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 2023
*스포일러 포함
공습으로 어머니를 잃은 소년 마히토(산토키 소마)는 군수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쇼이치(기무라 타쿠야)를 따라 도쿄를 떠난다. 쇼이치는 어머니의 동생 나츠코(기무라 요시노)와 재혼을 예정에 두고 있다. 겉으로는 상실의 아픔을 잘 견뎌내고 있는 것만 같은 마히토의 앞에 의문의 왜가리(스다 마사키)가 나타난다. 마히토는 어머니가 살아 있다고 말하는 왜가리를 따라, 그리고 어느 순간 실종된 나츠코를 찾기 위해, 큰할아버지(히노 쇼헤이)가 지었다는 탑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사실 이세계로 통하는 통로였으며, 마히토는 새로이 모험을 시작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이라고는 발표되었지만 번복 가능성이 남아있는)인 이 작품은 요시노 겐자부로 가 쓴 동명의 청소년 문학을 원작으로 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원작이라기보단 제목과 주제의식을 빌려온 것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소설은 소년이 삼촌과 학교폭력, 전쟁, 빈부격차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해 편지를 주고받는 내용이다. 하야오의 영화는 주인공의 이름도 다르고 이세계로 향한다는 설정도 추가되었다. 1937년 작인 원작과 달리 영화는 2차 대전 종전 이전의 1940년대를 배경으로 삼는다.
영화에서 하야오의 전작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브리 이전의 작품인 <미래소년 코난>과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부터 비슷한 시기를 배경 삼은 최근작 <바람이 분다>까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필모그래피를 총집합한 작품이라 봐도 무방하다. 다만 흥미로운 지점은 단순히 ‘거장의 은퇴작’이라는 이름값에 걸맞은 셀프 오마주로만 채워진 작품은 아니라는 지점이다. 이를테면 아녜스 바르다의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바르다 스스로 자신의 작업방식을 경유해 자신의 삶과 경력을 되짚어보는 기획이었으며, 적지 않은 은퇴작들이 그러한 인상을 준다. 자신이 오랜 시간 천착해온 형식이나 테마를 마지막으로 변주하며 마침표를 찍는 것.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러한 방식과 조금 궤를 달리한다. 그러니까, 하야오는 자신이 해온 것들, 지금도 손에 쥐고 있는 영화들과 장면들이 여전히 유용할 수 있는가에 관해 자문한다.
영화의 마지막 즈음에서 마히토는 이세계를 지도하는 큰할아버지를 만난다. 그는 마히토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려 한다. 이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잉꼬대왕(쿠니무라 준)은 그것을 훼방 놓으려 하지만, 한편으로 마히토 자신 또한 계승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큰할아버지는 새하얗고 작은 나무블록을 쌓는데, 그 나무블록이 이세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즉 나무블록은 곧 세계의 상태다. 그것은 결국 잉꼬대왕의 칼질에 의해 부서지고 무너지는데, 그럼으로써 그들의 세계 또한 무너진다. 큰할아버지는 ‘악의’ 없이 블록을 쌓을 수 있는 후계자를 찾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흥미로운 패러독스를 발견할 수 있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하야오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일정 부분 들어가 있다. 하야오의 아버지는 군수공장을 운영했으며, 덕분에 가족은 전쟁 중에도 쌀밥을 먹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 도쿄에서 태어나 전쟁 중 우츠노미야시로 떠났다가 전후 도쿄로 돌아온다는 것 또한 (물론 당시의 하야오는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나이였지만) 작중 마히토의 행적과 겹쳐 보인다. 겐지부로의 원작 소설을 건네준 것이 어머니라는 일화 또한 영화에 그대로 반영된다. 한편으로 이세계의 큰할아버지 또한 하야오 본인처럼 다가온다. 자신이 만든 작업, 무엇보다 많은 작품에서 작중 세계를 붕괴시키며 극을 닫았던 하야오의 영화들은 쓰러짐을 기다리는 나무블록 탑으로 쌓여 있다. 그것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지만, 무너짐을 앞당기는 ‘악의’와 무너지지 않게끔 탑을 쌓을 ‘선의’ 사이에서 장난감은 새로운 주인의 손길을 기다린다.
결국 지브리의 후계자를 찾지 못한 하야오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해석은 아무래도 잠시간 흥미를 끌 뿐인 트리비아에 불과하다. 오히려 마히토의 선택하지 않음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마히토는 큰할아버지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지만 명백한 거절을 표하지도 않는다. 마히토는 단지 나츠코와 함께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그의 선택은 악의와 선의가 공존하는, (아버지를 포함해) 악의를 품은 이들이 전쟁을 일으킨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곳을 변혁하고자 한다거나, 마히토 본인이 선의의 대리자이기에 귀환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돌아가고자 한다. 군국주의 일본의 제식교육을 받았을 그는 다분히 훈련된 신체다. 슬픔이나 어색함을 내비치는 대신 절도 있는 동작을 수행하던 그의 신체는, 그가 아무리 거대한 선의를 품은 사람이었건, 이미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악의에 물들어가던 신체와 다름없다. 마히토가 택한 것은 그러한 모순의 세계로, 이중성의 세계로의 복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