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김성수 2023
한국 영화감독들은 사관(史官)의 충동을 지닌 것만 같다. <서울의 봄>이 개봉한 이후 한국 현대사를 다룬 영화들을 연대순으로 늘어놓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그들의 충동이 빚어낸 하나의 세계관이 발견된다. 현대사를 배경 삼은 시대극은 언제나 인기 있는 장르였다. 특히나 해방과 전쟁으로 시작해 군부독재와 민주화운동, 남북 간의 대립 등의 국면은 풍부한 이야기의 보고다. 물론 그것만으로 한국 영화감독들이 현대사를 영화화하려는 충동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많은 경우에 그러한 영화들은 해당 감독의 ‘최고 흥행작’ 혹은 그에 준하는 수준의 흥행이라는 영애를 얻는다. 우민호의 <남산의 부장들>, 장훈의 <택시 운전사>, 양우석의 <변호인>, 윤제균의 <국제시장>, 김지훈의 <화려한 휴가>, 윤종빈의 <공작>, 장준환의 <1987> 같은 영화들을 떠올려보자. ‘충실한 고증’이라던가 잊혀져 가는 역사의 재현과 같은 것을 내세우며 등장한 일련의 영화들은 하나의 충실한 계보를 형성한다.
흥미롭게도 이들 영화가 ‘고증’해내는 것은 역사 자체라기보단 글로써 충분히 기록될 수 없는 제스처들이다. 이를테면 <택시 운전사>의 주인공을 몰래 보내주는 계엄군의 존재, <변호인> 속 노무현의 제스처들, <국제시장> 속 재회의 순간, <1987> 속 감화의 순간과 같은 것들. 이들 영화가 현대사 속 인물들의 실명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1980~90년대 영화운동 내지는 학생운동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연출자들은 자신의 기억을 영화를 통해 공적 기억으로 형상화하려 한다. 김성수는 1979년 12월 12일 우연히 총성을 듣고 가졌던 의문에서 <서울의 봄>이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이들의 재현 대사는 현대사의 국면 속 어느 순간들이지 역사 자체가 아니다. 조선의 사관들이 사실뿐 아니라 왕의 성격들마저 기록해 내었음을 떠올려보면, 이들 감독이 지닌 것은 역사에의 충동이 아니라 사관의 충동과 같다.
<서울의 봄>은 그에 충실하다. 전두광(황정민), 노태건(박해준), 이태신(정우성)은 전두환, 노태우, 장태완으로 불릴 수 없다. 하지만 영화의 자막들은 고증 그 자체에 충실하다. 반란군과 진압군, 그리고 그들 휘하의 군인들이 마치 서울이 체스판인 것처럼 움직이는 상황들을 꼼꼼히 스크린에 옮겨둔다. 무수한 자막은 인물들의 (실명이 아닌) 이름들과 직책을 알려주며, 동시에 사건발생 시각과 장소 또한 알려준다. 역사책의 멀티미디어 부교재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영화의 꼼꼼함은 스펙터클한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일반적인 방식의 텐트폴 영화들과 다른 길을 택한다. 꼼짝없이 이태신의 입장을 따라가야 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그의 모든 노력은 결과적으로 물거품이 된다. 승리자는 전두광의 신군부이며, 이태신은 역사의 패자로 남는다. <서울의 봄>은 단지 그 과정을 그려낼 뿐이다. 드라마 <제5공화국>이 역사 자체의 극화를 꿈꾸었다면, <서울의 봄>은 하나의 사건 속에 담겼으나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제스처들을 활성화하려는 충동으로 가득하다.
오진호(정해인)가 공수혁 특수전사령관(정만식)을 지키고자 결사항전하다 목숨을 잃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혹은 곳곳의 군인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도움을 요청하는 이태신과 진압군의 통화 내용을 도청하는 문일평(허화평)을 떠올려보자. 아니면 마지막 양심을 담아 전두광이 가져온 보고서에 서명 시각을 적고 “사후재가입니다”라 말하는 최한규 대통령(정동환)을 떠올려보자. <서울의 봄>이 남기고 싶었던 것은 전두광과 이태신의 대립, 아니 전두환과 장태완의 대립이라기보단 그러한 제스처들이다. 김성수는 역사의 악인과 (정의는 아닐지라도) 본분을 지키고자 한 이들 사이의 차이를 순간의 제스처들로 새겨 넣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 ‘사관의 충동’은 무엇을 하는가?
이 사관들은 역사의 기록자 혹은 재현자라기보단 목격자에 가깝다. 그들은 역사의 영화화보단 순간의 이미지화에 주력한다. 감독 자신은 그것을 목격한 사람으로 자리 잡는다. 이름을 대체하는 이름들은 (소송의 위험을 피하기 위함이라는 외적인 목적 외에도) 아카이브적 질료에 접속할 수 없기에 택해진 우회로에 가깝다. <서울의 봄>을 비롯한 사관의 영화들은 자신의 대상이 인물의 복제라는 것을 그 이름을 통해 드러낸다. 그들은 영화 내내 그 인물을 표상하지만 그 인물은 아닌 존재로 호명된다. 역사의 서술은 자연스레 끼어드는 아카이브적 자료, 텍스트로 옮겨진 정황 설명과 실제 인물의 사진과 영상 등으로 대체될 뿐, 영화의 가짜 이름들은 역사가 아니라 존재했던 (혹은 존재했을) 제스처를 재현한다. 그러므로 <서울의 봄>을 비롯한 이 영화들은 (어떤 의미에서) 역사 영화가 아니다. 이들은 역사가 아니라 목격하고 싶었던 어느 순간을 재현해 낼 뿐이다.