 이미지가, 데이비드 그랜의 책을 읽으며 그가 떠올린 이미지였을 것이라 추측하게 한다. 물론 이 낭독극이 벌어지는 것은 여전히 영화가 공개된 2023년보다 과거의 시점(20세기 중반 즈음으로 인식되는 배경)이다. 이 갑작스러운 전환은 무엇일까?      

 영화가 맞이한 또 한 번의 위기에 맞서, 젊은 감독들은 영화에의 매혹을 이야기한다. 데이미언 셔젤의 <바빌론>은 영화의 매혹에 굴복했음을 고백하였고, <스크림>을 비롯해 무수히 쏟아지는 메타적 장르영화들은 영화가 자신들의 영원한 놀이터임을 선언하는 것만 같으며, <킴스 비디오> 같은 다큐멘터리는 그야말로 영화에 미쳐버린 자신에게 한껏 고양되어 있다. 한편으로 스코세이지와 비슷한 연배의 감독들은 연달아 영화에 관한 영화를 내놓는다. 스필버그는 <파벨만스>를 통해 영화 자체에 내재한 폭력과 두려움을 고백했고, 빅토르 에리세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통해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를 보는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자 함을 이야기한다. 아벨 페라라의 <제로스 앤 원스>는 팬데믹을 기점 삼아 영화와 현실 사이의 대립을 담아내고자 하였으며, 베르너 헤어조크는 AI의 등장을 통해 영화의 존재론을 반추해보는 다큐멘터리 <생각의 극장>을 만들었다. 젊은 감독들이 자신의 시네필리아를 고백하며 영화의 위기에 대항하는 것과 반대로, 스코세이지 연배의 감독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의 존재와 기능에 관한 탐구를 이어간다. <아이리시맨>에서 디에이징된 드 니로의 얼굴과 그렇지 못했던 육체 사이의 이질감이 영화와 그것을 성립시키는 기술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면, <플라워 킬링 문>의 마지막 낭독극에서 화자로 등장한 스코세이지의 모습은 자신의 영화가 더 이상 어떻게 기능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고백처럼 다가온다. 그가 만들어온 영화들은 권력과 그것이 착취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갱스터를 내세운 영화뿐 아니라 <택시 드라이버>나 <코미디의 왕>, 종교에 관한 영화였던 <사일런스>에서까지도 드러낸다. <플라워 킬링 문>은 부를 통해 창출될 수 있는 권력을 얻고자 타인을 착취한, 혹은 부를 위해 권력을 휘두르고 타자를 착취한 인물에 관한 영화다. 그들의 최후를 직접 읽어 내려가는 스코세이지의 모습은, 어쩌면 자신의 영화가 그렇게 작동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표명이 아닐까? 혹은 자신의 영화가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것과 다를 것이라는 두려움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후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