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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Oct 27. 2023

VR 영화라는 위자보드

당신의 침묵을 비추는 거울 - 김진아 감독 VR 특별전

 그러니까 VR 영화는 관객의 자리가 문제다. 보통의 영화 관객의 시야가 카메라(혹은 영사기 어쨌든 주어진 것 외엔 영화 이미지를 볼 수 없는)에 촬영된 것으로 고정된다면, (넓은 의미에서 촬영된 것으로 한정되지만) VR 영화에서 관객의 시선은 360도 카메라가 놓여 있던 공간 전체를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 물론 “VR 작업 속에서 관객이 이동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지만, 김진아의 세 VR 영화에서 이동은 불가능하기에 이를 전제로 이야기해 보자. 영화에서 딥포커스의 등장은 관객의 능동성을 증대시킨 사건으로 평가된다. <시민 케인>에서 관객은 눈밭에서 노는 어린이를 볼 수도,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어른들에 집중할 수도 있다. IMAX와 같은 거대한 스크린 앞에서 또한 관객은 스크린에 어디를 볼 것인지에 관해 선택권이 주어진다. 초기 IMAX 영화가 그러한 경험을 극대화하는 대상, 이를테면 정글이나 해저를 주로 담았음을 생각해 보자. VR 영화는 그러한 능동성을 극대화한다. 다만 관객은 고정된 위치에서 끝없이 고개를 돌리며, 발 없이 공중에 떠 있는 것만 같은 시야를 획득한다. VR 영화에서 관객은 관찰자적 지박령이 된다. 360도 카메라가 멈춰 있던 그곳에 붙들려, 카메라에 담긴 공간과 인물을 멀찍이서 볼 수 있을 따름이다.     

 1992년 미군에 의해 한국인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을 다룬 VR 다큐멘터리 <동두천>(2017)에서 관객은 속절없이 카메라-공간에 묶인 유령이다. 관객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고개를 돌리는 것뿐이다. 적극적으로 공간을 관찰하며 사건을 파악해 보려는 탐정 같은 관객마저, 결국 영화가 사건을 제시하는 방식을 쫓는 관찰자가 된다. 멀리서 걸어와 골목으로 들어가는 여성(김진아의 세 작품은 모두 김보령 배우가 연기한 이름 없는 여성만이 등장한다)을 바라보거나, 물건들이 흐트러진 작은 여관방을 둘러볼 수 있을 따름이다. 다만 어느새 방바닥에 흐르고 있는 피웅덩이를 보며, 일종의 충격효과를 통해 단순한 관찰자에서 사건의 목격자가 된다. <동두천>은 VR이라는 위자 보드(Ouija Board)를 통해 관객을 지박령의 자리로 불러내고 목격자로 만든다.     

 2004년에서야 폐쇄된,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관리를 위해 설립된 낙검자 수용소를 다룬 <소요산>(2021)도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유사하다. 폐허가 된 낙검자 수용소 곳곳에 관객은 소환된다.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여성이 카메라-관객을 바라보는 장면은, 무언가 체념한 표정으로 유령을 바라보는 이의 얼굴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관객은 건물 옥상에 놓이는데, 사람들의 숨소리 같은 것을 들을 수 있다. 이어지는 자막은 탈출을 시도하다 떨어져 죽은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관객은 탈출을 시도했다 옥상에서 추락사한 기지촌 여성의 위치에 놓였던 것임을 사후적으로 깨닫는다. 건물 복도 장면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자 건물 안에 비가 내리는 장면도 그렇다. <동두천>의 목격자-유령은 <소요산>에서 조금 더 적극적인 존재가 된다. 이를테면, 영화 내내 들려오는 여성들의 소리는 그 공간 자체가 귀신 들린(haunted) 것처럼 인식되게끔 한다. 빈방에 스르륵 나타난 식탁과 음식, 부서진 세면장에서 물소리와 함께 놓인 세면도구, 건물 내부에 내리는 비와 같은 것들은, 목격자-유령이었던 것 같았던 관객이 실은 일종의 고스트 헌팅(ghost hunting)의 참여자로 만든다. 관객은 유령인 것처럼 소요산 낙검자 수용소에 당도했지만, 실은 그곳에 이미 존재하는 유령과 대면하기 위해 그곳에 소환된다.     

 2022년 폐쇄가 결정된 군산의 ‘미군 위안부’ 집장촌 아메리칸 타운을 다룬 <아메리칸 타운>(2023)은 더욱 적극적으로 그러한 요소를 끌어온다. 관객의 자리를 뒤집는 방식은 더욱 과격해진다. 아메리칸 타운 곳곳의 버려진 미용실, 술집, 클럽, 슈퍼 등을 오가는 영화는 거울 속 혹은 바의 주방 같은 곳에서 스르르 등장하는 여성을 보여준다. 미군과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관객이 볼 수 있는 사람은 같은 공간이 아니라 거울 속에만 있을 뿐이다. 이윽고 관객은 거울 속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공간에 있는 여성을 발견한다. 작은 방에 들어간 여성은 (사운드로만 존재가 등장하는) 미군을 상대한 뒤 밖으로 나선다. 그는 그가 골목에 널었을 빨래 뒤에 서 있던 관객의 눈앞까지 걸어온다. 그 순간 관객이 바라보던 세계는 녹아내린다. <아메리칸 타운>의 관객은 <소요산>에서처럼 고스트 헌팅을, 일종의 다크 투어리즘을 떠난다. 하지만 관객 앞에서 녹아내리는 세계는 도리어 관객이 유령이었음을 재차 상기시킨다. 그곳에 살았으며 국가폭력을 당했던 여성들이 눈앞에 현전하자, 관객은 그 세계 바깥으로 튕겨 나온다.      


 김진아의 세 작품은 VR 영화, 특히 VR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는 작품에서 관객의 위치를 다룬다. 단순히 다크 투어리즘의 일종으로서 국가폭력의 장소들을 방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공간에 가상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을 고안하길 시도한다. 카메라는 공간 속에 고정되었지만 내러티브 속 관객의 위치는 다분히 가변적이다. 세 작품에서 관객은 목격자-유령에서 공간을 탐색하는 고스트 헌터로, 다시금 그곳을 방문한 유령적 존재로 끊임없이 자리를 옮긴다. 동두천, 소요산, 아메리칸 타운을 찾은 발 없는 방문자들은 (아즈마 히로키가 말한) “관광”을 통해 그곳을 새로이 감각한다. 다만 관광은 근본적으로 공간을 거닐어보는 행위다. 함께 전시된 AR 작업들이 각 공간을 가상적으로 걸어볼 수 있게 하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체험일 뿐이다. 김진아의 VR 영화는 관객의 발을 잘라내고 시각만을 공간으로 보낸다.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와 헤드폰이라는 장치는 일종의 투어 가이드로서 관객을 이끈다. 위자 보드로 소환된 유령은 보드 위의 물건을 움직임으로써 의사표시를 한다. 관객은 VR 영화라는 위자 보드 위의 물체로서, 카메라에 자신의 발을 내어준 지박령으로서 공간 안에 놓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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